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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존중정교분(尊重正敎分 - 바른 가르침을 존중함)

기자명 진우 스님

지혜로운 사람은 나쁜 현상이라도 원망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인다

나쁜 일, 나쁜 상황 맞이하면 오히려 분별심 제거 계기 삼아야
즐거운 낙업을 누리면 그에 대한 과보로 괴로운 고업은 필연 
세상의 움직임은 연기의 모습일 뿐, 실은 좋고 나쁜 것이 없어

현명한 이는 나쁜 것이 가고, 좋은 것이 오길 바라질 않는다. 좋은 것을 분별하는 만큼 나쁜 것이 더욱 선명하게 오기 때문이다.    [법보신문DB]  
현명한 이는 나쁜 것이 가고, 좋은 것이 오길 바라질 않는다. 좋은 것을 분별하는 만큼 나쁜 것이 더욱 선명하게 오기 때문이다.    [법보신문DB]  

수보리 당지시인 성취최상제일희유지법(須菩提 當知是人 成就最上第一希有之法) 약시경전소재지처 즉위유불 약존중제자(若是經典所在之處 卽爲有佛 若尊重弟子) 수보리야 마땅히 알아라. 이 사람은 가장 높고 제일 희유한 법을 성취한 것이니, 만일 이 경전이 있는 곳이면 곧 부처님이 계신 곳이고 이 제자는 존중 받을지니라.

금강경 사구게(四句偈)를 여실히 잘 알아 지닌 사람은, 진실로 무상무주(無相無住)의 진리인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의 법을 성취한 것이니, 이 법은 오직 하나의 드문 법이다. 이렇게 희유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의 이 경전이 있는 곳은 곧 부처님이 계신 곳이요, 부처님의 법이 있는 곳이니, 곧 불보(佛寶)와 법보(法寶)가 있는 곳이면 이를 배워 수행하는 승보(僧寶)가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처님이 있고 부처님 법이 있으면 그 제자가 있게 되는 법이니,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를 이룰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경전이 있으면 곧 읽는 사람이 있으니 승보인 것이요, 이 경전이 있으면 곧 보리법(菩提法)이 담겨 있으니 법보요, 보리법은 곧 깨달음을 말하는 것이니 불보인 것이다. 삼보를 합하면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 된다. 보(寶)는 귀중하다는 이름이다. 불보는 근본인 체성을 완전하게 깨달아, 있고 없고의 유무도 아니요, 그렇다고 공도 아닌 저 언덕의 피안을 이름 함이다. 법보는 유무도 아니요 공도 아니며 그렇다고 저 언덕이 끊어지고 없어졌다는 것도 아닌 고로, 중생을 바로 깨닫게 하는 법의 이치를 말한다.

승보(僧寶)는 이 법을 행하여 자리이타(自利利他)하는 모든 보살을 이름 함이다. 이 같은 보살은 이와 사를 화합하고 능히 유와 무에 집착하지 않으며, 불보와 법보를 융화하여 스스로 삼보일체(三寶一切)가 되는 책임자일 것이다.

사람은 혼자 살 수는 없다. 그러므로 삶에 있어서 누구나 사람과의 관계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삶의 모습이 달라지게 된다. 부모, 형제, 등 가족 간의 관계는 물론, 친구와 이성간, 직장동료, 이웃사람, 사회적 파트너 등 그 어떤 사람을 대하든 평생을 상대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때로는 마음이 맞는 상대가 있는가 하면, 때로는 전혀 마음이 맞지 않는 상대도 있을 것이다. 당연히 마음이 맞는 사람을 대할 때는 즐겁고 기쁘고 행복하고 기분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을 대할 때는 죽을 맛이기도 한다.

원론적으로 보면 이 또한 마음 맞는 사람이 있으니 마음 맞지 않는 사람이 생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인과(因果)현상이다. 그러나 이를 인과적(因果的)으로 바라보는 이는 드물다. 무조건 마음이 맞으면 좋은 사람, 그렇지 않으면 싫은 사람으로 분별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마음에 맞는 사람만을 골라서 찾으려 하는 사람은 마음이 맞지 않고 너무나 싫은 사람이 더욱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는 자신이 원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원하는 만큼 원하지 않는 것 또한 똑 같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이치가 인과(因果)이다. 따라서 재주를 부려 머리를 쓰거나 요령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개성적으로 볼 수도 있으나, 문제는 싫은 사람을 만났을 때의 마음의 부담과 괴로움이다. 상대를 싫어하거나 물리치기만 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좋고 싫은 분별심을 멸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그러니 사람을 만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고로, 그렇다면 마음에 들지 않거나 마음이 맞지 않고 싫은 사람을 대할 때, 항상 고락의 인과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리하여 분별 인과가 화두가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이러한 사람을 만났을 때, 이 사람이 싫거나 나쁜 사람이 아니라, ‘이 사람을 싫게 생각하는 나의 인과업(因果業)이 발동하였구나’ 하고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싫거나 피하고 싶은 사람은 당연히 이러저러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의 말도 안 되는 행동이 싫어하게 되는 이유가 되겠지만, 이럴 때일수록 싫은 감정이 나타나는 자신의 인과업을 생각하면서 미워하거나 싫은 감정을 자제하고 차분하게 대해야 한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따라와 주지 않을 때는 마음을 비우고 설득해야 한다. 설사 설득이 잘 되지 않는다고 포기하지 말고 감정을 잘 조절하면서 대해야 한다. 그래도 어렵다고 판단되면 뒤끝없이 깨끗하게 포기하면 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렇든 저렇든 싫은 감정, 나쁜 감정이 일어나지 않도록 자신을 잘 살펴야 한다.

금강반야바라밀(金剛般若波羅蜜)이란 바로 이러한 좋고 싫은 분별의 감정을 티끌만한 것이라도 완전히 사라지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를 피안이라 하고 해탈, 열반, 정등각, 반야라고도 한다. 티끌만큼의 좋고 싫은 분별의 감정이 있으면 티끌만큼의 괴로움이 생기고, 열 근의 좋고 싫은 분별의 감정이 생기면 열 근의 괴로움이 생긴다. 그리하여 어떤 일, 어떤 모습, 어떤 상이든 이렇게 되고 저렇게 되고,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이러쿵저러쿵 따지는 것은 사실 큰 의미가 없다. 문제는 마음에 좋고 싫은 분별 감정의 인과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금강반야바라밀'을 통해 이를 깨우치려 하는 것이다.

여법수지분(如法受持分 - 법답게 받아 지님)

이시 수보리 백불언 세존 당하명차경 아등 운하봉지(爾時 須菩提 白佛言 世尊 當何名此經 我等 云何奉持) 불고 수보리 시경 명위금강반야바라밀 이시명자 여당봉지 소이자하(佛告 須菩提 是經 名爲金剛般若波羅蜜 以是名子 汝當奉持 所以者何)

그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이 경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하며, 저희들은 어떻게 받아 지녀야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기를 “이 경의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경’이니, 이 이름으로 너희들이 받들어 지닐지니라.”

수보리는 이에 말이 끊어졌고 이치가 다하였다. 더 나갈 길도 없고 물러 설 곳도 없었으니, 스스로 머무름이 없고 분별의 상이 없으며 본래부터 저 언덕에 도달한 것과 같은 오직 한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 마음이란 생각조차 없어서 머무름이 없고 분별상이 없다는 생각까지도 두지 않았으며, 피안에 도달함을 깨닫지도 아니하였다. 정히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 곧 부처님과 더불어 합해졌을 때, 이 모든 일체를 떠나 있음이다. 그리하여 이곳은 말과 이름을 붙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름과 말을 해야 알아듣는 중생들에게는 어쩔 수 없이 이름과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하여 세존께 ‘이 경을 무어라 이름하오리까’ 하고 물은 것이다. 또 ‘이 경을 받아 알기는 오히려 쉽겠으나, 이 경에 들어있는 존귀한 뜻을 알기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니, 어떻게 하면 이 경의 진정한 뜻을 깨칠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이름과 법을 여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세존께서 수보리에게 이르기를, 이 자리! 이 경은 남음이 없는 열반(涅槃)이요, 다함이 없는 청정한 반야지혜(般若智慧)요, 생멸(生滅)이 없는 금강(金剛)의 땅이요, 머무름이 없고 분별(分別) 상(相)이 없는 여래장(如來藏)이요, 정등정각(正等正覺)의 보리법(菩提法)이니, 이름하여 금강반야바라밀(金剛般若波羅蜜)일지니라 하셨다. 

이미 누차 설명했듯이 불교적 관점에서는 코로나19의 세계적인 유행 또한 인과(因果)가 공업(共業)으로 나타나는 현상 가운데 하나이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즐거운 낙업(樂業)을 누려왔으니 그에 대한 과보(果報)로 괴로운 고업(苦業)이 공업(共業)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럴 때 과연 마음을 어떻게 가져야 할 것인가? 물론 이러한 사태를 보고 마음 편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만약 불보살과 마음을 깨친 조사들은 과연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실까? 당연히 마음에 동요가 없을 것이다.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분별심(分別心)이 없기 때문이다. 마음이 불편하고 괴롭다는 것은 곧 편하고 즐거운 시절이 있었던 인과(因果)에 대한 과보(果報)이다. 속된 말로 인과에는 절대 에누리가 없다. 세상에는 결과적으로 공짜가 없다. 그래서 더하고 덜한 것도 없다. 더하면 덜하고 덜하면 더한 것이 인과이니, 더도 덜도 없는 것이 무분별(無分別)이요, ‘금강반야바라밀’이다. 모진 소리가 아니라 당연히 일어날 것이 일어나는 것이요, 연기(緣起)의 흐름이요 소치이다. 다만 이에 힘들고 고통스러운 이는, 인과 업에 따라 자신의 고업(苦業)이 나타나는 시절인연이라고 보면 된다. 인과로 치면 더 좋을 수도 없고 더 나쁠 수도 없으니, 좋은 만큼 나쁜 것이고, 나쁜 만큼 좋은 것이므로, 그래서 좋은 시절인연이 있었으므로 싫고 나쁜 시절인연이 오는 것이다. 이럴 때 지혜를 갖춘 사람은 나쁜 현상을 나쁘게 보지 않는다. 연기와 인과의 흐름으로 볼 뿐이다. 그리고 앞날을 걱정하지 않는다. 연기와 인과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인다. 이유 없이 생기는 것은 없다. 올 것은 막아도 오고 갈 것은 잡아도 간다. 그러므로 이를 보는 마음이 힘들지 않다. 마음이 항상 평화롭다. 무엇에도 머무르지 않고 걸리지 않으며 집착하지 않는다.

또 현명한 이는 싫고 나쁜 것이 가고, 좋은 것이 오길 바라지 않는다. 왜냐하면 좋은 것을 분별하는 만큼 싫고 나쁜 것이 더욱 짙고 선명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연기려니 인과려니 하고 그러려니 하며, 여여(如如)한 마음으로 항상 평안을 누린다. 세상의 움직임은 연기의 모습일 뿐, 실은 좋고 나쁜 것이 없다. 그러니 만약 내가 스스로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이는 무엇 때문에 내가 힘들다고 생각할 것이나, 이는 잘못된 착각이다. 실은 나의 업식(業識) 속에 숨어있는 좋고 싫은 분별심(分別心) 때문에 불편한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금강반야바라밀을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가짜라고 했다. 그러니 한 점의 생각조차도 분별을 일으켜 괴로움의 인과를 받는다고 하였으니, 좋다 싫다 라는 분별이야 말로 얼마나 많은 인과 업을 지어 괴로움으로 다가오게  될 것인가 말이다. 왜 이러한 분별을 멸(滅)해야 하느냐면, 고통과 괴로움의 과보(果報)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러니 항상 이를 잊지 말고 신구의(身口意-몸,입, 생각) 삼업(三業)을 청정히 해야 하느니, 분별심이 없으면 모두가 이루어진다.

진우 스님 조계종 총무원장 sansng@hanmail.net

[1667호 / 2023년 2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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