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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 지키지 못한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 넉넉히 품어주신 부처님

기자명 법보

[신행수기 당선작] 중앙신도회장상 - 이희숙

4명의 자식 홀로 키운 어머니의 부처님 전 간절한 기도 모습이 불연시작
갑작스런 어머니의 부재 극복하려 다닌 절에서 보살행 배우며 새로운 삶
어린이법회·상담·명상지도사 봉사…합창단 활동하며 부처님 은혜 눈물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첫돌도 지나지 않았을 때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셨다. 가부장적 문화의 사회에서 젊은 나이에 4명의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야 하는 어머니에게는 가혹한 운명이었을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정이라고는 알지 못한 채, 막내다 보니 어머니의 아픔이나 힘듦도 모른 채 철없이 살았다. 생계에 바쁜 어머니도 부처님오신날이 되면 어린 나의 손을 잡고 자주 가시던 절에 데리고 갔다. 오색의 등이 만개한 봄꽃과 어우러져 그림같이 아름다웠고 어린 나는 부처님을 향해 어머니를 따라 조그마한 두 손을 모으고 절을 했다. 어머니의 절하시는 모습은 비장하리만치 절실해 보였다. 부처님과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젊은 날은 직장에 다니느라 불교 공부를 할 인연은 오지 않았다. 결혼 후 둘째 딸을 낳고 산후조리를 할 때 어머니가 오셨다. 기저귀도 개어주시고 미역국도 맛있게 끓여 주셨고 첫 아이도 딸이어서인지 ‘아들을 낳았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말씀하시고 가셨다. 그런데 다음 날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믿어지지 않았다. 아버지 없는 나에게 어머니는 유일한 삶의 의지처였다. 그런 어머니를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한 채 보낸 것이다. 죽음이 이런 것인가? 이럴 수는 없는 것이다. 몸부림치며 울었다. 어머니의 임종을 보지 못했다는 회한과 효도를 할 시간조차 없이 헤어져야 했던 죄책감으로 오랜 세월을 힘들게 보냈다. 인근 가까운 절에 새벽마다 다니기 시작했다. 법당에서 염불 소리만 나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우리 엄마는 어디로 가셨을까요?’ ‘부처님,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수없이 물었다. 부처님은 언제나 빙그레 웃고 계셨다. 

그렇게 다니기 시작한 절의 스님은 좀 다른 방법으로 포교를 하시었다. 불자들에게 수행을 기본으로 하되 봉사를 하도록 하셨다. 도반들과 함께 팀을 나누어 구치소, 교도소에 가서 어려운 사람에게 영치금도 넣어주고 케이크와 음식을 준비해서 생일을 축하해 주는 봉사를 하였다. 정신병원, 결핵병원에 가서 청소하고 반찬, 김치 등을 전달했다. 스님께서는 남을 위해 시간과 마음을 나누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보시, 수행임을 알게 해 주셨다. ‘금강경’ 묘행무주분에 다음의 구절이 있다. “보살은 마땅히 그 어디에도 머무는 바 없이 보시해야 하나니 이른바 모양에 얽매임 없이 보시해야 하며, 소리나 냄새나 맛이나 감촉이나 생각에 얽매임 없이 보시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여, 보살은 마땅히 이같이 보시하여 어떠한 상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우리는 대가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봉사하였고 부처님의 뜻을 따라 실천했다는 기쁨으로 가득했다.

큰딸이 대학을 다니며 몹시 아파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나는 죽을 것 같은 마음으로 부처님께 빌었다. 심장을 달라면 주겠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부처님께 매달렸다. ‘부디 딸 아이가 건강하게만 해 주세요. 자신을 낮추어 남을 위해 남은 시간을 보내겠습니다.’ 그동안 부처님께 기도할 때 원하는 기도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가 원인도 모르게 아플 때는 부처님 앞에서 울며 도와달라고 기도하였다. 내가 아이를 잘못 키웠는지 좀 더 사랑하지 못해서 그런 것인지 나를 자책하면서 기도하였다. 매일 아침, 저녁 온 마음으로 광명진언을 외웠다. 

부처님의 가피었을까? 시간이 지나며 아이는 몸이 회복되었고 일상생활을 할 수 있을 만큼 좋아졌다. 부처님을 향해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라고 수없이 절을 하였다. ‘보왕삼매론’의 가르침도 큰 힘이 되었다.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고 하셨느니라.” 그때부터 딸과 함께 일요일마다 어린이법회에서 봉사하기로 하고 어린이법회 지도자과정을 이수하였다. 천진불 어린이들과 놀면서 불교의 기본 교리를 다시 공부했고 어린이 법회를 어떻게 활성화할지 법회 책임자이신 선생님과 함께 고민하였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 어린이법회를 그만두게 되었을 때 정말 마음이 아팠다. 저출산 시대에 아이도 적지만 아이들의 눈높이를 맞추지 못했던 부분도 있지 않았나 후회되었다. 지금도 어린이 법회를 하는 절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어도 가난하였고 어머니가 힘들까 봐 말하지 못한 채 직장을 선택하였다. 아이들이 컸고 봉사를 하며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싶다는 발원으로 늦게나마 사회복지 공부를 하면서 상담을 알게 되었다. 직장을 다니고 가정 일을 하며 공부한다는 건 쉽지 않았다.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즐거웠다. 사람을 돕는 방법 중 마음 아픈 사람을 돕는 일이 가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론과 기술은 배우고 훈련하면 되지만 자신의 내면이 단단해야만 할 수 있는 것이 상담이었다. 겉으로 즐겁게 봉사를 해도 미해결 과제처럼 늘 마음은 외롭고 슬펐다. 

사회복지에 이어 명상지도사 과정을 공부할 때였다. 각자 어릴 때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에 나는 어머니를 만났고 지금도 어머니만 생각하면 슬프다고 했다. 명상을 지도하시던 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슬픔이라는 감정을 왜 스스로 꼭 잡고 있는지. 그냥 놓아버리면 될 텐데.” 스님의 말씀이 머리를 쳤고 오랫동안 슬픔이란 감정을 쥐고 혼자 그것을 키우고 있었음을 비로소 알았다. 그냥 놓아버리면 되는 것이었다. 

그날 이후 슬픔이라는 감정을 놓아버렸다. 슬픔과 함께 비로소 어머니를 보낼 수 있었고 자유로워졌다. 정말 마음이 편안해졌다. 감정을 바라볼 수 있는, 알아차릴 여유를 갖게 된 것이다. 상담을 공부할수록 불법이 상담과 비슷하다는 점에 놀라웠다. 명상이 부처님의 ‘대념처경’에 기본이 된다는 것도 알았다. 행복의 길, 해탈의 길을 알려주신 부처님이 경이로웠다.

35년 전 스님의 봉사단체 시절부터 인연이 된 장유정 이사장님이 11년 전 수행과 봉사하는 ‘미소원’을 사단법인으로 만들어 즐겁게 봉사하는 일을 하자고 제안하여 도반들과 함께 시작하게 되었다. 우리는 소년원 청소년들의 상담 멘토, 구치소 교육 교정위원으로 자살위기 상담, 독거노인 쪽방 사람들을 위한 밑반찬배달, 장애우, 다문화가정에 장학금 및 생활지원금을 지원하는 등 여러 가지 일을 하였다. 미소원에서 도반들과 함께 봉사할 수 있다는 것은 이번 생에 부처님 법을 만난 다음으로 나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구치소 교정위원으로 상담 봉사하는 줄 아는 사람들이 “왜 죄지은 사람들에게 가서 상담하느냐?”라고 종종 물었다. “모두가 소중한 사람이다. 어리석음 때문에 지은 죄이기에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다시 자신의 삶을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라고 말했다. 법회를 하시는 큰스님은 교도소, 구치소 법회 중에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하셨다. “여러분과 내가 다를 것이 무엇인가. 머리를 깎고 회색 옷과 회색 장삼, 자유가 없는 삶, 고무신을 신은 나나 당신들 똑같지 않은가. 이곳에서 수행한다 생각하고 부처님의 법을 공부하여 해탈의 길을 찾아가길 바란다.” 어리석음으로 고통의 밑바닥에서 가장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당신 편이 될 것이니 힘을 내라는 희망의 끈이 되는 것이다.

5년 전 큰스님과 몇 분의 스님 그리고 재가자들이 뜻을 같이하여 사람들이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취지로 ‘국민행복실천운동본부’라는 사단법인을 만드셨다. 스님은 제도권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복지의 사각지대에서 힘들어하는 미혼모들을 위해 상담을 하겠냐고 물으셨다. 나는 기꺼이 승낙했다.  이 기관은 부산 홍법사에 ‘행복드림센터’라는 이름으로 시설을 개원하여 미혼모를 위한 지원을 하고 있다. 불교계에서 이런 일을 하는 것도 처음이다. 행복드림센터를 거쳐 간 미혼모 중 지금도 열심히 아이를 키우며 한 달에 한 번 자조 모임을 통해 만나는 분들이 있다. 그들이 당당하게 아기와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우리가 받은 선물이다.

평생 나는 늘 바빴다. 불교대학을 이수하였고 좋은 법문을 듣고 있어도 자신감이 없었고, 수행을 열심히 하는 도반을 보면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내가 가진 조그마한 능력을 나와 인연 되어 만나는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모든 인연에 감사하고 부처님 만나 상담을 만나 행복해진 나를 사랑하며 ‘부처님, 오늘도 잘살아보겠습니다. 잘 살다가 가겠습니다, 지켜봐 주실거죠?’라고 기도한다. 부처님께서는 어머니 같은 미소를 띠고 언제나처럼 나를 내려다보실 것이다. 삶에서 부처님은 언제나 든든한 의지처였다. 어머니처럼.

상담소에서 퇴직하고 늦은 나이에 합창단에 들어갔다. 법문이 노래 속에 녹아 있었고 가사들이 가슴에 와 닿았기 때문이다. 합창단이 아니라도 절에 오시는 신도님께 찬불가를 하나씩 가르쳐 주어 부를 수 있도록 하면 법회가 더 재미있고 감동과 환희로움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법회 중 부처님께 꽃을 헌화하는 시간이 있었다. 합창단이 고운 목소리로 아름답게 노래를 불렀다. “꽃을 바치나이다. 꽃을 바치나이다. 님께 바칠 것은 피어지는 꽃이니라.”

순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아! 부처님께 나는 커다란 사랑을 받기만 하였구나. 크신 부처님의 법을 따라 여러 스님께서 던져주신 법문과 답을 받기만 하였구나.’ 흐르는 눈물을 닦아야 한다는 생각도 없이 마음속으로 수없이 절을 하고 절을 하였다. 
부처님 법 만난 것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1682호 / 2023년 5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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