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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지경공덕분(持經功德分 - 경을 지니는 공덕)

기자명 진우 스님

사상지견이 사라지면 우주 삼라만상이 모두 법신 아님이 없다

무엇에도 걸림 없는 스님을 절에서는 한주, 한도인이라 불러
분별심 없기에 항상 평안하고 평온한 이상적 상태에 머물러
놓고 놓는 마음이 중도심이며, 결국 생사 벗어난 해탈도 가능

개구리나 귀뚜라미가 욕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것처럼 상대의 말 또한 이렇게 생각해 결코 감정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법보신문DB]
개구리나 귀뚜라미가 욕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것처럼 상대의 말 또한 이렇게 생각해 결코 감정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법보신문DB]

하이고 수보리 약요소법자 착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 즉어차경 불능청수독송 위인해설(何以故 須菩提 若樂小法者 着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 卽於此經 不能聽受讀誦 爲人解說) 왜냐하면 수보리야! 소승법을 좋아하는 사람은 나라는 지견, 사람이라는 지견, 중생이라는 지견, 오래 산다는 지견 등 사상에 빠져 곧 이 경을 능히 알아듣지도 지니지도 읽지도 외우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잘 알려주지도 못하느니라.

이러한 사상(四相) 지견(知見)에 걸린 이들은 소승법(小乘法)을 즐기는 사람이니, 소승법을 따르는 자로는 이러한 최상승(最上乘) 경전을 알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러니 남을 위하여 해설해 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여래께서 수보리에게 불가사의 공덕을 성취한 사람은 여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짊어진 이들이니 여래가 다 알고 다 본다고 하심이다.

여래가 다 알고 다 보신다는 것은 사상(四相)이 공한 까닭이요, 사상이 공하다 함은 사상의 지견(知見)이 없음을 말함이다. 그러니 사상지견(四相知見)이 공하지 못한 사람으로 이러한 사상지견이 공한 경을 들을 수 있을 것이며 독송할 수 있겠는가. 또 더구나 남을 위하여 잘 말해 줄 수 있겠는가 물으신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 어디에도 집착하는 마음이 있으면 이를 소승(小乘)이라 하고, 소승은 스스로 만든 인과의 고통과 괴로움을 감당해야 한다. 그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비결은 생각을 하되 무조건 감정을 비우는 것이다. 요즘말로 단 하나라도 뒤끝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요즈음은 보기 어려우나 옛날에는 한도인(閑道人)들이 많았다. 어떻게 보면 바보 같기도 하고 뻔뻔스럽기는 낯 두껍기가 한 뼘이 넘을 정도고, 우유부단하기가 이를 데가 없는, 그 어떤 데미지에도 인상 한 번 쓰지 않는 사람, 즉 절집에서는 이런 이를 한주(閑主)스님, 또는 한도인(閑道人)이라 한다.

이 정도의 멘탈을 가졌다면 가히 나한(羅漢)에 비견할 만하겠다. 그래서 한가한 도인이라 하여 한도인(閑道人)이라 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한마디로 분별심(分別心)이 없기 때문에 그 어떤 경계에도 끄달리지 않고 항상 마음이 평안, 평온한 상태에 있으므로 이상적이다. 사람들은 이 부분에 있어서 본질을 놓치고 대부분 착각을 한다. 사람이 최고로 추구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불편함과 괴로움을 피하고 편안함과 즐거움을 얻는데 있다. 그리고 고통과 불편함을 없애기 위한 수단으로서 돈과 권력 명예와 종족을 가지고 지키려 한다. 그리하여 편안과 즐거움을 위한 돈과 권력, 명예와 종족을 지키기 위해 결국 싸움과 전쟁, 그리고 시비의 악순환을 거듭하며, 또 다시 불편과 괴로움의 인과를 감수해야 하므로,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결국 인생에 있어서 최고 최대의 목적은 불편하지 않고 편안한 상태의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즐겁기 위해서는 괴로움의 인과를 감수해야 하고, 옳은 것을 주장하려면 그른 것의 과보를 감수해야 하므로, 이러한 분별은 결코 해답이 될 수 없다. 즐거움이 크면 클수록 괴로움의 과보도 크게 나타나고, 정의(正義)의 부르짖음이 크면 클수록 불의(不義)의 과보도 크게 나타나는 것이니, 이것은 인과의 전형적인 모습에 불과하고 분별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이므로 결코 바람직한 답이 아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자세는 절대적으로 기분 감정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대화를 하면서도 내 주장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고 상대의 주장이 틀리다 하더라도, 결코 화를 내거나 시비(是非) 싸움을 해서는 안 된다. 아니 그렇게 하더라도 내 감정이 상해서는 안 된다. 이기는 것이 본질이 아니라 내가 평안 하느냐에 있기 때문이다. 그 어떤 무엇을 관철하여 즐거움과 흡족함을 얻는다 하더라도, 그 대가로서 인과를 치러야 하는 과정이 남아 있기 때문에 결코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다. 이때는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 본질은 내 마음에 감정을 싣지 않음으로써 평안함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대를 이김으로써 내 기분을 맞추려 하거나, 졌다고 하여 자존심을 스스로 상하게 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이다. 그러니 이기고 지는 것에 마음을 둘 것이 아니라, 항상 감정을 일으키지 않음으로써 인과의 과보를 받지 않는 데에 마음을 써야 한다. 그러니 항상 경계에 걸리지 말아야 하느니, 그럴 때마다 마음을 놓고 또 놓아야 한다. 귀뚜라미나 개구리가 나를 보고 아무리 욕을 한다 해도 내가 알아듣지 못하고 감정이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상대의 말 또한 귀뚜라미나 개구리 소리로 들어서 감정을 일으키지 않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다만, 큰소리 작은 소리인지, 얇은 소리 두꺼운 소리인지 구별만 하면 된다.

수보리 재재처처 약유차경 일체세간천인아수라 소응공양(須菩提 在在處處 若有此經 一切世間天人阿修羅 所應供養) 당지차처 즉위시탑 개응공경 작례위요 이제화향 이산기처(當知此處 卽爲是塔 皆應恭敬 作禮圍繞 以諸華香 而散其處) 수보리야! 만약 어느 곳이든 이 경이 있다면 모든 세간의 하늘, 사람, 아수라가 마땅히 공양하는 바이니, 마땅히 알라, 이곳은 부처님의 탑을 모신 곳과 같으므로, 모두가 공경하고 예배하고 둘러싸서 모든 꽃과 향으로 그곳을 덮을 것이다.

공양(供養)은 몸과 마음 그리고 귀한 물품을 봉헌하여 정성을 보이는 것이다. 예배한다는 것은 오체(五體-사지와 머리)를 땅에 닿게 하여 절하는 것이고, 둘러싼다는 것은 대중이 부처님께 귀의하는 장면이다. 꽃과 향은 공경 찬탄함의 표시이다.

누구나 사상(四相)이나 사상을 보는 지견(知見)이 없으면 여래법신(如來法身)이 법계(法界)에 충만함을 저절로 알아지는 것이니, 중생이 법신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사상지견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사상지견이 없으면 우주 삼라만상이 모두 법신(法身)인 줄 알 것이며, 자기 자신도 법신인 줄 알아 모두가 법신 아닌 것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법신의 진리가 모두 담겨있는 ‘금강경’이야 말로 법신의 전체 표현이라 할 것이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시되, 어느 곳을 막론하고 만약에 항상 계신 법신의 진리가 온전히 들어있는 이 경으로 하여금, 법신불(法身佛)이 현실로 나투어 지게 됨이니, 법신(法身)은 본래 나툴 수 없는 것이지만 이 경으로 인하여 나투어 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아는 자는 매우 드문 것이니, 범인(凡人)이나 열등중생(삼악도-三惡道-지옥, 아귀, 축생)은 도저히 알지 못하고, 하늘이나 사람, 아수라 가운데 근기가 매우 수승한 상근기(上根器) 정도나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깨닫게 되면 누구든 응당 일체세간의 몸과 마음과 물건 등을 아끼지 않고 공양 공경할 것이니, 이곳은 바로 상주법신불(常住法身佛)이 현실에 잠깐 나타나신 곳으로서, 부처님의 진불(眞佛), 진사리(眞舍利)가 계신 탑과 부도(浮屠)일 것이므로, 천인(天人)과 아수라가 공경하고 공양하며 오체투지(五體投地)할 것이요, 귀의(歸依)할 것이며, 부처님을 둘러싸고 꽃과 향으로 장엄할 것은 물론이다.

“스님 저는 걱정 근심되는 일이 있으면 밥도 잘 먹지 못하고 잠도 잘 못자겠어요. 어떻게 하면 걱정 근심하지 않고 대담하게 일을 잘해 나갈 수 있을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는 걱정 근심일 것이다. 심하면 우울증과 스트레스로 인한 정신적 고통이 삶을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걱정도 팔자(八字)란 말이 있듯이, 근심 걱정은 모두가 습관화 되어 있어서 별다른 일이 없음에도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다. 근심 걱정의 원인은 목적을 미리 정해 놓은 데서 온다. 이렇게 되어야 하는데. 저렇게 되면 안 되는데. 그러나 모든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다. 우주 삼라만상(森羅萬象)이 인드라망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므로, 나 혼자만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는 없다.

때문에, 되고 안 되고는 인연 연기법(緣起法)에 맡기는 것이 좋다. 가장 중요한 것은 되고 안 되고는 본래 없다는 것이다. 연기법에 의해서 그렇게 저렇게 저절로 될 뿐이다. 문제는 되고 안 되고를 내가 정하고 만든다는 것에 있다. 따라서 되고 안 되고, 좋고 싫고는 내가 만드는 인과법(因果法)으로서 되는 것이 있으므로 안 되는 것이 덩달아 나타나게 되고, 좋은 것이 있으므로 좋지 않은 것이 덩달아 나타나게 되는 법이니, 결국 원하는 만큼 원치 않는 것 또한 생기는 것이어서 생사(生死) 생멸(生滅)을 나 스스로가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니 원하는 것이 없으면, 원치 않는 것 또한 없는 것이므로, 가장 이상적인 행동 양식은 목적을 미리 정해 놓고 애태울 것이 아니라, 어떤 결과가 나타나든 연기법에 따라 무조건 믿고 맡겨서 결과에 상관없이 그저 묵묵히 행할 뿐이다. 따라서 그 어떤 일이 닥친다 하더라도 걱정 근심을 할 것이 아니라, 인연과 연기(緣起), 그리고 인과(因果)를 믿고 맡기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다. 아쉬움과 억울함과 성냄과 시비(是非)와 고락(苦樂)의 모든 감정을 그때그때 내려놓는 연습이 필요하다.

진정으로 부처님을 믿는 마음이란 무엇인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공(空)과 연기(緣起), 그리고 인과(因果)에 대해 더 이상 의심하지 않고 무조건 따르는 마음이야 말로 곧 부처님을 진정으로 믿는 신심인 것이다. 모든 것을 부처님의 뜻에 맡기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것, 이러한 마음으로 모든 감정을 내려놓고 행해 나간다면 저절로 걸림과 막힘이 없어지게 되어, 결국은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게 된다. 이때에 비로소 무애자재행(無碍自在行)이 나오고 자비행(慈悲行)이 나오는 것이다.

놓고, 놓고 또 놓고 또 다시 놓고 놓는 마음, 이를 중도심(中道心)이라 하고 생사(生死) 생멸(生滅)에서 벗어나는 해탈(解脫)이 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되는 것이다.

진우 스님 조계종 총무원장 sansng@hanmail.net
 

[1693호 / 2023년 8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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