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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수행이론의 총망라(63)-성불 관련; 각론⑩

수행 통한 공덕의 양은 셀 수 없다

경전에는 부정의 표현 많은데
부정 근거로 ‘무엇’ 상정 돼야
수 세는 단위 아승기품에 나와
‘불가설불가설전’은 무한 표현

순서에 따라 이번에는 ‘아승기품 제30’을 소개하기로 한다. 이곳에서는 심왕 보살이 부처님이 알고 계시는 수량이 어떠하신지를 여쭈는 질문에, 부처님께서 직접 대답하신다. 문답의 주제는 수(數)의 단위이다. 전에도 언급했지만 ‘화엄경’ 본문에서 부처님의 친설 형식의 법문은 앞의 ‘십정품 제27’과 이곳의 ‘아승기품 제30’ 그리고 뒤에 나오는 ‘여래수호광명공덕품 제35’ 뿐이다. 

상례에 따라, 왜 이 품이 순서상 이곳에 배치되었는지를 소개한다. 우선 꼽을 수 있는 이유는 앞의 세 품은 질문에 따른 개별적 대답이지만, 이곳 ‘아승기품’을 포함한 이하의 세 품은 등각(等覺)의 경지가 얼마나 심오한지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한편, 앞의 ‘십정’ ‘십통’ ‘십인’에서 지혜가 원만하고 그런 지혜를 끝까지 모두 체험했기 때문에 이곳 ‘아승기품’에서는 그런 실천의 공덕이 많다는 것을 숫자로 보여주려 한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수행이란 매우 중요한 것이고, 세상 누구라도 수행하면 그에 따른 결과로서 얻는 미묘한 공덕이 있게 마련인데, 그 공덕의 양은 ‘무수(無數)’라는 것이다. ‘셀 수 없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셀 수 없음’을 말하려면, 우선 ‘셈’이 상정되어야, 그래야 그런 ‘셈’이 ‘없음’을 말할 수 있다.

불경에는 무엇을 부정하는 표현이 많이 나온다. 대부분은 ‘서술적 형식’으로 그것을 표현하지만, 그런 서술적 긴 표현을 때로는 명사화하여 표현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무수(無數), 무량(無量), 무변(無邊), 무등(無等), 불가수(不可數), 불가칭(不可稱), 불가사의(不可思議), 불가량(不可量), 불가설(不可說) 등등으로 말이다. 이런 부정적인 사유나 언급이 가능하려면, 즉 ‘무(無)’나 ‘불가(不可)’를 운운하려면, 반드시 ‘무엇이’ 상정되어야 한다. 공(空)도 마찬가지이다. ‘무엇’이 공한 것인지 말이다. ‘무엇’이 없는 ‘공 그 자체’는 성립 불가능하다. 그것은 언어적인 희론(戱論)이다.

글을 쓰는 필자 자신을 위한 말인데, 보도 듣도 못한 숫자를 세는 단위가 ‘아승기품’에 등장하는데, 그 ‘허풍’이랄지, 내지는 ‘상상력’이랄지 그것에 홀리지 말고, 이런 수(數)를 늘어놓는 ‘화엄경’ 구성 작가의 의도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간단하다. 수행의 공덕을 숫자로 계량(計量)하면 <‘불가설’ 곱하기 ‘불가설’>의 수량이라는 것이다. 자. 그러면 좀 지루할 수도 있겠지만, ‘화엄경’에서 말하는 수의 단위를 운허 스님의 ‘한글대장경’에서 인용해온다. 

“선남자여, 일백 락차(洛叉)가 한 구지(俱胝)요, 구지씩 구지가 한 아유다(阿庾多)요, 아유다씩 아유다가 한 나유타(那由他)요, 나유타씩 나유타가 한 빈바라(頻婆羅)요, 빈바라씩 빈바라가 한 긍갈라(矜羯羅)요”

여기서 운허 스님이 ‘씩’이라 번역한 것은 ‘곱하기’의 뜻, 즉 제곱이다. ‘락차’는 범어 ‘락시아[Lakșa]’를 소리 나는 대로 번역한 것으로 지금의 ‘10만’이라는 숫자에 해당한다고 한다. 긍갈라에서 다바라, 다바라에서 아가바, 아가바에서 비섬바, 비섬바에서 비구담, 비구담에서 삼말야, 삼말야에서 고출(高出), 고출에서 하리포, 하리포에서 마로타, 마로타에서, 이교만(離驕慢), 이교만에서 가마달라, 가마달라에서 시바마달라, 시바마달라에서 솔보라, 솔보라에서 미라, 미라에서 사모라, 사모라에서 혜로야, 혜로야에서 나발라, 나발라에서 타마라, 타마라에서, 무진(無盡), 무진에서 발두마, 발두마에서 아승기전, 아승기전에서 무등(無等), 무등에서 불가칭전(不可稱轉), 불가칭전에서 불가설(不可說)로 점점 숫자의 단위가 ‘제곱’으로 올라간다.

마침내 불가설을 제곱하면 불가설전(不可說轉)이 되고, 다시 그것을 제곱하여 나아가 ‘불가설불가설전’에 이른다. ‘화엄경’ 구성 작가가 사용한 ‘불가설불가설전’이라는 용어는, 무한함을 표현하는 하나의 용어가 되어 대승 경전의 곳곳에 쓰이게 되었다. 이번 기회에 ‘불가설불가설전’이라는 용어의 출전과 그 생성 배경을, 좀 지루할 수 있지만, 일단 소개해 둔다.

신규탁 연세대 철학과 교수 ananda@yonsei.ac.kr

[1691호 / 2023년 8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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