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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수교 50주년, 상월결사 인도순례] 가야로 조명하는 한반도와 인도 교류

  • 새해특집
  • 입력 2022.12.29 15:07
  • 수정 2022.12.29 20:16
  • 호수 1663
  • 댓글 0

한국·인도 수교 50주년일까, 가야·인도 교류 1975주년일까

아유타국과 가락국 교류 관련 ‘삼국유사’ 기록 학계 여전히 논란
최근 각종 연구 결과 고대 해상무역 통한 문화교류 가능성 충분
사관론에 매몰되지 않고 역사의 빗장을 제대로 열때 진실 규명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아유타국의 허황옥이 가락국 김수로왕을 만났다는 기록이 있다. 허황옥의 모습을 형상화한 상(위)과 허황옥이 가락국으로 올때 배에 실어 함께 옮겨왔다는 파사석탑(아래)은 그 상징성을 나타낸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아유타국의 허황옥이 가락국 김수로왕을 만났다는 기록이 있다. 허황옥의 모습을 형상화한 상(위)과 허황옥이 가락국으로 올때 배에 실어 함께 옮겨왔다는 파사석탑(아래)은 그 상징성을 나타낸다.

2023년은 한국과 인도가 수교를 맺은 지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73년 첫 수교를 맺은 이후 사회, 문화, 경제 등 많은 분야에서 교류와 협력을 통한 동반자 관계를 맺고 있다. 최근에는 한국의 신남방정책과 인도의 신동방정책이 맞물려서 양국 간의 관계가 더욱 밀접해지고 있다.

사실, 두 나라의 교류는 최근의 일은 아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 침류왕 원년(384)에 외국 승려[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陁)가 진(晉)나라에서 와서 왕이 친히 그를 맞이해 궁궐 안으로 모시고 예우하며 공경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 두 나라의 교류는 이미 4세기에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백제 성왕 4년(526)에는 겸익(謙益)이 직접 중인도 상가나대률사(常伽那大律寺)에 가서 범문과 율장을 공부하여 인도 승려와 함께 귀국해서 흥륜사(興輪寺)에서 율부(律部) 72권을 번역했다고 한다.

한편, ‘삼국유사’에 따르면, 서기 48년에 아유타국(阿踰陀國, Ayodhya)의 허황옥이 가락국(駕洛國) 김수로왕을 만났다는 내용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양국 간의 교류는 침류왕 원년인 384년보다 무려 336년이나 앞서게 된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이 내용의 진위와 관련해서 여전히 논란 중이다. 그 이유로는 대체로 두 가지를 들 수 있는데, 첫째는 허황옥이 왔다고 하는 아유타라는 지역이 실재하느냐이고, 둘째는 당시 어떻게 그 먼 인도에서 배를 타고 올 수 있었냐는 것이다. 

아유타라는 출발지와 관련한 주장들을 보면, 아유타는 인도 갠지스강 상류인 사라유(Sarayu) 강변에 있던 고대 도시국가였다는 설과 태국 아유타국설, 가야가 일본에 세웠다는 일본 분국(分國)설, 남인도 첸나이(Chennai) 아요디야 꾸빰(Ayodhya Kuppam)설 등이 있다. 이들의 주장은 각기 다르지만, 고대에 한국과 인도 간의 교류가 있었음을 전제로 한다. 한편, 이와 달리 ‘삼국유사’의 내용은 한 마디로 허구이며, 만들어진 신화라고 비판하는 주장도 있다. 이 비판에 따르면, 5세기 이전 인도에는 아유타라는 지역이나 지명 자체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삼국유사’에서 서기 48년 허황옥이 아유타에서 왔다는 것은 그야말로 허구이자 신화라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서기 5세기 이전에 이미 아유타라는 지명이 있었음을 증명할 수 있는 여러 문헌들이 밝혀졌다. 특히 불교의 초기 경전을 보면, 부처님이 한때 머물렀던 지역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위치로는 대략 현재 인도의 우타르 프라테시(Uttar Pradesh) 주 사라유 강변 일대로 추정된다. 현재 이 지역은 불교뿐만 아니라, 힌두교와 자이나교의 성지로 추앙받는 곳이다. 이곳이 인도 여러 종교의 성지로 추앙받는 곳이다 보니, 각 종교마다 기록과 묘사가 사뭇 달랐던 점이 이 지역의 실체성을 밝히는데 곤란함을 초래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가야불교 인도 전래설과 관련해서 그간 가장 문제시되었던 것은 출발지인 아유타의 실체성 규명이었다. 아유타라는 지명에 대한 실체성이 규명되지 않는다면, 허황옥이 왔다는 이야기도, 당시 불교가 전래되었다는 이야기도 모두 허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최근의 몇몇 연구는 가야불교사 연구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물론, 그렇다고 최근의 연구가 아유타의 실체성을 확실히 규명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아유타라는 지명이 허구의 산물이 아니라 실재했음은 방증했다.

가야불교 인도 전래설과 관련한 두 번째 문제는 서기 48년에 어떻게 그 먼 인도에서 배를 타고 올 수 있었냐이다. 언뜻 생각해보면, 당시의 해양력으로 그 멀고 험난한 바다를 건너왔다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는 기원 전후로 세계는 바닷길을 통해 다양한 교류를 했음을 밝히고 있다. 더욱이 인도의 해상력과 관련해서 보면, 기원전 2000년 경에 인더스 문명의 하나인 돌라비라(Dholavira)에서 중동 지역과 무역을 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인도에서 중동의 거리야 한반도에 비하면 훨씬 미치지 못하지만, 수 천 년 전에 배를 통해 무역을 했다는 것은 인도의 해상력이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인도를 비롯한 고대의 해상력은 어떠했을까. 일명 해양 실크로드로 불리는 고대 동아시아의 해양 루트를 보면, 크게 지중해·인도권, 인도·동남아시아권, 동남아시아·동아시아권으로 나눌 수 있다. 이는 한 척의 배가 지중해부터 동아시아권으로 이동했다기보다는 여러 거점 지역을 중심으로 상인과 배가 상호 오갔음을 의미한다. 즉 굳이 거대한 배가 아니어도 구간별로 이동한다면, 지금으로써는 상상할 수 없는 먼 거리도 능히 오갈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당시의 항해를 더욱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계절풍의 이용이었다. 지금과 같은 동력선이 없던 당시에는 주로 돛과 노를 이용해 움직였다. 하지만 그것 역시 인력으로 하는 것이라 먼 거리를 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계절풍이라는 바람을 이용한다면 가능해진다. 그래서인지, 최근의 해양 관련 연구들을 보면, 현대과학을 이용해서 당시 계절풍이 언제 어떤 방향으로 불었는지에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이 연구들을 토대로 당시의 계절풍을 보면, 몬순 계절풍이 불었음을 알 수 있다. 몬순 계절풍은 인도양의 독특한 바람으로 4월에서 9월 사이에 바람이 서남쪽에서 동북쪽으로 불고, 11월에서 2월 사이에 바람이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분다고 한다. 즉 이 바람을 통해서 인도로부터 동남아시아, 동남아시아와 중국 사이에 대규모의 교역이 가능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중국과 지척에 있는 한반도, 즉 김해와도 어렵지 않게 문물교역이 가능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삼국유사’에 따르면, 허황옥이 김해 망산도(望山島)에 도착한 날짜가 7월 27일로 바로 몬순 계절풍이 부는 때이니, 우연의 일치라고만 보기에는 사뭇 의미심장하다.

이처럼 고대 해양 실크로드는 인도에서 한반도 남단까지 해상무역이 가능했음을 보여준다. 해상무역이 이뤄졌다는 것은 단순히 물건만 오간 것은 아니다. 바로 문화의 교류다. 즉 해상무역은 상인들을 통한 문화교류의 장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당시 인도에서는 어떤 문화가 전해졌을까. 한국이 조선 이전까지 대표적인 불교국가인 점을 본다면, 그 당시 불교가 전해졌음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삼국사기’에는 소수림왕 372년 중국의 전진(前秦)에서 순도(順道)가 와서 불교를 전했다고 하지만, 그 이전에 불교가 전해졌을 가능성은 굳이 ‘삼국유사’의 내용을 빌리지 않더라도 추론해볼 수 있다.

가야불교 인도 전래설을 주장하면, 의례히 나오는 말이 실증사학적 관점이니 역사철학적 관점이니 하는 사관론(史觀論)에 입각한 이러쿵 저러쿵이다. 물론, 이러한 관점은 학문적 입장에서는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관에 빠져서 정작 놓치고 있는 것은 없을까. 아마 ‘가능성’일 것이다. 가야불교 인도 전래설이 역사성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아직도 해결해야 할 난제들이 수북하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일말의 가능성일지라도 그것을 믿고 연구한 결과, 허황옥의 고향이라는 인도 아유타의 실체성이 어느 정도 규명되었을 뿐만 아니라, 해양 실크로드를 통한 인도와 한반도 남단 간의 문물교역 가능성도 밝혀지고 있다. 

‘서기 48년에 인도와 우리가, 그 먼 거리에서, 그것도 불교가, 말이 돼?’라고만 생각했더라면, 그것은 여전히 허구이자 신화의 산물로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가능성을 주시하며, 포기보다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도전한다면, 결과가 어떠하든 아름답지 않을까.

과거 일본은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여 우리의 역사를 일본에 편입시키고자 했다. 현재 중국은 동북공정을 내세워 우리의 역사를 중국에 편입시키고자 한다. 그들은 없는 역사를 만들어서라도 자신의 역사로 만들고자 하는데, 우리는 가능성이 있는 것들에 대해서도 애써 무시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문해 봐야 할 것이다. 

2023년이 한국·인도 수교 50주년이 될지, 가야·인도 교류 1975주년이 될지는 역사의 빗장을 제대로 열어 보아야 알 일이다.

황정일 동국대 대우교수

[1663호 / 2023년 1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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