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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담사 유나 영진 스님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원력으로 정진‧회향하는 게 대승 이상향

경전‧법문을 마음 밝히는 나침반 삼아 중도 정견 갖추고
‘내가 본래 부처’란 믿음 갖고 간절한 마음으로 공부하길
대신심‧대의단‧대분심이 간화선에서 가장 중요한 세 요소

영진 스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존재의 이유가 있음에도 우리는 분별하고 있다”며 다양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당부했다.
영진 스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존재의 이유가 있음에도 우리는 분별하고 있다”며 다양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당부했다.

 

오늘은 ‘선 수행은 어떻게 해야 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서산대사는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고, 율은 부처님의 행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은 다 부처님에게서 나온 것이니, 선‧교‧율 이 셋이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셋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선이라고 해서 교 밖에 따로 교리와 어긋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때에 따라서 방편으로 언어와 문자를 부정하기도 하는 것뿐입니다. 여기서 그 부정이라는 것은 언어와 문자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도를 통하면 죽음을 초월할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도를 통한다는 것은, 안 죽기 위해 도를 통한다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자유로워지고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유로워지고 집착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생야일편부운기(生也一片浮雲起) 사야일편부운멸(死也一片浮雲滅), 생은 한 조각 구름이 모여 있는 것과 같고, 죽음은 그 보여지는 구름이 다시 흩어지는 것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생사를 뜬구름에 비유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그 뜬구름은 실체가 있는 것인가? 그래서 이어지는 말에서 그것을 부정합니다. ‘부운자체본무실(浮雲自體本無實), 뜬 구름도 본래 실다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만들어질까요. 물이 열기를 받아 위로 올라가서 떠 있는 것이 구름입니다. 그것이 땅으로 내리면 비고, 고여 있으면 물이고, 얼면 얼음입니다. 또 이슬, 우박, 눈으로 조건에 따라 그 모양이 바뀌지만 그 본질은 하나입니다. 기후와 시간에 따라서 고체, 액체, 기체로 변할 뿐입니다. 

‘생사(生死)’ 역시 그런 관점으로 봐야 합니다. 뜬구름 자체도 본래 뜬구름으로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사거래역여연(生死去來亦如然), 오고 가는 것 나고 죽는 것도 또한 그와 같다’입니다. 그러나 ‘독유일물상독로(獨有一物常獨露)’라고 해서 생사를 따르지 않는 딱 한 물건이 있습니다. ‘담연불수어생사(澹然不隨於生死)’, 나고 죽음을 따라가지 않는 이 한 물건은 무엇일까요? 이것을 알아야 하고, 그래서 선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은 어떻게 들어가야 할까요? 많은 분들이 수행이 잘 되다가 되지 않다가 하기를 반복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진짜 발심이 안됐기 때문입니다. 본인은 발심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제대로 발심이 안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발심이 제대로 되려면 세상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먼저 자각해야 합니다. 이 무상심이야말로 발심의 절대적인 요소입니다. 10년, 20년 후가 아니라 오늘 저녁에 자다가 죽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니 오늘을 그냥 밋밋하게 보낼 일이 아닌 겁니다. 세상에서 제일 억울한 일은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고 살다가 가는 것입니다. 때문에 생사를 따르지 않는 이 주인공을 제대로 참구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자각하고 무상심이 나올 때 비로소 제대로 발심이 됩니다. 그렇게 발심이 되면 중도 정견을 갖춰야 하고, 중도 정견을 갖추고 나서 정진해야 맞습니다. 여기서 중도 정견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중도’를 말합니다.

‘범망경’에 “중생이 8만4천이니, 부처도 8만4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선에서는 중생이 곧 부처라고 합니다. 그러니 중생 숫자만큼 부처가 있는 것입니다. 중생이 부처이고, 생사가 열반이고, 번뇌가 보리이고 깨달음이니 둘로 나누지 않아야 합니다. 둘로 나누는 것은 중도가 아닙니다. 한 모습으로 보는 것이 중도입니다. 

그렇다면 적극적으로 말하는 중도는 무엇일까.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존재의 이유가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분별할 뿐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아름답다 아름답지 않다, 크다 작다 하는 식으로 분별합니다. 제가 사는 설악산을 보면서 많은 분들이 참 아름답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아름답다는 기준이 뭘까요. 아파트처럼 나무 크기가 같고 바위가 똑같은 모양이라면 아름답다고 할까요. 다양하게 있는 그대로가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는 자연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다양함을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일상의 삶에서는 자기 생각대로 받아들이려고만 합니다. 

그래서 중도 정견으로 바라보는 안목으로 바꿔야 합니다. 그래야 정진도 됩니다. 경전을 보고 법문을 듣는 것은 자기 마음을 밝히라고 하는 지침이고 나침반일 뿐입니다. 중도 정견을 갖춰서 자기 것이 되어야 합니다. 물맛을 아무리 설명해도 직접 맛을 봐야 제대로 알게 됩니다. 그 전에는 그저 유추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선은 유추하면 안 됩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기 것으로 하는 작업이 수행입니다. 그 과정이 염불, 간경, 선행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오늘은 참선을 통해서 가는 길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발심하고 무상심을 내어 수행하면서 선지식을 찾습니다. 옛날 중국 당나라 때 조주선사를 찾는 학인들이 많았습니다. 중국이라는 나라가 넓디넓으니까 찾아가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갈 때의 마음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신심입니다. 선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러한 신심이 있어야 합니다. 신심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첫째는 자기가 본래 부처라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대신심(大信心)입니다. 부처님은 깨닫고 나서 “일체 중생에게 여래의 원만 덕성이 본래 갖춰져 있다”고 했습니다. 또 선사들의 이야기 중에 봄날에 봄을 찾아 하루 종일 헤매다가 집에 가니, 거기가 봄이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안에 있는 봄을 밖에 나가 찾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본래 부처’라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믿지를 않습니다. 여러분이 부처이고 주인공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을 믿지 않으면 참선을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내가 본래 부처’라는 확신을 가졌다고 해도, ‘내가 부처’임을 확인하지 못했으니 이제 그 확인을 위해 선지식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조주선사를 찾아간 학인들 중에 그런 믿음을 갖고 찾아가서는 ‘개에게 불성이 있느냐’고 물은 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주선사가 “없다”고 했습니다. 예상과 다른 답을 들은 학인이 다시 “부처님은 ‘열반경’에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고 했는데 왜 스님은 없다고 합니까”하고 따져 묻습니다. 조주선사가 첫 물음에서 “없다”고 했을 때 깨달았어야 했는데, 깨치지 못하고 나니 그 순간 신심이 의심으로 변하고 만 것입니다. 

그렇게 신심이 의심으로 변하는 것과 달리 스스로 ‘어째서’라는 의심을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째서라는 의문을 반복해서 갖다보면 익숙해지고 그러한 의문이 자리를 잡게 되면 그것을 ‘의정(疑情)’이라고 합니다. 이 의심이 가슴에 와 닿아 감정화 되면 떨치기가 어렵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시도 때도 없이 생각나는 것처럼, 생각하려고 해서 생각나는 것이 아니라 익숙해져서 생각나게 됩니다. 화두를 그렇게 참구해야 합니다. 어째서 ‘무’라 했는가 라는 물음을 계속 일으켜서 익숙해지면 시도 때도 없이 그 물음이 일어나고 그것을 ‘대의정(大疑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멈추면 안 됩니다. 대의정까지 이루고 감정화 됐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공부의 관건은 끈기와 꾸준함입니다. 그렇게 꾸준히 하다보면 대의정을 넘어서 대의단(大疑團)이 됩니다. 대의단은 완전하게 화두와 자기가 혼연일체가 된 것을 말합니다. “화두가 잘 들린다”고 하는 게 바로 이런 상황인 것입니다. 이 상태에 이르러서도 그치지 말아야 합니다. 화두를 드는 게 목적이 아니라 화두를 타파하는 게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유추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고 화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의심, 의정, 의단으로 몰고 가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대의심 덩어리인 대의단만 딱 드러나는 것을 의단독로(疑團獨露)라고 합니다. 이 경지만 되면 후퇴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절대 중간에 포기하거나 화두를 바꾸지 말고 하십시오.

그리고 화두는 좌선만으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좌선이 되면 그 후에는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 간에 한결같이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절대로 급한 마음을 내지 않아야 합니다. 깨달음을 기다리는 마음도 다 놓고 화두 하나만 오롯이 가지고 있으면 됩니다. 그리고 대의단을 드러내 정진하는데도 안 되면 분심을 일으켜야 합니다. 밖으로 남을 향한 분심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분심입니다. 옛 조사들도 잠이 오면 송곳으로 허벅지를 찌르기도 하고, 울어보기도 하면서 분심을 냈습니다.

지금까지 간화선에서 가장 중요한 대신심, 대의단, 대분심 이 세 가지 요소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간절해야 합니다. 차일피일 미루지 말고 수시로 드는 나태한 마음을 다잡아야 합니다. 간절함이 공부하는데 가장 큰 힘입니다. 그 다음에는 회향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나의 전 과정, 깨침의 과정까지 중생에게 회향하겠다는 원력을 가져야 합니다. ‘상구보리 하화중생’ 하겠다는 원력을 갖고 정진하고, 널리 이웃들에게 나의 깨달음을 회향하는 것이 대승보살의 이상향인 보살입니다. 

여기 서울 상도동 보문사가 부처를 뽑는 선불장이니 여러분 모두가 자신이 본래부처임을 확인하시는 원력을 세워 정진하고, 그 과정을 면밀히 거쳐 널리 중생에게 회향하는 참다운 대승 보살이 되시기를 발원합니다. 

정리=윤지홍 지사장 fung101@beopbo.com 

이 법문은 4월16일 서울 상도동 보문사에서 봉행된 ‘보문사 간화선 4인 대법회’ 세 번째 법문에서 백담사 유나 영진 스님이 설한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1678호 / 2023년 4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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