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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한증승의 의료활동과 보(寶) 경영

기자명 민순의

중생구제 원력으로 이룬 전근대적 복지사업

세종 당시 국가가 한증소 운영하며 대민 의료기관으로 활용
의원과 함께 실질적 치료 활동에 임했던 의료 인력은 의승들 
불교계에서 국가 승인·지원 받아 한증소 보 경영 활동하기도

인천  강화군 교동면 고구리에 위치한 조선시대 한증막. [문화재청 문화재지킴이 홈페이지]
인천  강화군 교동면 고구리에 위치한 조선시대 한증막. [문화재청 문화재지킴이 홈페이지]

조선 전기 스님들의 구료활동은 활인원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도성 안팎에 설치된 한증소(汗蒸所)에서도 여러 스님들이 의료활동에 매진하였다. 한증소란 오늘날 우리가 짐작하는 그 의미가 맞다. 땀을 내는 곳. 땀을 내어 병을 낫게 하는 곳. 요샛말로 하면 찜질방이 바로 한증소이다. 놀랍게도 조선 초에는 국가가 한증소를 운영하며 혜민국, 대비원/활인원, 제생원에 이은 또 하나의 대민 의료기관으로 활용하였다. 그리고 이 제도를 처음 시행했던 이는 바로 세종 임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은 재위 4년(1422) “당초 병든 이가 한증소에 와서 땀을 내면 병이 나을 것으로 예상하였는데 (도리어) 그로 인하여 사망한 자가 흔히 있게 되었다. 그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를 널리 물어보아 과연 이익이 없다면 폐지시킬 것이요, 만일 병에 이로움이 있다면 잘 아는 의원을 보내어 매일 가서 보도록 하되, 환자가 오면 그의 병 증세를 진단하여 땀낼 병이면 땀을 내게 하고, 병이 심하고 기운이 약한 자는 그만두게 하라”(‘세종실록’ 17권, 4년 8월25일)고 예조에 명하며 새로 시작한 이 제도의 효용성을 타진하였다. 그리고 한 달여 뒤 “한증소를 도성 밖[門外] 한 곳과 도성 내[京中] 한 곳에 설치하여 두고, 전의감·혜민국·제생원의 의원을 한 곳에 두 사람씩 차정”하기로 함으로써 한증소 제도의 공식적인 시행을 결정하였다(‘세종실록’ 18권, 4년 10월2일).

그런데 제도의 시행이 결정된 날 예조에서 건의한 발언 중에 “동서활인원과 서울 안의 한증소에서 승려[僧人]가 병의 증상은 묻지도 않고 모두 땀을 내게 합니다. …그 병의 증세를 진찰시켜 땀을 낼만한 사람에게는 땀을 내게 하되, 그들이 상세히 살피지 않고 사람을 상해시킨 자는 의원과 승려를 모두 논죄하게 하소서”라는 내용이 있어 주목을 끈다. 이는 한증소 제도가 처음 입안될 당시부터 한증소에서 실제로 환자를 상대하며 치료의 최전선에 있던 이들이 바로 스님들이었음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행착오를 거쳐 혜민국 등에서 의원을 차출하여 상시 배치함으로써 전문성을 제고하고는 있지만, 그 소수의 의원들과 함께 실질적인 치료 활동에 임했던 대다수 의료 인력은 바로 스님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활인원에서 활약한 스님들의 경우에서 확인했듯이, 당시 불교계가 보유하고 있던 수준 높은 의학지식과 그 결과로 배출된 의승(醫僧)들이 존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한증소에 대한 불교계의 참여는 단지 치료활동 자체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세종 9년(1427)에는 대선사(大禪師)의 법계를 갖고 한증 활동에 종사했던 천우(天祐) 스님과 을유(乙乳) 스님 등이 예조를 통해 다음과 같은 제안을 임금에게 올린다.

“한증으로 병자를 치료하는 것은 인애(仁愛)하는 정치[仁政]의 한 가지가 될 만한 일입니다. 지난 계묘년(1423, 세종 5년)에 대사(大師) 명호(明昊)가 탕욕(湯浴)하는 장소를 만들어서 병 있는 백성을 구제하려고 성상께 말씀을 올린 바 있습니다. 성상께서도 가상하게 여기시어 바로 집을 마련해 주시고 욕실(浴室)을 만들라고 명하셨는데, 일이 미처 착수되기도 전에 명호가 죽었습니다. 저희들은 그 일을 계속하기 위해 널리 시주를 받아들여 욕실을 증설하였고, (그 결과) 한증으로 병을 고친 자가 계속하여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병자는 땔나무를 준비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죽을 쑤어 먹거나 소금·간장 따위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으므로, 저희가 비록 안타깝고 민망하오나 공급할 길이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상께서 쌀 50섬과 무명 50필만 주시면 그것으로 밑천삼아 이자[利]만 가지고 쓰면서, 본 밑천은 도로 나라에 반납하고 영구히 보(寶)를 세워서 그것으로 병자들을 구제하는 것이 소승들의 지극한 소원이옵니다.”(‘세종실록’ 36권, 9년 4월24일)

임금은 이 스님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쌀과 베를 주며 한증소 운영을 위한 보의 경영을 허가하였다. 뿐만 아니라 의원 한 사람을 정하여 의술활동을 관장케 하고, 1년마다 교대하도록 하였다.

‘실록’은 위의 기사를 기록하는 가운데 보(寶)에 대하여 “쌀이나 베를 가지고 본전 삼아 두고서 이자만 따서[存本取息] 영구 비용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먼저 세종 4년에 시작된 한증소 제도가 국가가 운영 주체가 되어 의학스님[의승(醫僧)]들을 그 해당 인력으로 수용하였던 것이라면, 세종 9년의 이 조처는 불교계에서 발의하고 추진한 한증소 보의 경영 활동을 국가가 승인하고 지원하는 형식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인용문의 내용에도 나와 있듯 이는 일찍이 세종 5년 명호 스님의 제안에 따라 시작된 것이라고 하므로, 당초 국가가 주도했던 한증소 제도와 교단이 주도한 한증소 보의 경영 활동이 거의 병립하며 시행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스님들이 주도하는 한증소의 보 경영과 의료활동은 여러 스님들에 의해 동시다발적으로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것 같다. 세종 9년에 건의를 수락 받은 천우와 을유 스님 외에도, 세종 11년(1429)에는 대선사 일혜(一惠) 스님이 “(과거에 지은 한증목욕실이 너무 좁으므로) 존비(尊卑)와 남녀의 한증목욕실을 구분하기 위해 세 곳을 더 짓고(자 하니)…풍저창의 쌀 1백 석과 전농시의 면포 1백 필을 빌어주어서 짓게 하고, 마친 후에 평안도·함길도 두 도에 나아가서 관청 창고에 바치게 하여 환상미(還上米) 1백 석을 줄 것”을 제안하여 받아들여졌다.(‘세종실록’ 44권, 11년 6월27일.)

사실 교단에서 국가의 승인을 받아 경영하였던 보의 존재는 앞서 보았던 해선(海宣) 스님의 별와요에서도 확인했던 바 있다. 해선 스님이 세종 6년(1424) 기와 굽는 일의 세 가지 어려움인 땔나무 준비, 물자 공급 비용, 공전 비용의 마련을 위하여 면포 3천 필로 세 가지 보를 만들 것과, 이를 위하여 본인의 사재인 쌀 1천 석을 재원으로 삼겠다고 했던 것을 독자분들께서는 기억하실 것이다.(2022.5.25. ‘9. 기와 굽는 스님들’) 이처럼 조선 초에는 스님들이 국가의 보조 하에 보를 경영하면서 별와요나 한증막 등 국가의 행정업무를 일부 위임받아 수행하였던 일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스님들의 대민 사회 활동은 국정운영의 효용성에서 봤을 때 국가의 업무를 교단의 인력과 경제력으로 대신해 주는 현실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기저에는 하화중생이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고자 했던 스님들이 이루어낸 일종의 전근대적 양상의 복지사업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별와요, 활인원, 한증소 등의 현장에서 활약했던 스님들은 산중에서 고요히 수도에 전념하는 방식이 아니라, 중생의 삶의 한가운데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그들의 안위를 보듬는 방식으로 만행의 구도를 이루어갔던 것이다.

민순의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nirvana1010@hanmail.net

[1653호 / 2022년 10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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