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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언어의 천재, 석가모니

다국어 일시에 구사하는 천재적 언어 능력 강조

대승경전 곳곳에는 신비한 일음을 구사하는 부처님 등장
가장 완벽한 분 음성은 공간 제약을 받지 않는다고 여겨
어쩌면 불보살들 눈에는 중생들이 ‘이수르’처럼 보일 듯

옛 불교주석가들에 따르면 ‘최초로 법의 바퀴를 굴렸다’는 것은 세존의 음성이 교진여의 몸 안으로 흘러 들어가 성도(聖道)를 일으킨 것을 말한다. 사진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초전법륜상’.
옛 불교주석가들에 따르면 ‘최초로 법의 바퀴를 굴렸다’는 것은 세존의 음성이 교진여의 몸 안으로 흘러 들어가 성도(聖道)를 일으킨 것을 말한다. 사진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초전법륜상’.

나는 이전의 글에서 ‘집착을 부르는 가짜 말[言]’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그러고 나니 뭔가 중요한 것을 빠뜨린 느낌이 든다. 우리는 기껏해야 깊은 한숨이나 신음 혹은 고함 등과 같은 원초적인 소리 말고는 자신과 세계를 있는 그대로 나타내는 고유한 목소리를 갖고 있지 않다. 그렇긴 해도 불교도라면 오직 부처님만은 예외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할 것이다. 사실 석가모니라는 한 사람의 음성에 의해 일으켜진 반향이 2000여년 넘게 이어진다는 것은 그 자체로 불가사의하지 않은가. 그래서 저 거룩한 음성의 영감 속에서 평생을 사는 사람도 생겨난다. 내가 아는 한, 원측 스님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의 ‘해심밀경소’ 현담(玄談: 경문 해석에 앞서 경의 제명과 대의 등을 밝힌 곳)이 부처님의 음성 언어에 관한 길고 긴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한 번쯤 그의 호기심과 열정을 따라가며 부처님의 음성에 대해 사색해보면 좋을 것 같다.

이후의 모든 이야기는 한 역사적 사건에서 비롯되므로 그것을 짧게 소개하겠다. 나는 ‘해심밀경소’의 ‘무자성상품’을 번역하다가 초전법륜(初轉法輪)의 일화를 접하고 새삼 감동한 적이 있다. 내 기억 속에서 그 일화는 이런 것이다. 석가모니 세존은 깨달음을 이룬 후, 처음에는 설법하길 주저하였다. 사람들이 과연 자기의 가르침을 알아들을까, 또 누구에게 먼저 설해주어야 할까 하는 문제로 망설였다. 그러다 예전에 함께 고행하다 자신에게 실망하고 떠나버렸던 교진여 등의 다섯 비구를 떠올리고, 그들이 머무는 바라니사(婆羅泥斯)로 갔다. 그리고 선인(仙人)과 사슴의 전설이 깃든 어떤 숲속에서 새로운 밤낮의 시작을 알리는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다. 세존은 다섯 비구의 근기를 생각하면서 사제의 법문을 설해준다. 고·집·멸·도의 상(相)을 세 번에 걸쳐 두루 설해준 후, 세존은 먼저 교진여에게 물어보았다. “법을 이해했는가.” 교진여가 대답하였다. “이해했습니다.” 이 대답으로 인해 최초로 법의 바퀴가 구르기 시작한다. 그때 지신과 천신들이 세존의 벅찬 감격을 알아차리고 “세존께서 법의 바퀴를 굴리셨다”라고 제창하였고, 서로 사방에 그 소식을 알려주어 범천까지 이르렀다. 옛 주석가들에 따르면, ‘최초로 법의 바퀴를 굴렸다’는 것은 바로 세존의 음성이 교진여의 몸 안으로 흘러 들어가 그 몸에서 성도(聖道: 見道)를 일으킨 것을 말한다.

이쯤에서 다시 원측의 현담으로 돌아가 보겠다. 그가 이곳에서 깊이 사색했던 것은 이런 것이다. ‘석가모니의 입으로부터 흘러나와 교진여의 몸에 들어가 최초로 성도를 일으켰고, 다시 누군가의 몸에서 몸으로 옮겨가며 성도를 일으키고 있는 그 음성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해 미륵의 후예뿐만 아니라 모든 불교도가 비슷한 대답을 할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도 말[言]인 한에서는 똑같은 무상한 소리[聲]다. 그 무상한 말소리로 모든 집착을 떠나게 하는 것은 마치 ‘조용히 해’라는 말로 시끄러운 말을 그치게 하는 것과 같다.” 이런 멋진 태도를 기본으로 장착하기 때문에 불교도들은 결코 광신도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단, 미륵의 후예들의 장점이자 불행의 씨앗이기도 한 것은, 지나칠 정도로 상세하게 음성 언어의 특징을 분석한다는 것이다. 그 취지는 이렇다. 범부들의 시끌벅적한 수다와 마찬가지로, 석가모니의 말씀도 그 말의 최소 단위인 음소[文], 그 음소들이 모인 이름[名], 그리고 그 이름들이 모인 문구[句]에 의지해서 어떤 의미를 전달한다. 이것을 흔히 여래의 명·구·문이라 하며, 교진여의 몸 안으로 들어가 성도를 일으킨 것의 정체는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심 깊은 불교도들이 그런 분석에 만족할 리가 없다. 석가모니는 가르침의 진리를 남에게서 전해 받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면에서 깨달은 분이니, 그의 말씀도 남다른 고유한 능력에서 비롯된다고 상상해볼 수 있지 않겠는가. 원측의 안내에 따르면, 그것은 ‘일음(一音)’에 대한 사유에서 잘 드러난다. 그 스님이 마치 희귀한 우표를 수집하듯 옛 문헌들로부터 희한한 이야기를 많이 찾아놓았기 때문에 나는 별다른 노력 없이 그것을 알게 되었다.

‘대비바사론’의 어떤 대아라한은 석가모니의 음성에 대한 경외심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였다. ‘일음으로 설한다’는 것은 다국어를 일시에 구사하는 석가모니의 천재적 언어 능력을 강조한 것이다. 가령 한국어를 하고 다음에 중국어를 하며 다음에 일본어를 하는 식으로 아주 재빨리 발음을 바꿔가며 3개 국어를 회전시키기 때문에, 마치 불통을 빠르게 돌리면 둥근 바퀴 모양[旋火輪]이 보이는 것처럼, 모두 하나의 언어라고 여긴다. 그런데 수많은 국가의 지방 사투리까지 고려할 때 부처님이 이처럼 혹사당하는 언어 능력자라는 생각은 유지되기 힘들다. 그 대신, 대승 경전 곳곳에는 아주 여유롭게 훨씬 더 신비한 일음을 구사하는 부처님이 등장한다. 그 문헌의 편찬자들은 마치 하나의 방안에서 울리는 음악 소리가 상하좌우의 어디서든 똑같은 크기로 들리는 것처럼, 가장 완전한 분의 음성은 공간적 제약을 전혀 받지 않는다고 생각한 듯하다. 가령 ‘밀적경’에는 ‘목련 존자가 신통으로 이곳으로부터 96항하사 세계를 지난 곳까지 가서 부처님의 음성이 잘 들리는지 확인해보니 진짜로 똑같이 들렸다’고 하는 증언까지 덧붙이고 있다. 그러니까 부처님은 하나의 원음(圓音)으로 모든 중생을 교화하지만, 중생들은 그 원음에 담긴 무수한 의미들을 제각기 이해하느라고 바빠진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마지막으로 나의 기이한 상상을 덧붙여보겠다. 내가 예전에 읽은 소설 속 주인공은 ‘원숭이들은 사람들이 일을 시킬까 봐 사람 말을 하지 않는다’는 자바 원주민들의 속설을 믿고, 광기에 가까운 열정으로 ‘이수르’라는 원숭이에게 말을 가르쳤다. 그 결과, 시달리던 이수르는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래도 마지막 순간에 사람 말 비슷한 소리를 내기는 하였다(레오폴드 루고네스 ‘소금기둥’). 나는 어쩌면 불보살들의 눈에는 우리 중생들이 마치 이수르처럼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 중에도 자기 종(種)의 오랜 전통 속에 고집스럽게 머물면서 무슨 이유에선지 끝내 부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가 있다. 그것을 일천제라 한다. 그런데 열반에 들지 않고 그들을 영원히 따라다니며 교화하기로 작정한 보살천제(菩薩闡提)도 등장했으니(‘능가경’), 우리 모두 언젠가는 누군가의 기침 소리나 하품 소리, 혹은 찡그린 눈썹이나 말 없는 침묵 등으로 인해 깨치는 날이 올 수도 있다. 그리고 중생이 모두 성불하는 그날이 되면, 보살천제는 최후의 일천제보다 적어도 두 찰나의 역사를 더 살아갈 것이다. 그에게는 ‘모두가 성불하였다’고 자각하는 한 찰나, 그리고 그 자각이 소멸하는 한 찰나가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백진순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dharmapala@hanmail.net

[1677호 / 2023년 4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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