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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47)(8)의상과 화엄종의 사회적 성격(3)

가장 오래된 문헌과 직계제자들 ‘義湘’ 아닌 ‘義相’으로 표기

출가 사찰인 황복사는 의상과 왕실 관계 추정케 하는 사례
의상은 원효와 함께 신라에 전해진 대승경전들 폭넓게 섭렵
입당 이전 11년간 행적과 종남산으로 직행한 이유는 불분명

황복사에서 출가한 의상 스님은 당에서 귀국한 이후에도 제자들과 함께 이 절을 중심으로 활약했다. 경주 황복사 전경 [문화재청]
황복사에서 출가한 의상 스님은 당에서 귀국한 이후에도 제자들과 함께 이 절을 중심으로 활약했다. 경주 황복사 전경 [문화재청]

의상(625∼702)은 원효와 함께 신라불교사 인물 가운데 가장 주목을 받아서 많은 연구업적이 축적되어 왔다. 원효가 종합적인 불교사상체계의 수립과 무애한 대중교화사로서 평가된 반면에 의상은 화엄종의 창립자와 근엄 성실한 수행자로서 주목받았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의상의 행적과 정치적인 역할에 관해서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기에 이르렀다. 의상의 행적에 대한 자료 정리는 비교적 충실하게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으나, 다양하게 전승된 자료에 나타난 서술 내용의 차이를 완전히 해소할 수 있는 해석의 단계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그리고 의상 화엄종의 사회적 성격에 대해서는 특히 역사학계에서 신라중대의 전제왕권을 뒷받침하는 이념으로 작용하였다는 통설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면서 치열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데, 이 문제는 일차적으로 의상과 그 문도들의 행적에서 왕실과의 연관 관계 사실이 구체적으로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고도의 형이상학적인 사유체계인 화엄사상을 세속의 정치이념에 직접 대입하여 왕권을 옹호하는 정치이론으로 그대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하는 원론적인 차원에서 재고되어야 할 문제이다. 그리고 다른 측면에서는 신라 중대왕권, 특히 삼국통일을 달성한 문무왕의 정치적 위상과 성격에 대한 재검토가 요구되는 문제이다. 이러한 원론적이고 기초적인 문제에 대한 검토가 결여된 채로 논의를 거듭하는 것으로는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그러한 본격적인 연구의 기초를 마련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우선 의상의 행적과 화엄종의 창립 과정을 종합 정리하면서 연구상의 문제점을 지적해 보려고 한다,

의상의 행적에서 먼저 제기된 문제가 그의 법명의 한자 표기상의 문제인데, 문헌에 따라 ‘義湘’, ‘義想’, ‘義相’ 등 3종으로 각각 다르게 표기되어 있다. 신라시대 인명의 한자 표기는 음이 같은 다른 한자를 사용한 예가 많았기 때문에 의상의 경우도 그러한 예로 간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의상의 경우는 인용하는 자료에 따라 같은 문헌에서도 2종으로 표기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혼란스러운 상태이다. 그런데 현존하는 문헌 가운데 가장 오래된 표원의 ‘화엄경문의요결문답’에서 의상의 학설을 인용하면서 ‘相’자로 표기하고 있으며, 그보다도 의상의 직계 법손들의 저술들에서는 일관되게 ‘相’자를 사용하고 있으며, 역사서인 ‘삼국사기’ ‘고려사’ ‘해동고승전’ 등에서도 역시 ‘相’자를 사용하고 있었던 것을 보아 일찍이 김지견이 ‘의상의 법휘고’(1989)에서 주장한 바와 같이 ‘義相’으로 확정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한편 의상의 생애는 통설에 따라 크게 3기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주로 설화 형태로만 전해지는 원효의 행적에서보다는 좀더 구체적인 연대를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시기는 출생한 625년부터 37세로 당 유학하기 이전인 661년까지의 37년간이고, 둘째 시기는 당에 유학한 661년부터 46세로 귀국하는 670년까지의 10년간이다. 그리고 셋째 시기는 귀국한 670년부터 입적하는 702년까지 33년간인데, 이 기간은 다시 부석사를 창건하는 676년, 그리고 문무왕이 세상을 떠나는 681년을 전후로 세분하여 이해할 수 있다.

첫째 시기는 출가하여 국내에서 수학하는 시기에 해당되는데, 출가 이전의 출생 신분에 대해서는 박(朴)씨(‘송고승전’ 의상전)와 김(金)씨(‘삼국유사’ 의상전교조)로 각각 다르게 표기되어 있다. ‘중고’ 시기 신라의 국왕은 김씨, 왕비는 박씨로 표기되는 예가 다수 발견되고 있는데, 당시는 진흥왕과 진평왕 등 국왕만이 중국과의 외교 관계에서 김씨성을 사용한 예가 나타날 뿐이고, 일반 귀족은 아직 성씨를 사용하지 않고 있었으며, 특히 박씨성은 7세기 후반인 중대에서 비로소 확인되기 때문에 의상의 경우 김씨나 박씨 모두 후대에 부쳐진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본다. 따라서 의상이 진골 귀족 출신임을 나타내주는 이상의 의미는 없으며, 6두품 출신인 원효와는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본다. 다음에 의상의 출가 당시의 나이는 관세(丱歲, ‘부석본전’), 동년(童年, 최치원의 ‘기신원문’), 29세(‘삼국유사’ 의상전교조) 등으로 각기 다르게 기록되었는데, 당시 화랑의 예와 같이 일반적인 관습에 따라 15세 전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출가 사찰은 황복사(皇福寺)였는데, 뒷날 의상이 당에서 귀국한 이후인 문무왕 14년(674)에도 제자들과 함께 이 절을 중심으로 활약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원래 의상과 관계가 깊었던 사찰로 보인다. 황복사의 창건자나 그 연대는 미상이지만, 성덕왕 5년(706)에 조성된 ‘금동사리함기’에 의하면 효소왕이 석탑을 건립하였고, 뒤에 성덕왕이 돌아간 신문왕과 둘째 왕비인 신목태후, 그리고 효소왕을 위해 사리·불상·다라니 등을 탑 속에 봉안하고 있었던 사실을 전해주고 있어서 중대 왕실의 원찰 가운데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중대 왕실의 대표적인 원찰이었던 봉성사·감은사·봉덕사·봉은사 같은 성전(成典)사원으로서의 위상을 갖지는 못하였으나, 중대 왕실과 특별한 관계였음은 분명하다고 본다. 따라서 부석사를 창건하기 이전에 황복사를 중심으로 활약하였던 의상과 중대 왕실의 관계를 추정케 하는 사례의 하나가 되며, 원효와는 다른 인연으로 중대 왕실과 연결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한편 의상이 황복사에서 출가하여 수학하고 있던 때는 선덕여왕의 재위 기간으로서 자장이 선덕여왕 12년(643) 당에서 귀국하여 황룡사를 무대로 하여 계율과 교단을 정비하고, ‘섭대승론’ 등의 경전을 강의하고 있었으며, 특히 선덕여왕 14년(645)에는 국가적 위기를 타개하려는 신앙심에서 황룡사에 9층목탑을 건립하고 있었다. 일본의 가마타 시게오(鎌田茂雄)는 ‘신라불교사서설’(1988)에서 황룡사가 동륜계(銅輪系)에 의해 장악되었다면 황복사는 김춘추(태종무열왕) 일파와 연관된 사륜계(舍輪系)에서 경영하던 사찰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김춘추의 아버지인 용수(춘)가 동륜계인 진평왕의 사위이자 선덕여왕의 제부였으며, 특히 3개 왕궁의 관리책임자인 내성사신(內省私臣)의 관직을 가지고 황룡사 9층목탑의 건축을 주관하고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동륜계와 사륜계, 황룡사와 황복사, 자장과 의상의 관계를 도식적으로 연결하여 대립적인 관계로 이해하려는 것은 지나친 추론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의상은 원효와 도반이 되어 불교를 수학하는 가운데 자장의 호국적인 불교와는 다소 다른 성향의 불교를 추구하였던 것 같다. 그런데 의상은 원효와 함께 당시 신라에 전해져온 대승경전들을 폭넓게 섭렵했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섭론종·지론종·여래장사상 등의 구역불교를 공부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신라의 ‘화엄경’ 수용에 관해서는 자장이 오대산신앙과 문수신앙 등과 함께 ‘화엄경’을 도입한 것으로 이해되어 오고 있으나, 이시이 코세이(石井公成)가 ‘화엄사상의 연구’(2020)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삼국유사’ 자장정률조의 내용 가운데 자장의 중국 오대산 순례나 신라에서의 오대산 신앙의 기원, 그리고 원령사의 낙성식에서의 ‘화엄경’ 강의와 52명의 여인 출현의 이적 등의 설화는 신중하게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런데 선덕여왕 16년(647) 1월 상대등 비담(毘曇)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세력의 반란 진압을 계기로 하여 정권을 장악한 김춘추가 그다음 해 연말 당에 사신으로 갔다가 가져온 현장의 신역경전과 함께 전해져온 당 불교계의 소식은 32세의 원효뿐만 아니라 24세의 의상에게도 상당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앞서 선덕여왕 14년(645)에 19년간의 인도 구법여행을 마치고 장안에 돌아온 현장이 당 태종의 지원을 받으면서 새로 가져온 경전들을 번역해 내자, 당 불교계는 구역불교와 신역불교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게 되었으며, 특히 구역불교의 중관학과 신역불교의 유식학 사이에 이른바 공(空)·유(有) 논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런데 현장의 역장에는 신방(神昉) 등의 신라 승려들이 참여하고 있었으며, 원측도 일찍이 당에 가서 현장 문하의 유식학자로서 활약하고 있었다. 이러한 당의 불교계 소식을 접한 의상은 원효와 함께 당에의 유학을 결행하게 되었다. ‘송고승전’ 의상전에서, “약관의 나이가 되었을 때 당에서 교종이 번성하다는 소문을 듣고 원효법사와 뜻을 같이 하여 서쪽으로 떠났다”고 하였으며, 같은 책 원효전에서, “일찍이 의상법사와 함께 당에 들어가서 현장삼장과 자은의 문하에 들 것을 생각하였는데, 인연이 어그러져 마음을 그치고 돌아갔다”고 서술한 내용이 그러한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진덕여왕 4년(650) 의상은 원효와 함께 신유식을 배우려는 생각으로 육로로 당으로의 유학의 길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도중에 고구려군에 붙들여 첩자로 오해받아 고생 끝에 되돌아오고 말았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보덕을 만나서 ‘열반경’과 ‘방등경’을 배울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해에 보덕은 고구려의 집권자인 연개소문이 도교를 숭상하는 정책에 반발하여 백제로 망명하여 완산의 고대산에 옮겨갔다고 하는데, 의상 등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더 이상 전해지는 사실이 없다. 의상은 문무왕 원년(661) 다시 당에의 유학길에 나서게 되는데, 그의 나이 37세 때였다. 1차의 입당 시도 실패 이후 11만에 1차 때의 육로와는 달리 해로를 통하여 건너가는데 성공하였다. 그 전년에 백제를 멸망시킴으로써 당으로의 바닷길이 확 열렸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2차 입당이 성공하기까지의 11년 동안 의상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사실이 전혀 없다. 의상과 달리 원효는 이 기간에 현존하는 ‘대승기신론별기’ 저술을 통해서 당에서 전해온 ‘유가사지론’을 비롯한 신역경전의 철저한 이해를 추구하면서 ‘대승기신론’을 통해 중관학과 유식학의 공(空)·유(有) 대립을 극복할 수 있는 사상을 계발하였고, 2차의 당 유학길에 나섰다가 토굴 속에서 만법유식(萬法唯識)의 도리를 깨닫고 중도에서 되돌아왔다고 한다, 그런데 이 기간에 의상도 도반인 원효와 함께 구역경전만이 아니고 신역경전까지 공부하였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리고 2차의 유학길에서도 원효와 동반하였는지에 관해서도 오늘날 학자들에 사이에 이견을 보이고 있다. 또한 661년 의상은 당에 도착한 다음 해에 장안(長安) 남쪽 교외의 종남산(終南山)을 찾아 지엄(智儼)의 문하로 들어가서 화엄을 수업하였다고 전하는데, 그 동기와 과정에 대한 사실도 알려진 것이 없다. 당시 장안 불교계에서는 현장이 현경 4년(659) 10월 장안 교외의 옥화사(玉華寺)로 옮겨 가서 법상종의 소의경전이 되는 ‘성유식론’ 10권의 번역을 마치었고, 이어 다음 해 1월에는 ‘대반야경’ 600권의 번역에 착수하여 용삭 3년(663) 10월에 마쳤는데, 현장의 최후 번역 경전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해(664) 2월에 입적하여 국장(國葬)에 준하는 성대한 장례를 치렀다고 하는데, 의상은 그러한 장안의 불교계에 초연하여 곧바로 종남산으로 직행하여 화엄만을 전수하게 된 동기는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현장의 문하에는 여러 명의 신라승들이 참여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원측은 이미 장안의 서명사에 주석하여 유식학자로서 일가를 이루고 있었던 데 반하여 지엄의 명성은 아직 크게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668호 / 2023년 2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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