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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병원과 의원의 기원, 불교의 병방-3

기자명 이현숙

병자 구호, 스님들이 담당하다 점차 국가로 넘어가

가난하고 병든자에 숙식과 치료제공은 중국 남북조에서 시작 
사찰에서 운영하다 국가 재정이 투입되자 스님을 관리로 임명
신라와 고려도 중국의 제도 수용, 사찰서 병자 치료 기록 남아

고묘왕후가 비전원을 설치했던 일본 나라의 흥복사.
고묘왕후가 비전원을 설치했던 일본 나라의 흥복사.

불교 사찰 내에는 아픈 승려들을 치료하던 병원 뿐 아니라 가난하고 병든 자에게 숙식과 치료를 제공하는 비전원이 있었다. 비전원은 중국 남북조 시기부터 시작되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남아있는 기록은 일본에서 가장 먼저 찾아볼 수 있다. 594년 일본 쇼토쿠(聖德) 태자가 현재 오사카 지역인 나니와에 건립한 시텐노지(四天王寺)에 승려의 숙소이자 설법 도량인 경전원(敬田院), 공중병원 성격인 요병원(療病院), 신원을 알 수 없는 자를 수용하는 비전원(悲田院), 약초를 재배하고 약을 지어주는 시설인 시약원(施藥院)으로 이루어진 4개의 원을 병설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근거 자료가 쇼토쿠 태자 사후 3백년 뒤 태자신앙이 유행하던 시기에 만들어진 ‘쇼토쿠태자전력(聖德太子傳曆)’ 이라서 전설로 취급되고 있다. 

기존 사찰에서 운영하던 비전원은 국가에서 그 재정을 공급함에 따라 점차 국가적인 제도가 되었다. 당대에 오면 비전원에 사(使)와 전지(專知)라는 하급 관리를 설치하고 승려가 이를 담당하도록 함으로써, 승려가 국가 관료의 직임을 함께 하였다. 그런데 717년 장안에 역병이 유행하여 고아 및 부랑아들이 많이 발생하였다. 이에 현종은 질병에 걸린 채 장안거리를 떠도는 이들을 수용하는 병방(病坊)을 설립하여 승려가 이를 관장하도록 하였다. 이후 735년에는전국의 사찰에서 비전원을 운영할 수 있도록 재정적 지원을 제도화하였다. 

그러나 승려가 관리가 되어 봉급을 받는 것에 대해 관료 사회에서 반발이 심하였다. 716년 송경(宋璟)은 비전(悲田)은 불교와 관련되어 이것이 승려가 관장하는 직임(職任)이 되었기에 담당관 제도에 맞지 않다고 상소하였으나 현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820년 당 무종이 폐불정책을 시행하면서 전국에 있는 사찰을 폐지하고 모든 승려들을 환속시켰을 때, 가장 큰 문제가 되었던 것이 바로 사찰에서 운영하였던 비전양병방(悲田養病坊)이었다. 전국 각지의 사찰에서 운영하던 비전양병방을 담당하던 승려들이 강제 환속을 당하자 양병방에서 지내던 병자들을 보살필 수 있는 주체가 사라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재상 이덕유(787~849)는 상소문을 통해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비전양병방이 국초부터 존재하여 관전(官錢)의 이자로 운영되었기에, 폐불 정책으로 사찰 내에 거주하던 이들이 당장 갈 곳이 없어진 상황에 대한 대처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즉 해당 지역에서 비전양병방의 실무를 담당할 관청의 녹사를 파견하고 70세 이상 명망있는 기로인을 선발하여 대신 관장하도록 하자고 주장하였다. 이에 무종은 칙명을 내리기를 “비전양병방을 담당하던 승니들이 환속하여 주관할 사람이 없으므로 잔질(殘疾)인 자에게 지급될 것이 없을까 두려우니, 장안과 낙양은 사전(寺田)을 헤아려 지급하여 구제하고, 여러 주와 부에서는 7경(頃)부터 10경까지 각각 본래 두었던 곳에서 기로인 1명을 뽑아 담당하도록 하여 죽 값에 충당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사물기원 권7,  貧子院). 즉 무종이 장안과 낙양의 경우 강제 환수하였던 사전(寺田)의 일부를 급하게 지급하고 지방은 향촌사회의 명망가들 가운데 선발하여 운영하도록 하였는데, 무종 말년에 비변고(備邊庫)를 설치하여 국가에서 재원을 지속적으로 지급할 수 있게 하였다. 무종이 즉위 7년만에 사망한 뒤 복불 운동이 일어나면서 그 운영의 주체가 다시 승려에게 돌아갔는지 확실하지 않다.  

당나라 단성식이 평생에 걸쳐 모았던 이야기 모음집이었던 ‘유양잡저’에는 무종의 폐불 시기에 사천성 성도의 서쪽 시장에 있던 양병방에 살았던 걸인 엄칠사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엄칠사는 시장에서 구걸하는 걸인으로 비루한 천민이었지만 4~5년간 구걸하였던 재물을 모두 도교의 사원에 희사하였는데, 폐불이 일어나 사찰이 모두 사라질 것을 미리 알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송나라 황휴복(黄休復)이 편찬하였던 ‘모정객화(茅亭客話)’권3에 따르면, 전촉(前蜀, 907~925)시기에 “대동(大東)의 저자 거리에 양병원(養病院)이 있었는데, 걸인과 가난하고 병든 자가 모두 거주할 수 있었다”라고 하였다. 변방지대였던 사천과 대동 지역의 사례로 보건대, 장안이나 낙양 뿐 아니라 전국 각지의 대도시의 저자 거리에 비전양병원이 실재 존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비전양병방 제도는 송대에도 이어져 각 주군에서 조관(曹官)이 운영하였다. 또한 송 초기부터 수도였던 개봉부의 동쪽과 서쪽에 복전원을 설치하여 환과고독(鰥寡孤獨) 즉 노인과 병든 자, 그리고 고아와 가난한 자들을 대상으로 돈과 곡식을 지급하였다.

영종대(1032~ 1067)에 이르러 남쪽과 북쪽에 복전원 두 곳을 더 설치하였는데, 각각 하루에 300명씩 구휼식을 지급하였다. 복전원은 승려가 사무를 관장하였는데, 정부에서 판관(判官)과 사상사신(四廂使臣) 등을 파견하여 시찰하도록 하였다. 하루 총 1200명까지 구휼식을 지급하였다는 것은 복전원이 사고무친하여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가난한 자의 병을 치료했다기 보다는 굶어 죽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음식을 제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기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 ‘부상약기(扶桑略記)’에 따르면, 723년 고묘(光明:701-760)황후가 황태자비 시절 고후쿠지(興福寺)에 시약원(施薬院)과 비전원(悲田院)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당시 일본은 동대사(東大寺)를 시작으로 70여개의 국분사(國分寺)를 설치했는데, 고묘왕후가 흥복사 경내에 시약원과 비전원을 설치하였던 것이다. 

신라의 경우, 남아있는 자료가 없으나 국가의 지원을 받는 사액사찰이 존재하였던 만큼 비전원 또는 양병원 제도가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976년 경종이 관료들에게 지급하는 전시과를 제정할 때, 불교의 연수당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연수(延壽)라는 관직에게도 봉급을 지급한 것에서 짐작할 수 있다(고려사 권78, 전시과). 목숨을 연장해주는 직임을 맡은 관리는 의료와 관련되었을 것으로, 아마도 불교에서 유래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고려시대 동서대비원은 당나라의 비전양병방 제도와 송나라의 복전원 제도를 수용한 것이다. 1036년(정종 2)에 동대비원을 수리하도록 한 것을 보건대 10세기에 이미 설치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동서대비원 가운데 서대비원은 개경의 서쪽 보국사 옆에 있었다는 것으로 보건대, 처음 서대비원이 설치되었을 때 보국사에서 운영하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동서대비원은 상설기관이 아니었으나 사(使), 부사(副使), 녹사(錄事), 기사(記事), 서자(書者) 등이 설치되어 유사시에 빈민의료를 담당하였다. 

전근대 사회에서 병자 치료에 숙식을 제공하는 경우는 주로 병자가 가난하고 돌볼 사람이 없을 때로서, 동아시아에서는 주로 불교 승려들이 담당하였다. 그러나 그 재원을 국가가 담당함으로써 점차 관료제 속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현숙 한국생태환경사연구소장 rio234@naver.com

[1684호 / 2023년 6월 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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