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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일상의 불교(2)

애착·동정심·과잉반응·무관심과 자비희사 구분해야

‘팔정도’가 연습이면 ‘자비희사’는 실전…무한분법 스펙트럼
수행은 친절 베푸는 대상 확대하면서 실천 역량 기르는 과정
최고단계 친절인 ‘대자대비’는 대상 가리지 않는 무조건 사랑

불교인이 일상을 살아가는데 잊지 않고 가져야 할 마음은 친절한 마음, 연민의 마음, 기뻐하는 마음, 평온한 마음이다. 사진은 백제 후기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국보). [문화재청]
불교인이 일상을 살아가는데 잊지 않고 가져야 할 마음은 친절한 마음, 연민의 마음, 기뻐하는 마음, 평온한 마음이다. 사진은 백제 후기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국보). [문화재청]

지난 연재에서 수행과 삶의 관계를 연습과 실전에 비유해서 얘기하였다. 혼자서 아무리 드리블과 자유투 연습을 많이 한다 하더라도 실전에서 그 노력의 결과가 발휘되지 못한다면 그 연습의 내용과 방법은 달리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수행은 혼자서 하는 연습이지만 삶은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실전의 게임이다. 그런 점에서 수행자의 불친절함은 삶이라고 하는 실전의 게임에서 패한 것이다. 

일상 관점에서 수행의 진전과 완성을 가늠할 수 있는 불교적 기준에 무엇이 있을 수 있을까? 곧바로 떠오르는 것은 팔정도다. 흔히 팔정도는 깨달음에 이르는 여덟 개 바른길이라고 한다. 그러나 팔정도는 ‘여덟’ 개 길이 아니라 여덟 가지 요소로 이뤄진 ‘하나’의 길이다. 그래서 팔정도를 영어로는 ‘Eightfold Path’라 하여 복수의 ‘paths’가 아니라, ‘path’라는 단수로 표현하는 것이다. 한역에서도 팔정도(八正道)라고 하는 이외에 팔품도(八品道)라는 이역(異譯)도 있는데, 이는 ‘하나의 길’이란 의미를 보다 명확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한편 팔정도는 부처가 되는 길이면서 또한 부처가 살아가는 모습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팔정도가 수행의 진전과 완성을 판별하는 기준으로 얼핏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럽긴 하다. 그런데 팔정도는 수행을 구성하는 요소이지만 수행으로 드러나는 구체적이며, 전체적인 삶의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사람의 몸으로 치자면 호흡기, 순환기, 소화기 혹은 오장과 육부에 해당하는 것으로 진단과 분석에는 도움이 되지만 건강한 몸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오장육부 각 기관의 기능이 정상적이라야 건강한 몸이 되는 건 당연한 이치지만,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은 일상에서 활동하는 건강한 몸이다. 열심히 일하고, 웃고, 친구를 만나 대화하고, 때로는 속 썩이는 자식문제나 힘든 가정사로 고민도 하고, 불의를 보고 주먹을 불끈 쥐기도 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보면서 슬퍼도 하는 그런 모습이다. 오장육부 기능이 원활하다면 이는 건강한 몸으로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팔정도 혹은 바라밀 수행을 제대로 닦고 있다면 어떤 모습이 드러날까 하는 문제다. 

팔정도, 바라밀 혹은 계·정·혜 삼학의 수행이 구체적 삶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사무량심(四無量心) 혹은 사범주(四梵住)라 일컬어지는 자·비·희·사다. 친절한 마음(혹은 자애심), 연민의 마음, 기뻐하는 마음 그리고 평온한 마음을 뜻한다. 불교인이라면 일상을 살아가는데 늘 잊지 않고 가져야 할 마음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실천 덕목을 가리키는 범행(梵行) 혹은 범주(梵住)라는 표현이 그러하듯 자·비·희·사의 마음가짐은 천신(天神)이 머무르는 영역이자 천신의 행위로 일컬어진다. 또한 무량심이란 표현이 뜻하는 바, ‘무한한 사랑의 원천’이기도 하다. 불교인이라면, 출재가를 막론하고 자·비·희·사는 수행이면서 실천의 모습이다. 일상의 관점에서 볼 때 팔정도가 연습이라면 사무량심은 실전이다. 실전의 게임이 쉬운 상대부터 어려운 상대가 있는 것처럼 자·비·희·사의 실천 또한 쉬운 단계부터 고난도의 단계, 그야말로 깨달은 부처의 수준에서라야 가능한 단계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무한분법에 가까운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 실제 우리 인간의 모습이 그러지 아니한가. 흔히 중생즉불(衆生卽佛)이라는 선가(禪家)의 레토릭에 익숙해진 우리들은 우리 존재가 중생 아니면 부처라고만 생각하지만, 실제 삶에서 바라본다면 중생과 부처 사이에는 무한분법에 가까운 다양한 모습들이 공재(共在)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자·비·희·사의 실천 수준은 곧 중생과 부처 사이의 무한한 단계와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비·희·사는 수행이면서 실천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이다.

자, 어느 유행가 가사의 한 구절이다. “바쁠 때 전화해도 내 목소리 반갑나요?” 맥락으로 보아 한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에게 묻는 말이다. 사랑의 정도를 확인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로는 대단히 효과적인 질문이다. 자·비·희·사는 실천의 정도를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다. ‘친절함’을 뜻하는 자(慈) 곧 자애심을 예로서 얘기해보자. 대상이 누구인지에 따라 우리의 친절함은 늘 달라진다. 또 그것을 당연시 여기기도 한다. 가까운 연인, 친구, 혹은 고마운 가족에게 친절한 것은 쉽다. 그러나 잘 모르는 사람, 길 가다 마주친 사람 더 나아가 나를 힘들게 하고 심지어 나를 해코지하는 사람에게도 친절한 마음을 가지기는 쉽지 않다. 대상만이 친절함의 정도를 결정하는 변수가 아니다. 나의 현재 상태 또한 중요한 변수다. 지금 바쁜지, 힘든 상태인지 등에 따라서도 나의 친절은 달라진다. 수행은 결국 내가 친절을 베푸는 대상을 확대하는 과정이고, 언제나 어디서나 실천할 수 있는 스스로의 역량을 기르는 과정이다. 불교에서 최고 단계의 친절을 뜻하는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마음이란 곧 대상을 가리지 않는 무조건적 사랑의 마음을 말한다. 수행의 관점에서 삶을 바라보면 ‘고슴도치 제 새끼’ 사랑하는 동물적 본능의 사랑에서부터  대자대비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이르는 그 수행의 여정에서 지금 나는 어디에 있는가를 확인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또한 철학적 지식으로서의 무아, 연기 등 불교적 교리가 실천되는 구체적 모습이 바로 자·비·희·사의 실천이기도 하다. 무아를 일상에서 실천하는 일이 곧 대자대비가 아니겠는가? 

한편 자·비·희·사는 그 자체가 수행의 정도를 가늠해 보는 체크 포인트이자, 수행이 필요한 이유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불교전통에서 자(慈)의 가장 먼 적은 악의나 분노라고 하고, 가까운 적은 애착이라고 한다. 먼 적은 알아보기 쉽다. 그러나 가까운 적은 혼동하기 쉬운 상태로서 알아보기 어렵고 때로는 구분을 못하기도 한다. 자식을 누구나 사랑하지만 그 사랑은 자칫 애착이 되어 버리기 쉽고 많은 경우 애착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애착과 혼동되는 사랑(혹은 친절한 마음)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듯이, 오히려 관계를 망치게 된다. 나머지 세 마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연민의 마음을 뜻하는 비(悲)의 먼 적은 잔혹함이지만 가까운 적은 동정심이다. 우리는 연민의 마음을 어떻게 가져야 단순히 상대를 불쌍히 여기는 동정의 마음과 구별할 것인가?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을 함께 기뻐하는 희(喜)의 먼 적은 원망이지만 가까운 적은 과잉행동이다. 평정심을 뜻하는 사(捨)의 가장 먼 적은 혐오이지만 가까운 적은 무관심이다. 수행 좀 했노라 하는 분들에게서 보이는 것이 바로 무관심을 마치 평정심 혹은 무심(無心)인양 착각하는 경우다. 그리고 이 무관심은 거만함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가까이 있는 적은 식별하기 어렵다. 애착·동정심·과잉반응·무관심 등은 흔히 우리가 일상에서 자·비·희·사로 착각하면 하는 행동들이다. 고요히 마음을 가라앉히고[止] 나와 세상을 바라보는[觀] 규칙적 수행 없이는 늘 저지르기 쉬운 실수(?)들이다. ‘실수’라 하지만 사실은, 수행의 마음으로 들여다본다면 결국 탐진치 삼독심이 교묘히 드러난 형태의 번뇌일 뿐이다.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 stcho@korea.ac.kr

[1657호 / 2022년 11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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