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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수행이론의 총망라(57)-성불 관련; 각론④

화엄경은 지루할라치면 소매 끌어

반야경 간접 증명법 보다
화엄경의 현성교가 편안
독서나 인생은 긴 여행길
스승과 제자 끌림이 중요

‘화엄경’ 구성작가는 제40권에서 ‘십정품 제27’을 시작하여 제43권 끝까지 10가지 선정을 ‘늘어지게’ 모아놓았다. 아무리 ‘화엄경’의 별명이 ‘대경(大經)’이라지만 해도 너무한다. 중국에서는 간결함[乾淨]을 좋아하고 인도에서는 늘어짐[蔓衍]을 좋아하는가?

‘대반야경’ 6백 권만 해도 그렇다. 앞에서 한 말을 또 반복하고, 그렇게 반복한 것을 받아 다시 반복하고. 필자가 처음 불경을 손에 든 때가 스무 살 초반인데, 그동안 여러 번 재도전했지만 이 경은 여태 완독하지 못했다. 서너 해가 지나면 칠순인데 엄두를 다시 낼 수 있을런지? 사실, 6백 권 중에서 제577권째에 해당하는 한 권짜리 ‘금강경’도 반복이 심하다. 다행히 세친 큰스님의 ‘27단의설(斷疑說; 스물일곱 겹의 의심 끊기 독서법)’ 덕에 논증적으로 읽을 수 있었다. 

‘대반야경’을 풀어놓은 용수의 ‘대지도론’ 1백 권은 그래도 읽을 만 했다. 촘촘한 논리가 오히려 집중하게 했다. 그래도 문체는 불편하다. 귀류법(歸謬法)의 논증 방식을 택하기 때문이다. 어떤 명제(命題)가 참임을 증명하는 대신, 그 부정 명제를 참이라고 가정하여 그것의 모순을 드러내어 본래의 명제가 참임을 보이는 간접 증명법, 그게 불편하다. 필자는 ‘파상교(破相敎)’보다 ‘현성교(顯性敎)’가 편안하고, 반야보다는 화엄에 끌린다. 

‘화엄경’ 독서는 지루해서 손에서 내려 놓을만하면 새로운 이야기가 다시 소매를 잡아당기는 듯한 느낌이 든다. 마치 스승 공자를 우러르는 제자 안연의 심정이라고나 할까? “우러러볼수록 높아만 가고, 연구할수록 단단해지며[仰之彌高, 鑽之彌堅]; 뵈오면 앞에 계시더니, 어느덧 뒤에 계신다.” 독자들은 “瞻之在前(첨지재전) 忽焉在後(홀언재후)”를 어떤 심정으로 받아들이실까? 필자에게는 이렇게 들린다. 학문[文]으로 속을 넓혀주시고 예절[禮]로 몸가짐을 단속하게 하시는 우리 선생님. 어서 오라 앞에서 손을 내미시더니, 포기하려는 마음 들자 어느 결엔가 힘내라고 등 뒤에 서 계시네.

아무래도 오늘은 ‘십정품’ 진도 나가기 어렵게 생겼다. 독서나 인생은 긴 여행길인데, 거기에는 스승 제자 간의 ‘끌림’이 중요하다. 이런저런 생각이 밀려든다. 정수 스님 봉선사 주지 시절이다. 며칠 뒤에 개최될 운허 스님 한글 번역 관련 세미나 자료집을 구성하던 중, 필자는 월운 스님께 자료집 앞에 붙일 글을 청했더니, 위에 인용한 ‘자한편(子罕篇)’ 끝에 “2013년 10월 8일 봉선사 다경실에서 海龍 謹記”라고 쓰신 쪽지를 건네주셨다. 순간 마음이 먹먹했다. 

‘해룡(海龍)’은 월운 스님의 스승, 운허 스님께서 붙여주신 법명이다. 당시 운허 스님은 부산 범어사에 계시면서, 경상남도 남해 화방사에 행자로 와 있던 21세 ‘언양 김(金)공 성구(成九)군’을 1949년 단옷날, ‘남쪽 바다의 용’이라 이름 지어 제자로 들였다. 뵙지도 못한 채 제자는 화방사에서 홀로 ‘4집(集)’과 그 절에 있던 경전을 죄 다 읽었다. 사자(師資)의 첫 상면은 1952년 음력 5월 22일 저녁이었지만, 사부님 앞에서 제자는 평생 ‘해룡’이라 여쭌다. 스승의 고마움을 담은 표현이 ‘근기(謹記)’이다. 이때의 ‘기(記)’는 ‘씁니다’가 아니고 ‘기억합니다’의 뜻이다. 

사부님 슬하에서 경을 펼친 지 7년이 되던 1959년, 법제자로 내려 받은 당호가 월운(月雲)이다. 어두운 밤하늘에는 달빛 되어 비춰주고, 태양 뜨거운 대낮에는 구름 되어 가려주라는 뜻이다. 누구를? 중생을. 

그해에 통도사에서 전강 받아 교편 잡으신 이래 평생 글을 쓰셨는데, 글 끝에, 보통은 ‘월운’이라 쓰시고, 자긍심이 좀 나실 때는 ‘월운’ 앞에 ‘백파문손(白坡門孫)’을 더하신다. 그러나 스승 운허 스님 앞에서는 항상 ‘해룡’이라시며, 때로는 ‘고부(辜負; 은혜 못다 갚은)’를 더 붙이신다. 10년 전의 저 글이 필자가 읽은 우리 스님 손수 쓰신 마지막 ‘海龍’이다. ‘화엄경’ 80권의 수많은 말씀은 손을 놓을라치면 어서 오라 기다려주시고, 다시 잡으려 들면 아득하기만 하다. 더 여쭈어야 할 게 얼마나 남았는지도 모르겠는데, 무심한 세월은 사부님의 총기를 훔치려고만 든다. 

신규탁 연세대 철학과 교수 ananda@yonsei.ac.kr

[1685호 / 2023년 6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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