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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원부터 쪽방촌까지’…강력계 형사의 34년 봉사 외길

  • 무진등
  • 입력 2023.02.06 15:29
  • 수정 2023.02.06 15:30
  • 호수 1667
  • 댓글 4

서울마포경찰서 김윤석 경감

1990년 순경 발령 받은 후 고아원과 인연 맺어 봉사활동 시작
영등포 쪽방촌서 도시락 배달 봉사…2015년부터 국수 공양으로
최초 문화재 전담수사반장…1만여점 도난 문화재 회수 공로세워

‘손님’이었던 김 경감은 이젠 쪽방촌 거주 어르신들이 가장 기다리는 ‘아들’이 됐다. 그런 어르신들을 보며 “퇴직 후 트럭에 채소 담아 장사하며 자유롭게 봉사활동 하고 싶습니다. 언제든지 찾아갈 수 있게요.”라고 말했다.
‘손님’이었던 김 경감은 이젠 쪽방촌 거주 어르신들이 가장 기다리는 ‘아들’이 됐다. 그런 어르신들을 보며 “퇴직 후 트럭에 채소 담아 장사하며 자유롭게 봉사활동 하고 싶습니다. 언제든지 찾아갈 수 있게요.”라고 말했다.

20여년간 매주 목요일 아침이 되면 무조건 휴가를 내고 영등포 쪽방촌으로 향하는 이가 있다. 바로 쪽방촌 ‘큰 형님’으로 불리우는 김윤석(심원) 마포경찰서 경감. 그는 한 사람이 지나가기도 힘든 골목길, 그 사이사이로 바지런히 발걸음을 옮겨 쪽방촌 한 편에 위치한 컨테이너로 만든 쪽방도우미봉사회 사무실로 향한다. 많은 이들이 잠들어 있는 새벽, 동도 트기 전이지만 김 경감의 아침은 조금 이른 새벽 6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사무실에 도착한 그는 숨 돌릴 여유도 없이 앞치마를 질끈 동여매고 봉사자들과 함께 배식 준비에 나선다. 쪽방도우미봉사회가 매주 배식하는 메뉴는 국수. ‘면만 삶으면 끝 아니냐’ 싶지만 이곳의 국수는 조금 남다르다. 500인분 가마솥 2개에 멸치, 북어, 다시마, 파, 양파를 가득 넣고 4시간 동안 육수를 푹 고아낸다. 이런 까닭에 깊고 진한 국물맛으로 쪽방촌 거주민은 물론 노숙자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파다해 수원, 오산 등 멀리서 국수 한 그릇 맛보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오랜 기다림 끝에 받아든 국수 한 그릇은 차갑게 얼어붙은 마음을 녹인다. 그리고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는 김 경감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흐른다. 그렇게 쪽방촌 큰 형님에게 봉사란 삶이었고, 김윤식 그 자체였다.

“모든 것엔 정성이 들어가야 해요. 국수 또한 마찬가지죠. 그래서 조미료로 맛을 내지 않고 직접 육수를 끓입니다. 소박한 국수 한 그릇이라도 그분들에게는 하루를 날 수 있는 힘이 되기에 부처님께 공양올리 듯 준비해요. 그리고 국수를 받은 분들이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때 괜시리 찡해집니다.”

모든 일은 우연에서부터 비롯되듯 김 경감과 봉사 인연도 마찬가지다. 학교를 졸업한 20대 혈기 넘치는 청년은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막막했다.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었다. 택시기사, 막노동판을 전전했다. 결국 입대라는 선택지를 잡아 들었다. 그리고 그 선택은 김 경감의 인생을 변화시킨 탁월한 한수 였다. 의경으로 근무하면서 형사들의 수사, 취조 과정을 지켜보았고, ‘형사가 되고 싶다’라는 꿈을 품었다. 그냥 하루하루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던 그에게 목표가 생겼다. 제대 후 바로 순경으로 채용됐고, 아현2동 파출소로 발령받았다. 1990년 새내기 형사가 첫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봉사왕의 시작도 이곳에서 이뤄졌다.

동료와 함께 마포 상암동 일대를 순찰하던 중이었다. 순찰 중 삼동소년촌 출신이었던 취객을 만나게 됐다. “고아로 살기가 너무 힘들다”라는 취객의 한 마디에 김 경감은 이튿날 삼동소년촌을 방문했다. 시설에는 60여명 넘는 아이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해맑은 웃음으로 그를 반겼지만 왠지 모를 어둠이 아이들을 잠식하고 있었다. 아이들의 형이 돼주겠노라고 마음먹었다. 진로상담은 물론 옷, 생필품을 마련해 정기적으로 소년촌에 기부하고, 경찰차에 아이들을 태워 세상 구경을 시켜줬다. 그렇게 10년을 매주 고아원을 찾아 아이들과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남다른 수사력으로 절도범 검거 실적 전국 1위를 달성하면서 경사로 진급, 영등포경찰서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그가 영등포 쪽방촌과 가양동 임대아파트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한 것도 이때쯤이었다.

“형사라 업무시간이 불규칙적이었지만 짬을 내서라도 아이들과 함께했어요. 10년을 아이들과 함께했는데 영등포로 발령이 나서 아쉬움이 컸죠. 그래도 봉사는 꾸준히 해야하기 때문에 숨 고를 새도 없이 영등포 쪽방촌을 찾아서 활동을 시작했죠.”

그의 두 눈에 비친 영등포 쪽방촌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다. 길은 좁고 미로같을 뿐더러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곳곳에 쓰레기더미가 가득했다. 눈을 감고 이곳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떠올렸다. 그리고 이분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이미 치이고, 데이고, 삶을 놓아버린 이들의 마지막 정착지였기에 낯선 이에 대한 경계가 극심했다. 인사 한 번 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우선 마음을 얻는 것이 급선무였다. 문을 열어주지 않고 욕설이 날아왔다. 하지만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계속 두드렸다. 아무런 저의 없이 다가오는 김 경감의 태도에 서서히 빗장이 열렸다.

먼저 그는 쌀을 포함한 식재료를 전달했다. 한 끼라도 배불리 먹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이들은 쌀을 팔아 번 돈을 술 마시는 데 다 탕진해버렸다. 그 모습을 본 김 경감은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봉사 중단은 있을 수 없는 일. 쪽방촌 거주민 대상 도시락 배달을 결정했다. 그리고 조계사 붓다맘봉사회와 함께 2001년 쪽방도우미봉사회를 결성해 체계적인 봉사 체계를 갖추기에 이르렀다.

이젠 조리할 공간이 필요했다. 마침 선배 한 명이 비어있는 파출소 옥상을 사용하라고 내줬다. 천막을 치고 가스를 연결하고 주방 시설을 만들었다. 으리으리하진 않아도 조리하기엔 충분했다. 처음엔 12명에게만 전해지던 도시락은 점차 늘어나 70명까지 이르렀다. 재정적 어려움에 매번 같은 반찬만 나가다보니 단출한 구성에 아쉬움도 있었다. 뭐 하나라도 더 쥐어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김 경감이 발로 뛰기 시작했다. 재료 수송을 위해 트럭을 구매했고, 지인들을 수소문해 후원처를 연결했다. 또 시장상인들로부터 상품성 떨어지는 물건들을 받아왔다. 새벽에도 가져가라는 연락이 오면 자다가도 트럭을 몰고 한가득 채워 돌아온다. 그러곤 영등포 쪽방촌과 가양동 임대아파트로 향한다.

이들의 꾸준한 봉사활동 소식이 전해지자 김치, 건어물, 채소, 생선 등 후원품이 물밀 듯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김 경감은 당시를 회상하며 “부처님 가피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김 경감은 도시락 배달에만 그치지 않았다. 쪽방촌을 수시로 들여다보니 거주민 상당수가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 탓에 기초수급자임에도 국가에서 지원을 전혀 받고 있지 못했다. 당시는 경찰서에서도 주민등록증 발급이 가능했기에 김 경감은 미등록자 전원이 신분증을 발급받을 수 있도록 했다.

“살펴보니까 주민등록증 없이 살아가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충격이었어요. 여기 거주하는 분들 거의 기초수급대상자로 지원을 받을 수 있는데 말이죠. 쪽방촌이라고 해도 방세를 내야해요. 그분들은 빚만 떠안고 살고 있던 거죠. 주민등록증 발급을 다 해주고,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했어요. 또 가양동 임대아파트도 생활이 어려운 분들이 많아 매일 채소, 생선 등 식재료들을 나눠주고 있어요. 이것도 벌써 20년이 넘었네요.”

사무실 겸 법당 '대광사' 앞에선 김 경감.
사무실 겸 법당 '대광사' 앞에선 김 경감.

쪽방도우미봉사회의 사무실 겸 조리실 역할을 했던 파출소가 재개발 지역에 포함되면서 급히 새로운 장소를 물색해야 했다. 마땅한 곳이 없었다. 김 경감은 쪽방촌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건물을 지을 수 없기에 컨테이너 박스 1개를 설치했다. 조리시설은 물론, 한 보살님이 1000만원을 지원하면서 ‘대광사’라는 자그마한 법당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매주 목요일 700인분의 국수와 주먹밥을 준비해 쪽방촌을 찾는 이들에게 나눈다. 2017년까지는 쪽방 거주민과 서울 노숙자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공연도 진행했다. 하루라도 마음껏 먹고 무대를 보면서 즐기길 바랐다. 경찰 악대, 기획사를 통해 가수를 초청하고 육개장과 막걸리를 원 없이 나눴다.

“불자들이 함께하는 자리에 부처님을 모시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일이죠. 어떻게든 만날 인연이었던 것인지 한 보살님의 보시로 부처님을 모시고 점안식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재정적으로 힘든 상황에서도 지금껏 봉사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보이지 않는 부처님의 도움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의 봉사활동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일부 동료 경찰들의 은근한 시기질투가 없지 않았다. 당시 ‘청룡봉사상’ 제도가 있어 봉사활동을 많이 한 경찰은 진급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다. 과거 이 제도를 통해 승진한 경찰관이 많았기에 김 경감도 그런 의도로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는 기본, 투서도 많이 받았다. 파출소로 전근까지 갔다. 10년이 넘도록 그의 진실성은 오해를 받았다. 때문에 근무 시간에는 업무에만 집중하고, 휴가를 내거나, 반차를 통해서만 봉사활동을 이어왔다. 밤샘 근무가 끝난 뒤에 주어지는 짧은 시간에도 쪽방촌을 찾아갔다. 그렇게 20년이 지나고, 30년이 넘어가면서 그의 진심은 인정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는 컨테이너도 불법 건축물이라며 민원이 계속 들어가면서 가압류 5000여만원이 걸려있는 상태다. 코로나19로 심한 타격을 입어 후원이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어서 김 경감의 시름은 깊어지고 있다.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지금껏 달려왔어요. 퇴직금도 일부는 미리 타서 활동비로 사용하기도 했죠. 매주 목요일마다 밥을 먹기 위해 줄을 서는데 어떻게 포기할 수 있겠어요. 물가도 오르고 사람들의 마음도 닫히면서 후원이 줄어드는게 안타까울 뿐이에요.”

도난 문화재 회수 공로로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으로부터 표창장을 받았다.
도난 문화재 회수 공로로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으로부터 표창장을 받았다.

‘봉사왕’ 외에도 그의 이름을 수식하는 단어가 하나 더 있다. 바로 ‘검거왕’이다. 절도범 검거는 물론, 서울지방경찰청 문화재 전담수사반장으로 약 7년간 근무하면서 1만여점이나 되는 도난 문화재를 회수하고 범인들을 체포했다. 특히 2006년 10월 문화재청과 공조수사를 통해 문화재보호법 위반 혐의가 있는 문화재 사범 6명을 불구속 입건하고 석탑, 불상, 탱화 등 20종 516점의 중요문화재를 회수한 공로로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으로부터 표창장을 받기도 했다.

그는 자신을 기다리는 이들을 위해 휴가를 내고, 어르신들이 아들 같다며 뭐라도 더 주고 싶어 보관해 놓은 쉰밥도 맛있게 먹는다. 수시로 쪽방촌을 찾아 어르신들의 안부를 묻고 말동무가 되어준다. 잦은 출장, 외근 중에도 봉사만큼은 빠질 수 없다는 김 경감. 정년 퇴직까지 1년 반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의 봉사 여정은 앞으로도 계속될 예정이다.

“지금은 수입이 있으니까 내 주머니 털어서 봉사할 수 있죠. 퇴직 후에는 트럭 몰고다니면서 배추나 채소 장사를 할 겁니다. 그 수입으로 자유롭게 봉사를 하고 싶어요. 그 어떤 제약도 없이요.”

김민아 기자 kkkma@beopbo.com

[1667호 / 2023년 2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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