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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도시의 종교] 3. 남방불교와 도시

기자명 법보

‘개인해탈’ 중시 남방도 전법·봉사 실천 위해 도심에 사찰 건립

삼장 문자로 기록하며 교학 중요성 강조…전법·봉사가 의무로 발전
‘소승’ 이미지와 달리 남방 불교국가 수도 대부분이 불교유적인 이유
한국불교는 선종·풍수설·숭유억불 영향으로 은둔·산중 이미지 확산

남방불교의 중심지로 손꼽히는 스리랑카의 대표적 불교성지인 캔디의 불치사. 도시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캔디왕조의 궁궐 안에 불치사가 있어 늘 시민들로 붐빈다. 

지금은 도심 포교당이나 시민 선원이란 이름으로 한국의 도시에도 절이 하나둘 들어서고 있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절은 심산유곡에 있다. 처음부터 이렇게 한국불교와 도시가 소원한 관계였던 것일까? 그건 아니다. 신라 시대에는 황룡사가 수도인 경주 한복판에 위치하였을 정도로 불교와 도시는 밀접한 관계였다. 하지만 이후 선종의 도래, 풍수도참설(風水圖讖說)의 유포, 조선왕조의 숭유억불정책 등의 이유로 절은 도시와 멀어졌다. 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불교가 사회와 물리적·정신적으로 단절된 은둔의 종교, 반사회적 종교, 염세주의적 종교라는 인상을 심어 주는데 일조했고, 머릿속에서 불교와 도시와의 연관성을 선뜻 상상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니 한국인들이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등 남방불교 국가의 도시 곳곳에서 절을 발견하고 놀라는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남방불교는 오직 개인의 해탈만을 추구하는 소승(小乘)’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면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관점에 따른다면, 남방불교의 절은 모두 인적이 드문 산속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와 정반대이다. 스리랑카의 경우를 한번 보자. 수도 콜롬보에는 강가라마야(Gangaramaya)를 비롯한 많은 절들이 산재해 있고, 제2의 도시이자 옛 수도인 캔디에는 붓다의 치아 사리를 모신 불치사(佛齒寺, Sri Dalada Maligawa)를 비롯한 많은 절들이 있다. 지방의 중소도시도 사정은 같다. 어느 도시를 가나 절은 마치 한국의 주민센터처럼 시민들의 곁에 있다. 이렇다 보니 승려들이 지역사회와 상시 소통하면서 전법 등의 사회적 역할을 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제 여기서 드러나는 의문은 “왜 남방불교의 절은 한국의 절과 달리 대부분 도시에 있을까?”라는 것이다. 필자는 이번 기회에 이러한 의문에 답하면서 남방불교와 도시와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빨리 율장은 승려들의 청빈과 금욕 생활을 장려하는 생활 원칙으로 사의(四依, cattāro nissayā)를 제시하고 있다. 사의란 걸식(乞食, piṇ ḍiyālopa-bhojana), 분소의(糞掃衣, paṃsukūla-cīvara), 수하좌(樹下坐, rukkhamūla-sanāsana), 진기약(陳棄藥, pūtimutta-bhesajja)이다. 이 가운데 걸식은 승려가 매일 집집마다 탁발을 다니며 얻는 음식으로만 생활하도록 하는 규정이다. 그날 받은 음식은 정오 전에 먹어야만 하며, 다음 날을 위해 남겨두어서도 안 된다. 사람들로부터 받은 것이 아닌 것 중에 입에 넣을 수 있는 것은 물과 칫솔뿐이다. 이처럼 걸식은 승려의 자급과 자취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규정이다. 때로 승려는 신도의 초대를 받아 신도의 집에서 특별히 준비해 준 식사를 들기도 하지만, 이 또한 신도가 조리한 것을 받아먹는 것이기 때문에 걸식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절은 도시와 멀리 떨어져서는 안 되었다. 특히 전근대 시대에는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하였다. 반면에 한국을 위시한 동아시아에서는 일찍부터 절에 자급자족의 경제체계가 자리 잡았기 때문에 절이 반드시 도시에 없더라도 승려가 생활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아무튼 이 걸식의 규정 때문에 붓다 시대부터 절은 도시에 세워졌고 교단도 도시를 기반으로 성장해갔다. 이는 초기 승려들의 생활이 유행(遊行)에서 정주(定住)로 옮겨간 것과도 관련이 있다. 

또 한 가지 생각해볼 수 있는 원인은 남방불교 교단과 왕실 간의 밀접한 관계이다. 고대 인도에서 슈라마나(śramaṇa) 운동의 한 축이었던 불교는 신흥 계층인 왕족과 상인의 전폭적인 후원하에 성장할 수 있었다. 왕족과 상인의 활동 무대는 도시였기에 이들이 교단에 희사한 절도 도시에 있게 되었다. 마가다(Magadha)의 수도 라자가하(Rājagaha)에 왕족인 빔비사라(Bimbisāra)가 세운 죽림정사(竹林精舍, Veḷuvana)와 상인인 아나타삔디까(Anāthapiṇḍika)가 꼬살라(Kosala)의 수도 사왓티(舍衛城, Sāvatthi)에 세운 기원정사(祇園精舍, Jetavana)가 대표적인 예이다. 마우리아 제국의 수도인 빠딸리뿌뜨라(Pāṭaliputra)에도 아쇼까 왕(Aśoka)이 세운 아쇼까라마(Aśokārāma)라는 큰 절이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남방불교로 이어졌다. 기원전 3세기 아쇼까 왕의 아들로서 스리랑카에 포교단을 이끌고 온 마힌다(Mahinda) 스님은 국왕 데와남삐야띳사(Devānaṃpiyatissa)를 교화하고서 왕실 정원인 마하메가와나(Mahāmegha-vana)를 기증받았다. 이어 마힌다는 도시 주변을 경계로 결계(結界, sīmā)를 설정함으로써 스리랑카에 공식적으로 불교 교단이 성립되었다. 그런데 데와남삐야띳사는 마힌다 스님에게 도시를 결계에 포함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이 요청은 왕을 비롯하여 대신들과 국민 모두가 불교의 범위 안에서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왕의 요청은 받아들여졌고 이때부터 절과 도시는 하나가 되었다. 지금도 고도(古都)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에 가면 승원 유적들이 도시 구역 안에 산재해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이후 수도가 되었던 폴론나루와(Polonnaruwa)와 캔디(Kandy)도 그러하다. 미얀마와 태국, 라오스 등의 다른 남방불교 국가들도 예외가 아니다. 미얀마의 바간(Bagan), 태국의 수코타이(Sukhothai), 치앙마이(Chiang Mai), 아유타야(Ayutthaya), 라오스의 루앙프라방(Luang Prabang)은 장엄한 사원 군(群)으로 유명한 곳인데, 모두 역대 봉건 왕조들의 수도였다. 

남방불교 승려들의 두 가지 의무와 그에 따른 절의 위치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기원전 1세기에 승려들은 후대에 승려들의 기억력이 감퇴하여 암송으로 전승되던 빨리 삼장이 소실될  것을 우려해 스리랑카 중부 마탈레(Matale)의 알루비하라(Alu-vihāra)에 모여 암송하고 있던 빨리 삼장을 문자로 기록했다. 바로 이때 “불교의 근본은 교학인가 아니면 실천인가?”라는 문제를 놓고서 분소의 수행자(paṃsukūlika)와 법사(dhamma-kathika)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 분소의 수행자는 실천(paṭipatti)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했고, 법사는 교학(pariyatti)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결국 법사의 주장이 받아들여졌고, 그 뒤로 남방불교에서는 교학의 의무(gantha-dhura)와 수행의 의무(vipassanā-dhura)라는 두 가지 의무가 구별되기 시작했다. 

교학의 의무는 교학의 탐구뿐만 아니라 전법, 교육, 사회봉사도 포함된다. 불교의 근본이 교학이라는 것이 남방불교의 공식 입장이었기 때문에 승려들은 교학의 의무를 최우선으로 삼았다. 이는 대다수 절이 산이나 숲속이 아닌 도시에 자리하게 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 왜냐하면 교학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도서관, 강당, 식당 등의 인프라가 갖춰지고 지리적 접근성이 좋은 도시의 절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절은 도시에 집중되었고, 승려들 사이에는 도시 승려(gama-vāsin)와 숲속 승려(arañña-vāsin)라는 구분이 생겨났다. 

그러나 남방불교의 승려는 두 가지 의무를 골고루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두 가지 의무가 상호 배타적이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 도시 승려와 숲속 승려도 마찬가지다. 남방불교의 백과사전적 주석서인 ‘위숫디막가(Visuddhimagga)’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아누라다푸라에서 함께 출가한 두 명의 도반이 있었다. 한 명은 산중의 절로 가서 숲속 승려가 되었고, 다른 한 명은 아누라다푸라에 남아 도시 승려가 되었다. 10년이 지나 숲속 승려는 도시 승려를 방문하여 자신이 머무는 산중의 절로 그를 초청하였다. 아누라다푸라의 동문을 나오면서 숲속 승려는 도시 승려에게 오랜 기간을 산 도시 절에 여분의 소유물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도시 승려는 아무것도 없다고 답변하였다. 그러자 숲속 승려는 자신이 도시 절에 하루밖에 머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온갖 잡동사니를 그곳에 남겨두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숲속 승려는 도시 승려에게 “존자여, 당신과 같은 분에게는 모든 곳이 숲속 거처 아닌 곳이 없습니다.”라고 선언한다. 이 이야기는 진정한 한거(閑居, viveka/paviveka)와 출리(出離, nekkhamma)란 정신에 있지 글자에 있지 않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끝으로 남방불교 부흥 운동과 도시의 관계에 대해 몇 마디 하고자 한다. 16세기 후반부터 스리랑카는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의 침탈을 받다가, 결국 1815년에 영국의 완전한 식민지로 전락한다. 오랜 세월 왕실의 보호 아래 번영을 구가해온 불교는 식민지 당국의 편파적 종교정책과 기독교의 파상적 선교로 커다란 위기를 맞는다. 

하지만 19세기 후반부터 콜롬보를 중심으로 서구식 교육을 받고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도시 중산층이 형성되었고, 이들 사이에서 불교 개혁운동이 일어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그 분기점은 1873년에 스리랑카 남서부 해안 도시 파나두라(Panadura)에서 벌어졌던 모홋티왓테 구나난다(Mohoṭṭiwattē Guṇānanda) 스님과 기독교 목사들 간의 공개 토론이었다. 이 토론에서 스님은 목사들의 질문 하나하나에 논리 정연하게 대답하면서 목사들이 주장하는 불교 교리의 오류가 빨리 원전의 해독 능력 부족이라는 점을 정확히 지적했으며, 성경의 내용을 설득력 있게 반박하였다. 결국 파나두라 논쟁은 실질적인 불교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Anāgārika Dharmapāla)와 같은 도시 중산층은 자신들의 전통 종교인 불교를 재인식하고, 불교를 현대적인 노선에 맞추어 부흥시키고자 하였다.
 

김한상 
김한상 

이러한 부흥 운동은 도시 중산층의 큰 호응을 얻었고, 이후 도시를 벗어나 농촌으로 확산되었다. 붓다가 설법을 시작했을 때 상인을 위시한 도시 중산층의 열렬한 지지와 후원을 받았던 현상이 반복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도시는 남방불교의 역사에서 성장과 부흥의 무대가 되어왔다.

김한상 동국대 불교학술원 전임연구원

[1682호 / 2023년 5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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