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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비 온 뒤(雨餘)’

기자명 승한 스님

잘 영근 보리수 열매들을 기다리며

저자는 고려후기 뛰어난 고승
아름다운 서정 잘 드러낸 선시
‘지는 꽃잎 옷에…’ 표현 일품
심해서 ‘자성본불’ 꺼내 와야

비 온 뒤 담장 아래 새 죽순 솟아나고
뜰에 바람 지나자 지는 꽃잎 옷에 붙네.
온 종일 향로에 향 심지 꽂는 일 외엔
산 집엔 다시금 한가한 일밖엔 없네.
雨餘墻下抽新筍(우여장하추신순)
風過庭隅​襯落花(풍과정우친락화)
盡日一爐香炷外(진일일로향주외)
更無閑事到山家(갱무한사도산가)
- 원감충지(圓鑑冲止, 1226~1292)

엊그제 불기 2567(2023)년 ‘부처님오신날’이 통쾌하게 지나갔다. 그리고 그 다음엔 위 선시처럼 비가 오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절집은 다시 조용(한가)해졌다. 절집의 매력, 불교의 매력, 부처님의 가르침이 바로 이런 것 아닐까. 들떴던 마음에 “향 심지” 하나 다시 “꽂”고 ‘내 마음의 부처’[자성본불(自性本佛)]을 찾아 들어가는 일 아닐까. 그에 맞춰 전국 사암들도 일제히 불기 2567(2023)년 하안거 결제와 기도에 들어갔다. 이 기간 동안 또 수많은 수좌와 불자들이 보리수 열매 영글듯이 잘 익어 나올 것이다.

각설하고, 정말 아름다운 서정 선시다. 산중에 다리 꼬고 살면서도 어쩜 이리 감정이 풍부할까. 감수성 또한 깊을까. 물론 전형적인 ‘선경후정’(先景後情). 시에서, 앞부분에 자연 경관이나 사물에 대한 묘사를 먼저 한 뒤, 뒷부분에 자기감정이나 정서를 그려 내는 시작 기법)을 썼다. “비 온 뒤 담장 아래 새 죽순 솟아나고/ 뜰에 바람 지나자 지는 꽃잎 옷에 붙네”. 정말 기막히다. 특히 “뜰에 바람 지나자 지는 꽃잎 옷에 붙”는다는 시구는 애간장을 녹일 만큼 아름답고 섬세하다. 깊고 넓은 불심(佛心)과 선안(禪眼)·시안(詩眼)이 아니면 잡아낼 수 없는 시구다. 그 중에서도 “지는 꽃잎 옷에 붙”는다는 구절은 일품 중의 일품이다. 그러나 외부는 그것까지다.

원감충지 선사는 이내 자기 본연의 내부(자성본불)로 돌아온다. “온 종일 향로에 향 심지 꽂는 일 외엔/ 산 집엔 다시금 한가한 일밖엔 없”다고. 그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향로에 향 심지 꽂고 다시 내부로 잠수한다고. 심해로 깊이 들어가 이젠 ‘자성본불’을 꺼내 와야 한다고. (올 하안거 결제에 들어간 수좌나 불자들이 이 선시를 꼭 한 번 읽어보고 자신의 내부로 잠수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가져본다.)

‘언외지의(言外之意)’. ‘말에 나타난 뜻 이외의 숨어 있는 다른 뜻’이 들어있다는 말이다. 이 선시가 그렇다. 기표(記表, signifiant)로는 엉뚱하게 ‘담장’과 ‘새 죽순’과 ‘뜰’과 ‘바람’과 ‘꽃잎’과 ‘옷’ ‘향로’ ‘심지’ 등을 거론하며 시치미를 떼고 있지만, 기의(記意, signifié)적으론  부처님과 불교와 내 안의 자성불(自性佛)을 찾아 한없이 깊고 묵묵하게 자기 마음속의 산문(山門)을 열고 다시 들어가라는 말이다. 

원감충지 선사의 선 정신이 그래서 흠씬 더 묻어나는 선시다. 어제도 비가 오고, 오늘 아침에도 비가 왔다. 그 비와 기표를 뚫고 기의로 솟아오를 ‘우후죽순들을 기다린다. 그 향연(饗宴)과 향연(香煙)과 향연(饗筵)을 기다린다.

이 선시의 원 제목은 ‘복암노인 충지’(宓庵老人 冲止) ‘한중잡영’(閑中雜詠, 한가하여 읊은 노래들) 중 2번째 시이다. 글을 쓰고 나니 필자의 마음도 마치 적막한 물속 같다.(그러나 어설프면 안 되겠지. 그러려면 더 열심히 노력하고 수행 정진해야겠지. 이것은 필자가 필자에게 주는 경고의 말입니다. 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요. 대신 향 심지에 불 붙여 이마에 정대한 뒤 향로에 꽂습니다. 필자의 불순을, 부디, 용서해주시길.)

참, 원감충지 선사는 고려 후기 빼어난 고승이다. 1292년 1월10일 삭발 목욕한 뒤 옷을 갈아입고, 문인(門人)들에게 “생사(生死)가 있는 것은 인생의 일이다. 나는 마땅히 가리니 너희는 잘 있거라”라는 말을 남기고 입적했다고 한다. 사는 동안엔 만행을 즐겼는데, 이 또한 ‘화엄경’ 속의 선재동자를 본받고 싶어서 그랬다고 한다.(그러고 보니 필자도 10여년 전 1년 동안 발이 부르트면서까지 ‘바닷가 절집’ 만행을 한 적이 있다. 그래도 선재동자는 못됐다. 힘만 있다면 다시 한 번 기꺼이, 만행에 나서고 싶다.)

승한 스님 빠리사선원장 omubuddha@hanmail.net

[1685호 / 2023년 6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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