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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수행이론의 총망라(60)-성불 관련; 각론⑦

수행은 12연기로 말하면 무명 퇴치

초기·대승 읽어야 전체 보여
컴퓨터 자판만 두드려선 한계
불교에선 처음도 끝도 수행
수행은 자기와 타인 모두 향해

필자의 경우 이미 오랜 습관이 되었는데, ‘화엄경’ 본문을 읽으면서도 항상 ‘잡아함’(1,362개의 경)의 어느 대화를 ‘변주(變奏)’하는가에 주목한다. 마찬가지로 대승경전을 대상으로 하는 논서 읽을 때도 초기경전을 대상으로 하는 아비달마 논사(論師)의 논증을 염두에 둔다.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를 유기적으로 읽어야 불교 전체가 보인다는 필자 나름의 철학이다. 

한편, 초기 경전 주석에 빠진 논사들의 논의가 ‘소승’이라 비난받듯이, 대승 경전의 주석에 빠진 논사들의 논의도 ‘소승’이라 비난받아 마땅하다. 둘 다 하는 ‘짓’이 책장이나 넘기고 입만 살아 있고, 요즈음은 ‘펜대’ 대신 컴퓨터 자판만 두드리고 있으니 말이다. 필자의 경우를 특정해서 하는 말이니, 수행하는 논사는 해당 안 된다. 오해 없으시길 바란다. 

불교는 처음도 수행이고 끝도 수행이다. 그런 수행의 방향은 자기 쪽으로도 향하고 타인 쪽으로도 향한다. 수행이란 12연기로 말하자면, ‘무명(無明, avidyā)’의 퇴치이다. 그래야 안이 행복하고 밖이 평화롭단다. ‘무명’이라는 용어 내지는 발상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본래는 밝았는데[明, vidyā] 번뇌가 가린다는 생각의 전제(前提), 또는 선행(先行), 또는 선험(先驗) 등의 가설(假設; hypothesis)이 있어야 한다. 그러고 나서, 번뇌에 주목하여 ‘번뇌를 끊어 지워가는[斷滅]’의 논리를 세우는 논사(論師)도 있고, 밝음에 주목하여 ‘밝음의 기능을 이뤄가는[成德]’의 논리를 세우는 논사도 있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용어와 논리를 구사하여 주장도 하고,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제시하여 상대 주장을 논파하는 변증(辨證)이 늘어진다. ‘말’이 많아지고 ‘썰’이 난무한다.

이번 ‘71회차’ 연재는 ‘십통품 제28’ 소개할 차례이다. 제27품 즉 ‘십정품’에서 선정이라는 ‘원인’이 있으니, 이어지는 제28품에는 ‘결과’가 나와야 할 것이다. 즉, 신통력으로 ‘십통품 제28’에서는 10가지 신통을 소개하고 있다. ‘잡아함’(제993경, 제1,141경) 등에 등장하는 6신통(神通)을, ‘10’이라는 숫자를 좋아하는 ‘화엄경’ 구성 작가가 늘여놓은 것이다. 기본은 6신통으로, ①신족통(神足通), ②천이통(天耳通), ③지타심통(知他心通), ④숙명통(宿命通), ⑤천안통(天眼通), ⑥누진통(漏盡通)이다. 내용 소개 대신 한문을 괄호 속에 넣었으니 독자들께서는 살피시기를 바라면서, ‘질문-대답의 형식’에 대해 말씀드리겠다. 

초기의 불경이나 대승의 불경이나 ‘무문자설(無問自說; udāna)’도 있지만, 대부분은 질문이 있고 그에 따른 대답이 있다. ‘경(經)’만이 그런 게 아니고, ‘율(律)’도 그렇다. 뭔가 사안이 생기고 궁금함 내지는 시시비비가 생기니, 그에 따라 ‘율’이 제정된다. 당연, 율장도 경장처럼 읽을 때처럼 본문만 읽어서는 그 뜻을 온전하게 알기 어렵다. 그 사안의 전후와 경위를 함께 읽어야 한다. 요새 식으로 말하면 ‘입법(立法) 배경과 취지’를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자, 그렇다면 ‘질문-대답의 형식’에서 볼 때 질문은 어디 부분에 나오는가? ‘여래명호품 제7’ 첫 대목에서 쏟아진 40개 질문 중에 ‘10통’을 여쭈는 대목이 있다. 40개의 질문은 당시에 모인 대중이 마음속으로 세존께서 설해주시기를 청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런 청법 형식을 경학에서는 ‘염청(念請)’이라 한다. ‘십정품’의 내용 설명은 위에서 거론한 6신통으로 대신하고, 이런 신통력의 효과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찬탄하는 보현보살의 설법 대목을, 운허 스님의 ‘한글대장경’ 인용하여 짧은 ‘십통품 제28’ 마치려 한다.

“불자들이여, 보살마하살이 이 열 가지 신통에 머물면 모든 하늘들이 헤아리지 못하며, 일체 중생도 헤아리지 못하며, 일체 성문과 모든 독각과 모든 보살들도 헤아리지 못하며, 이 보살의 몸으로 짓는 업을 헤아릴 수 없으며, 말의 업으로 헤아릴 수 없으며, 삼매의 자유로움을 헤아릴 수 없으며, 지혜의 경계를 헤아릴 수 없나니, 오직 부처님과 이 신통을 얻은 보살을 제하고는 이 사람의 공덕을 말하거나 칭찬하거나 찬탄할 수 없느니라.” 

신규탁 연세대 철학과 교수 ananda@yonsei.ac.kr

[1688호 / 2023년 7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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