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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정간보에 담긴 세종·세조의 치세염원

기자명 윤소희

16자문 다라니 수지해 법계 중생을 이롭게 하다

중국 악서엔 다양한 숫자 보이나 32는 찾을 수 없어
‘관찰제법행경’에 32덕문·16자문 다라니 설하고 있어 
세상 원만히 이롭게 하는 내용 세조의 염원과 맞닿아

위 사진은 힌두사제의 패엽경 찬팅. 아래는 순서대로 원구(圓丘)제례 율자보, 종묘제례악 중 32정간 정대업, 16정간 정대업. 
위 사진은 힌두사제의 패엽경 찬팅. 아래는 순서대로 원구(圓丘)제례 율자보, 종묘제례악 중 32정간 정대업, 16정간 정대업. 

‘한서’의 ‘율력지(律歷志)’에는 “국가를 세운 제왕은 첫째 수(數)를 준비하고, 둘째 소리(聲)를 조화시키고, 셋째 길이의 단위, 넷째 부피의 단위, 다섯째 무게의 단위를 제정한다”고 적고 있다. ‘상서(尙書)’의 ‘대고(大誥)’에는 “물과 불은 백성이 마시고 먹는 것, 쇠와 나무는 백성의 삶을 흥기하는 것, 흙은 만물의 생의 자질이니 사람이 이를 활용한다”는 가송(歌頌)을 노래하였다. 악(樂)에 부여하는 의미가 이토록 지중하였으므로 중국의 율정 이론은 누대를 이어서 발전해왔으나 음의 시가를 나타내는 기보체계는 명대까지도 없었다. 

중국 사람들의 문자는 폐쇄 독립문자로써 고저승강(高低乘降)의 성조로 뜻을 구분하였고, “노래란 말을 길게 하는 것(歌永言 聲依永 律和聲)”이었으므로 음의 시가와 관련한 리듬 절주에 대해서는 관심이 덜하였다. 이런 현상은 리듬절주가 없는 문묘제례악과 무박절로 모음을 늘여 짓는 범패에서도 드러난다. 선율이 이러하니 악보는 음 높이를 나타내는 율자보(律字譜)로 통용되었다. 범패하는 스님들이 의례문 율조를 지을 때 고하자(高下字)를 짚지 박자를 짚는 경우가 없는 것도 같은 현상이다.   

이와 달리 세종은 음의 시가를 표시할 수 있는 유량악보를 창안하였다. 이 악보는 세로 한 줄을 32칸으로 하여 우물 정(井)자와 같은 한 칸을 한 박자로 표시할 수 있어 ‘정간보’라 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임금의 사소한 일상까지 낱낱이 기록하였는데, 이상하게도 32정간 창제에 대한 기록은 없다. 궁상각치우 5음에 온갖 의미를 부여하고, 악기의 생김새에도 우주와 자연 이치를 부여하여 백성을 교화하려던 당시 악정에 비추어보면 매우 이례적이다. 수십년간 이에 대해 의문을 가져오다 ‘악학궤범’에서 32묘음 창사를 발견하면서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하였다.

세종·세조대의 궁중악을 기록한 ‘악학궤범’에는 “… 관세음이 시방에 두루하여 백성의 소리를 듣고(尋聲八苦) 32묘음으로 답한다(妙應三十二)”는 노래와 가무가 수록되어 있다. 이 가사에는 관세음의 마음으로 32묘응하는 세종의 마음이 담겨있고, 한글 창제 후 유교 경전이 아닌  ‘석보상절’과 ‘진언집’을 발간했던 데에서 세종의 불심을 읽게 된다. 그러나 당시 국시(國是)가 유교였으니 어찌 그 속내를 드러낼 수 있었겠는가.

중국의 고대 악서에는 특종의 일(一), 음양의 이(二), 오행의 오(五), 칠음계의 칠(七), 여덟 가지 악기재료의 팔(八), 한 옥타브를 구성하는 율정 십이(十二), 6명씩 6줄 일무의 36(三十六), 8일무의 64(六十四) 등 갖가지 숫자가 상징적 기호로 활용되어 왔으나 32와 관련되는 숫자는 발견할 수 없다. 그에 비해서 인도문화와 불교에서는 32가 특별한 숫자로 나타난다. 

힌두의 ‘베다경’에는 니브르띠 락샤(Nivṛtti lakṣha)와 쁘라브르띠 락샤(Pravṛtti lakṣha)의 두 가지 다르마(法)가 있다. 베다에서 다르마는 사람이 항상 간직해야 하는 진리·도덕·윤리·규범을 의미하는 것으로, 니브르띠 락샤는 해탈적 삶을 위해서, 쁘라브르띠 락샤는 세속 삶을 위해 지녀야 하는 다르마였다. 고대 인도에서는 8악사라(운율)·4파다(행)에 의한 32슬로까 운율이 널리 애송되었고, 힌두 사제들은 비나를 타며 32 슬로까 게송을 노래하였다.

‘베다경’의 32다르마가 불교에서는 석가모니의 32상호가 되어 ‘삼십이상품’ 경전이 성립하였다. ‘장아함경’을 비롯한 경전에서는 “서른두 가지 상호를 성취한 사람이면, 반드시 두 곳에서의 역할이 있으리니, 출가한 이는 진리를 설파할 것이고, 만일 속가에 있으면 반드시 전륜왕이 되어 총명하고 지혜가 있으며, 군사를 거느리고 천하를 다스리며, 스스로 자재하여 법다운 법왕으로서 7보를 성취할 것이다”고 적고 있다.

‘관찰제법행경’에서는 32상과 16자문으로 모든 장애를 극복하여 세상을 원만히 이롭게 함을 설하고 있다. 이 경은 대승불교 초기에 성립된 것으로, 모든 천인의 지(支)가 되어주고, 제상(帝相)에 수순하며, 정행지(淨行地)를 얻고, 무아제(無我際)에 통하며, 계(界)를 벗어나 모든 중생이 있는 곳을 알고, 존귀한 사람과 친하며, 증상만(增上慢)을 여의고, 인력(忍力)으로 다섯 가지 장애를 뛰어넘으며, 명색(名色)에서 그 본성을 알 수 있는 성현으로, 출가자는 부처가 되고 속인은 세간의 큰 인물이 됨을 설하고 있다. 

세종의 악정(樂政)을 이어받은 세조는 한 줄을 16칸으로 하되 3칸·2칸·3칸 단위로 마디를 그어 대강을 표시하였다. 이는 리듬절주를 나타낼 수 있고, 율명 대신에 오음을 약식으로 표시(上一·下一)하여 기보의 기능성을 높였다. 붓으로 악보를 그리던 시절 이와 같은 표기는 악사들의 업무절감에 획기적이었다. ‘관찰제법행경’은 32덕목과 16자문 다라니를 이어서 설하고 있어, 세종의 32정간보와 세조의 16정간보를 보는 듯하다.
 
특히 16자문 다라니를 수지하여 ‘비(悲)’로써 세상을 씻어 법계의 중생을 이롭게 하며 모든 장애를 극복하여 세상을 원만히 이롭게 하는 내용은 세조의 치세 염원과 맞닿아 있다. ‘악학궤범’에는 이를 설행하는 절차가 상세히 설명되고 있으나 다종교 국가의 공공기관인 국립국악원에서는 연화무와 처용무까지만 설행하고 불교 창사는 공연을 하지 않아 그간 잊고 지냈다. 앞으로 동국대 한국음악과에서 사명감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와 공연을 설행해 보면 좋겠다.

윤소희 음악인류학 박사·한국불교음악학회 학술위원장
ysh3586@hanmail.net

[1657호 / 2022년 11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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