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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은 다 거짓말’ 망상 참회하고 71세에 전법 일선서 뜁니다

기자명 법보

[신행수기 당선작] 동국대총장상 - 김정만

불자 집안서 정진…부친‧형님 죽음 외면한 부처님 원망
‘불‧보살님 존재하지 않는다’ 단언…염주는 창고에 버려
“염불하면 마음 편해지는게 가피” 친구 마지막 말에 눈물 

그림=정은주
그림=정은주

부처님께 물어보고 따질 것이 참 많다. 그래서 부처님 곁을 떠나지 못하고 이렇게 부처님 가르침에 목말라 외로울 때는 염불하고, 괴로울 때는 기도한다. 부처님은 대자대비(大慈大悲)한 마음으로 아들의 죽음에 미쳐버린 끼사고따미를 깨달음으로 이끌었고, 99명을 죽인 무자비한 살인마인 앙굴리말라도 깨달음으로 인도했다. 그런데 왜 나에게는 깨달음은커녕 간절한 기도 하나 들어주지 않는 것일까. 부처님 보시기에 나의 믿음과 수행, 그리고 기도의 크기가 너무 작은 것일까. 도대체 대자대비는 무엇이며, 중생구제의 뜻은 무엇일까.

대대로 부처님을 믿고 따르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매일 경전을 읽은 후 새벽 농사일에 나섰고, 아버지는 고향에 있는 조그만 암자의 신도회장이었다. 고등학교장이었던 작은 아버지도 제법 이름 있는 사찰의 신도회장을 맡고 있었다. 이러한 가풍으로 자연스럽게 불교종립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불교학생회에도 가입해 열심히 활동했다. 대학에 진학해서는 불교 공부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1970년 아버지는 55세 나이에 1년 동안 간암으로 투병하다 피를 토하며 돌아가셨다. 나는 울고 또 울면서 목이 터져라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을 찾았었다. 그러나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은 보이지도 나타나지도 않았다. 나는 그저 아버지의 극락왕생을 빌어야만 했다. 

한동안 부처님과 거리를 두다 3년 뒤 고향의 밀봉암에서 ‘청정(淸淨)’이란 법명을 받았다. 당시 마음이 복잡하고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스님께서 “부처님 제자가 되면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고 하시기에 다시 계를 받았다. 수계식 후에는 범어사, 통도사, 석남사, 사리암 등에서 철야정진을 하고 삼천배를 했다. “나의 1년은 1000년 절에 다닌 불자보다 깊고 단단하다”라고 자부할 만큼 신행 생활에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또 한 번 감당하기 힘든 시련이 찾아왔다. 1984년 한 살 위 형님이 35살 나이에 조카 다섯을 두고 세상을 떠났다. 형님의 손을 잡고 다시 한번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께 “살려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지만, 이번에도 대자대비는 없었다. 물론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러나 아버지는 왜 그렇게 고통스러워야 했는지, 형님은 왜 그토록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야 했는지 너무나 원통했다.

이 목숨 다 바쳐 믿고 의지했던 부처님의 위신력이라면 아버지나 형님 중 한 분이라도 천수를 누리다 평온하게 가족과 이별할 수 있도록 해주셔야 하는 게 아닌가. 왜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은 나와 가족의 간절한 바람을 연거푸 외면하는 것일까. “삐~” 하는 차가운 기계 소리와 함께 핏기 사라진 창백한 형님의 얼굴을 보며 울다가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을 원망했다. 열심히 절에 다녔고, 지극정성 기도했으며, 불교 공부도 열심히 하고, 책임과 사명감으로 봉사활동에도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아버지와 형님을 허망하게 빼앗기니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에게 완전히 무시당한 듯했다.

아버지와 형님이 떠난 집안은 적막강산이었다. 경전은 다 거짓말이고,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은 양치기 소년이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런 부처님을 믿고 따랐던 내가 한없이 미웠다. 지금까지의 쌓아온 불심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니체가 그리스도를 향해 “신은 죽었다”라고 외쳤듯, 나는 대자대비한 부처님도 중생을 구제하는 관세음보살님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내 책장에 꽂혀 있는 경전과 불교 서적, 염주 등을 상자에 넣어 창고에 던져버렸다. 

시간이 흘러 일상은 다시 옛 모습을 되찾았지만, 불교와는 완전히 멀어지고 말았다. 주중에는 열심히 일하고 주말에는 가족들과 여행과 문화생활을 즐기면서 살았다. 오직 아이들, 우리 가족만 건강하면 된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20여년을 아무 일 없는 평범한 삶을 살았다.

2004년 가을 단풍이 곱게 물든 어느 날 오후, 50년 지기 친구가 암으로 투병하다 결국 유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을 받았다. 불과 일주일 전에 병문안을 갔을 때도 친구는 열심히 염주 알을 돌리면서 염불‧기도하고 있었다. 염불‧기도를 하는 모습이 달갑지는 않았지만 위로했다. 

“늦게 불자가 되었지만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니 부처님도 아마 자네의 기도는 외면하지 않고 가피를 내려 주실 것이야!” 

친구는 빙그레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고 염불하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괴로움이 사라지는 것 같아. 편안한 마음으로 삶을 마감할 수 있게 해주시는 것만으로도 나는 부처님의 크나큰 가피라고 생각한다네. 인연 따라 왔다가 인연 따라 가는 거지. 부처님인들 어쩌시겠나.”

가슴을 찌르는 예상 밖의 말이었다.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멍한 표정으로 친구를 바라봤다.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친구는 자신의 죽음도 겸허히 받아들이는데, 나는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았다며 부처님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던가. 친구에게 속마음을 들킨 것에 대한 부끄러움의 눈물이었고, 부처님을 향한 참회의 눈물이었다. 

부처님을 통해 얻었던 ‘마음의 평화’라는 가피는 깡그리 잊어버리고 그 자리에 미움과 원망, 비난만을 채우며 살았다. 부처님을 향한 한없는 회한과 참회의 눈물이 계속 흘러 더이상 친구를 바라보고 있을 수 없었다. 황급히 집으로 돌아와 창고에 던져버린 경전과 염주를 다시 꺼내 들었다. “아!” 하는 탄식과 함께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참회의 절을 시작했다. 

‘부처님 미워한 것을 참회합니다. 부처님 원망한 것을 참회합니다. 부처님 비방했던 것을 참회합니다. 억울하고 원통한 마음 가진 것을 참회합니다. 대자대비하신 부처님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지은 죄를 죽을 때까지 참회하며 살겠습니다.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끝없이 절을 하고 절을 하면서 부처님에게 참회하다가 늦은 밤 잠자리에 들었다. 그날 밤 꿈속에서 연꽃 대좌에 앉아 계시는 황금빛 부처님을 보았다. 부처님을 외면한 20년의 세월에도 부처님은 항상 내 마음속에 함께하고 있었음을 알게 됐다. 참회의 기도를 통해 거룩하신 부처님께 다시 귀의해야 함을 깨닫게 된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께 올린 기도 덕에 아버지와 형님이 고통스러운 투병 생활을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되짚어보면 내 기도를 무조건 외면하신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나의 믿음과 수행의 근기가 부족해 가피의 기적을 알지 못한 것뿐이었다.

경전이나 불가에 전해지는 설화 중에는 부처님이나 관세음보살님의 가피 영험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하지만 실제 삶에서 기적의 가피를 만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그럼에도 절박한 순간에는 부처님께 매달리고, 수많은 불보살님께 매달리며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기적이 일어날 확률은 사실상 제로에 가까운 일이지만 그래도 비빌 언덕이 있다는 게 어디인가. 그 언덕 덕분에 아버지도 형님도 아마 극락정토에 가셨을 것이다.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이 질릴 정도로,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소리 높여 기도하고 수행할 것을 다짐했다. 

“부처님 이제 제대로 한 번 해보겠습니다. 성불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니까요. 그러다 보면 부처님께서도 ‘뭐 이런 제자가 다 있나. 내가 졌다. 졌어’라고 하시면서 내 뜻대로 해주실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 언젠가 생각지도 않은 순간에 부처님께서 저에게 이런 말씀을 건넬 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 

‘그대 불자여, 그대의 믿음과 기도와 수행은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다음 생에는 ‘청정광불’이라는 이름으로 성불하여 중생을 제도하리라.’ 

부처님의 가르침에 안겨 다시 시작하는 수행은 이전의 수행과는 달랐다. 물론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에게 듣고 싶은 말씀이 있으니 묻고 따지는 것은 여전하다. 다만 복만을 비는 기도에서 벗어나 굳은 믿음과 수행, 그리고 봉사에 매진하고 있다. 아울러 ‘행복을 달라’고만 한데서 ‘행복은 내가 만들어 간다’로 방향을 틀었다. 물론 아직도 욕심내고 화내는 일이 많지만 그래도 웃는 얼굴이 하루하루 많아져 가고 있다.

신심을 고취하는 데는 순례가 최고란 말을 듣고 국내 산사를 비롯해 세계 불교 유적지를 열심히 참배했다. 특히 티베트 수도 라싸의 조캉사원 순례 중에 큰 감명을 받았다. 오체투지를 하는 사람들, 마니차를 돌리며 사원 주위를 순례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티베트 사람들의 신심에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존경심과 환희심이 일면서 이것이 신심임을 뼛속 깊이 새겨넣었다.

2020년 71세 나이에 범어사불교대학에서 전문교육과정을 마치고, 조계종 제25기 포교사가 됐다. 현재는 범어사에 소속돼 ‘금정총림 포교사’로 포교와 봉사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의 가피가 없었다면 71세 나이에 포교사가 된다는 것이 언감생심(焉敢生心) 가능했겠는가.

일요일 아침 9시에 자랑스러운 포교사복을 입고 집을 나선다. 목적지는 부산 금정산에 있는 범어사다. 지하철을 타고 목적지까지 가려면 한 시간이 걸린다. 주말 지하철 안은 화려한 등산복을 입고 조잘대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수많은 등산객 틈에 끼어있지만 나는 행복하다. 포교사로서 부처님 법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범어사로 향하기 때문이다. 

“부처님, 이만하면 불교를 믿고 수행한 보람이 있지 않나요? 부처님, 이제부터는 절대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겠습니다.”

[1682호 / 2023년 5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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