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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유마경변①-막고굴 423굴 문수사리문질품(文殊師利問疾品)

기자명 오동환

문수보살·유마거사 양립시켜 ‘불이’의 핵심 역설

‘유마경’ 관련 주석서·변문·시가 등 문헌만 150여권
탁월한 서사 구성에 비유 통한 쉬운 설명으로 인기
대조적 외형 벽화로 ‘번뇌가 곧 보리’의 이치 시각화

막고굴 276굴 유마경변.서벽 감실의 좌측에는 문수보살을 우측에는 유마거사를  배치했다.
막고굴 276굴 유마경변.서벽 감실의 좌측에는 문수보살을 우측에는 유마거사를  배치했다.
막고굴 423굴 유마경변.
막고굴 423굴 유마경변.

수대(隋代, 581~618)에 건설된 막고굴 423굴은 서벽 감실에 미륵불을 주존상으로 모시고 있다. 그 위로 이어진 천장부에는 중국의 전통적인 목조건축 형식의 전당이 그려졌다. 전당 안에는 양쪽으로 난 창을 통해 대중들이 운집해 있는 것이 보이고, 중앙에는 각자의 대좌에 마주 앉은 두 인물이 눈에 띈다. 이처럼 건축물 안에 두 인물이 마주 앉은 구도가 낯설지는 않다. 바로 ‘법화경’의 견보탑품을 도상화한 석가·다보 이불병좌상(二佛並坐像)의 예에서 비슷한 구도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11회 참조).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423굴의 벽화는 전혀 다른 도상을 표현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마주 앉은 두 인물의 외양은 불타의 모습이 아닐뿐더러, 양자의 모습도 전혀 다르다. 수미좌에 앉은 좌측 인물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원형의 두광(頭光)을 갖추었으며, 목과 가슴 위로 영락 장식을 하고 있어 보살 신분임을 알 수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방형의 평상에 앉은 우측 인물은 색이 바래 희미하지만, 포의박대(褒衣博帶) 식의 넉넉한 사대부 복장에 오른손에는 무언가 지물을 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머리에는 두광을 갖추지 않아 맞은 편의 보살과 대조되며, 세속의 신분임을 암시한다. 익히 알다시피, 보살과 재가자가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 이 장면은 ‘유마힐소설경(이하 유마경)’에 등장하는 문수보살과 유마거사 사이의 설법을 묘사한 것이다. 

유마힐(維摩詰, Vimalakirti)은 재가인이지만 청정한 율행을 받들며, 무량한 제불을 공양하고 깊이 선근을 심어서 무생법인을 터득한 자로서, 변재에 걸림이 없고 신통으로 유희하며, 무량한 방편으로 중생을 이롭게 하는 거사이다. ‘유마경’은 곧 장자 유마힐을 주요 설법자로 성립된 경전이다. 경전의 주요 서사는 유마힐이 방편으로써 몸에 병이 있음을 드러내는 것에서 시작한다. 부처님은 제자들과 보살들에게 유마힐의 병문안을 가도록 권하였으나, 그들은 모두 일찍이 유마힐에게 언설로 비판받은 적이 있으므로 모두 감히 병문안을 가지 못한다. 오직 지혜제일의 문수보살만이 유마힐을 찾아가 병의 근원을 물으며, 설법의 대화를 이어간다. 

‘유마경’은 초기 대승경전의 하나로 일찍부터 한역되어 중국에 유통하였다. 최초 역출에 대한 기록은 188년(엄불조 역, ‘유마힐경’)이지만 유실되었으며, 223년에 지겸이 역출한 ‘불설유마힐경’ 3권은 아직까지 전해지고 있다. ‘유마경’이 본격적으로 중국에 유행한 것은 구마라집에 의해 ‘유마힐소설경’ 3권이 역출된 이후이다. 현존하는 돈황문서 중, ‘유마경’과 관련한 문서는 대략 930여권이며, 그중 대부분은 ‘유마경’, 특히 구마라집 역본으로 770여권에 달한다. 그 밖에 ‘유마경’의 주석서, 변문, 시가 등등의 문헌이 150여권에 이르러 ‘유마경’의 대중적 인기를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유마경’이 중국에서 특히 유행할 수 있었던 원인은 탁월한 서사적 구성을 갖추고, 다양한 비유를 이용하여 난해한 추상적 개념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게다가 재가자인 유마힐이 경전의 주요 설법자로 등장하여 보살과 제자들과 언설을 펼치는 구도는 독자로 하여금 경전의 요의에 대한 깊은 사유로 이끈다. 이런 이유로 ‘유마경’은 출가, 재가자를 막론하고 널리 사랑받는 하나의 텍스트가 되었다. 

중국에서 ‘유마경’의 성행은 불교미술의 영역에서도 독특한 영향을 미쳤다. 유마경변 도상은 인도 및 중앙아시아 사이에 별다른 영향관계 없이 중국 내에서 형성하고 발전하였다. 5세기 남북조 시대의 병령사·운강·용문석굴 등지에서 이미 문수보살과 유마거사를 대칭 구도로 배치한 문수문질(文殊問疾)의 장면이 조각되었다. 유마거사의 외형은 중국의 전통적인 현자(賢者)의 모습을 따르고 있다. 수대의 또 다른 작품인 276굴은 독특하게 문수와 유마를 입식(立式)으로 표현하였는데, 유마거사를 보면 머리에는 두건을 하고, 넉넉한 품의 사대부 복장을 하였으며, 손에는 주미(麈尾)를 쥐고 있는 모습이다. 이것은 이후의 유마거사의 외형을 표현하는 도식이 되었다. 돈황에서 유마경변이 등장한 것은 상대적으로 늦은 시기인 수대에 이르러서인데, 이 역시 유마경변 도상이 중원에서 창출되어 주변으로 전파되었음을 방증한다. 

당대(唐代) 장언원이 기록한 ‘역대명화기’에 따르면, 동진(東晉)의 화가 고개지(顧愷之, 344~405)는 유마힐상을 처음으로 창안하였으며, 수도 건강의 사찰 와관사에 유마힐상을 벽화로 그렸다. 고개지의 유마힐상은 이후의 화사들에게 유마힐상의 주요 표본으로서 작용하였다. 그런데 이때의 유마힐상은 유마거사 단독상으로 표현되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돈황석굴에서는 모두 문수보살을 동반한 대립구도로 그려졌다. 그토록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유마거사가 단독적인 신앙의 대상으로서 돈황석굴에 조성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유마경’의 요의는 반야의 공사상에 입각하여 펼치는 ‘불이법문(不二法門)’이다. 이에 따르면 분명 무명에 의한 중생의 번뇌는 단멸되어야 하며, 보리는 궁극적으로 증득해야 할 경지이지만, 보리란 번뇌를 전제하는 것이며, 중생이 없으면 부처 역시 존재가 성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유신(有身)이 여래의 종자이며, 무명과 애착이 여래의 종자이며, 탐·진·치가 여래의 종자이며, 네 가지 전도(顚倒)가 여래의 종자이며…일체의 번뇌가 모두 여래의 종자”이다. 

그러므로 “번뇌가 곧 보리”이며 둘이 아니라고 설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이(不二)’는 역설적이게도 양자의 다름에 대한 긍정을 전제로 한다. 423굴의 유마경변에서 문수보살과 유마거사는 외형과 신분과 상징하는 바의 다름을 명백하게 드러내는 것은 그러한 이치이다. 

오동환 중국 섬서사범대 박사과정 ory88@qq.com

[1655호 / 2022년 11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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