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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임진왜란의 발발과 의승군의 궐기

기자명 민순의

거병 주도·전투 앞장…임진왜란 판도 바꿔

1592년 일본 조선 침략하자 충청서 승병 일으킨 영규대사
조정서 전국단위 승군 적극적 거론…휴정대사에 조직 요청
의엄 스님 승군 사령관으로…유정·처영도 관동·호남서 활약

영규 스님은 밀양 출신 인물로 서산대사 휴정 스님의 제자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선조가 몽진하자 의승 수백명을 규합한 뒤 조헌과 연합해 청주에서 왜적과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사진은 공주 갑사 소장 영규대사 진영.
영규 스님은 밀양 출신 인물로 서산대사 휴정 스님의 제자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선조가 몽진하자 의승 수백명을 규합한 뒤 조헌과 연합해 청주에서 왜적과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사진은 공주 갑사 소장 영규대사 진영.

1592년(선조 25) 4월13일(양력 5월23일) 부산 앞바다가 갑자기 이국의 배들로 가득 찼다. 새벽 안개를 틈타 바다를 건너온 일본 함선이었다. 처음 보고된 400여 척의 숫자를 근거로 상부에서는 그것이 함대의 전부라고 여겼으나, 당일 사냥을 나갔던 첨사(僉使·종3품 무관) 정발(鄭撥)은 급히 돌아와 군사와 백성을 거느리고 성을 지켰다. 이튿날 새벽 일본군이 성을 침공했다. 정발은 한참 동안 대항하여 싸웠으나 화살이 다 떨어지자 적의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고, 성은 이내 함락됐다. 이렇게 임진왜란이 시작됐다.(‘선조실록’ 26권, 25년 4월13일 ; ‘선조수정실록’ 26권, 25년 4월14일)

이후의 상황은 알려진 대로다. 부산진 전투 뒤이어 동래성 전투 패배.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의 지휘하에 관민(官民)이 사력을 다하여 저항했으나 전멸에 가깝게 패하고 만 장렬하고 안타까운 전투였다. 4월25일 순변사(巡邊使·중앙에서 파견한 전투지휘관) 이일(李鎰)이 상주에서 패배하고, 사흘 뒤인 4월28일 삼도순변사 신립(申砬)마저 충주 탄금대에서 패하자, 4월30일 임금은 마침내 도성을 버리고 파천(播遷·임금이 도성을 떠나 피란 감)길에 올랐다.(‘선조실록’ 26권, 25년 4월13일 ; ‘선조수정실록’ 26권, 25년 4월14일 ; ‘선조실록’ 26권, 25년 4월17일 ; ‘선조실록’ 26권, 25년 4월28일 ; ‘선조실록’ 26권, 25년 4월30일)

승전보는 뜻밖에도 전국 각지에서 궐기한 의병들로부터 도착하였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스님의 이름도 있었다.

“어떤 승려가 충청도에서 의병을 일으키면서 ‘한 그릇의 밥도 다 나라의 은혜이다’ 하고는 그 무리를 불러모아 지팡이를 들고 왜적을 쳤다고 합니다.”(이주(李柱), ‘선조실록’ 29권, 25년 8월26일)

“영규(靈圭)라는 자가 있어 300여명을 불러 모으고서 ‘우리들이 일어난 것은 조정의 명령이 있어서가 아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는 자는 나의 군대에 들어오지 말라’고 하니, 승려들이 다투어 스스로 앞장서서 모여 거의 800명에 이르렀는데, 조헌(趙憲)과 함께 군사를 합하여 청주를 함락시킨 자가 바로 이 사람이라고 합니다.”(신점(申點), ‘선조실록’ 29권, 25년 8월26일)

“승려 영규가 의(義)를 분발하여 스스로 승려를 많이 모아 성 밑으로 진격했는데 제일 먼저 돌입하여 마침내는 청주성을 공략했습니다. 그가 호령하는 것을 보면 바람이 이는 듯하여 그 수하에 감히 어기는 자가 없었고 질타하는 소리에 1000명의 승려들이 돌진, 제군(諸軍)이 이들을 믿고 두려움이 없었다고 합니다.”(비변사, ‘선조실록’ 30권, 25년 9월11일) 

조선후기의 문신 조인영(1782~1850)이 쓴 ‘기허당 영규대사 순의비명(騎虛堂靈圭大師殉義碑銘)’에 따르면 영규 스님은 박씨 문중의 밀양 출신 인물로 서산대사 휴정 스님의 제자였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선조가 몽진하자 3일을 통곡한 끝에 의승 수백 명을 규합하여 청주에서 왜적과 싸웠고, 이에 조헌이 연합하여 함께 대승을 거두었다. 기세를 탄 조헌이 금산 전투를 계획하자 스님은 더욱 철저히 준비할 것을 조언했으나, 결국 조헌의 뜻에 따라 함께 싸우다 8월18일 전사했다.(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상편 ; ‘선조실록’ 30권, 25년 9월12일)

기록에 따르면 영규 스님과 휘하의 의승들은 거병 당시 조헌과의 연합에서 주도적인 입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스님들이 직접 전투에 참여했음을 뜻한다. 금산 전투에서 조헌의 뜻을 따랐다고 하지만, 조헌과 함께 전사했다는 사실에서 전투 병력으로서의 면모가 확연하다. 스님이라고 생활인이 아니었겠는가마는, 불살생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살아왔을 이들이 전장에 나섰던 그 마음은 가히 헤아리기가 힘들다.

영규 스님 일동의 활약은 조정의 임금과 신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영규 스님에게는 승장(僧將)의 칭호와 함께 종2품의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벼슬이 증직(贈職·죽은 뒤 품계와 벼슬을 추증하던 일)되었고(‘선조실록’ 31권, 25년 10월21일), 조정에서는 전국 단위의 승군(僧軍) 조직이 적극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선조실록’ 30권, 25년 9월12일, “윤두수가 아뢰었다. ‘본도(평안도)에 고승(高僧) 휴정(休靜)이 있는데 통지하여 군사를 모으게 할까 합니다’”)

“승통(僧統)을 설치하여 승군을 모집했다. 행조(行朝)에서 묘향산의 옛 승관(僧官) 휴정(休靜)을 불러 그로 하여금 승려를 모집하여 군사를 만들도록 하였다. 휴정이 여러 절에서 불러 모아 수천여명을 얻었는데 제자 의엄(義嚴)을 총섭(總攝·승군을 통솔하는 일을 맡아 하던 직)으로 삼아 그들을 거느리게 하고 원수(元帥)에게 예속시켜 성원케 하였다. 그리고 격문을 보내 제자인 관동(關東)의 유정(惟政)과 호남(湖南)의 처영(處英)을 장수로 삼아 각기 본도에서 군사를 일으키게 하여 수천명을 얻었다.”(‘선조수정실록’ 26권, 25년 7월1일)

‘선조실록’에는 윤두수가 승군 동원을 제안한 날짜가 선조 25년 9월12일인 데에 반해, ‘선조수정실록’에서는 같은 해 7월1일에 승군 모집이 시행된 것으로 돼 있어 시점의 어긋남이 있다. 이같은 착오는 사초의 기록과 보관이 어려웠던 전란기의 특수성에서 기인한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영규 스님의 거병이 선조 몽진 직후에 이루어진 일임을 감안할 때, 승군에 대한 조정의 인식 변화와 승단의 전국적인 움직임에 영규 스님의 활동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어 보인다. 묘향산에 주석하며 멀리 남쪽 제자의 소식을 들었을 휴정 스님의 마음은 또 어떠하였으랴.

위에 인용한 ‘선조수정실록’ 25년 7월1일의 기사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이어진다. “유정은 담력과 지혜가 있어 여러 번 왜진(倭陣)에 사자로 갔는데 왜인들이 신복(信服)하였다. 승군은 접전(接戰)할 수는 없었으나[僧軍不能接戰], 경비를 잘하고 역역(力役)을 부지런히 하며 먼저 무너져 흩어지지 않았으므로 여러 도에서 그들을 의지하였다.”

휴정 스님의 지도하에 본격적으로 궐기한 임진왜란 의승군의 활동은 과연 구체적으로 어떠했던 것일까.

민순의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 nirvana1010@hanmail.net

[1690호 / 2023년 7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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