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광화문 천주교 표지석과 정교분리 원칙

프랑스에서는 2023년 가을 학기부터 대학교를 제외한 모든 공립학교에서 이슬람 여성의 의복인 ‘아바야’, 이슬람교도가 즐겨 입는 ‘카미즈’, 이슬람 남성의 의복인 ‘토브’ 등 착용을 전면 금지했다. 특정 종교를 겨냥한 옷의 검열은 현재 상당한 반발과 비판을 초래하고 있다. 프랑스는 이미 2004년에 공립학교에서 이슬람 여학생의 히잡, 유대교 남성의 챙 없는 모자인 키파, 시크교의 터번인 다스타, 기독교의 대형 십자가 같은 명시적인 종교적 상징물을 착용하는 것을 금지했다.

프랑스 정부가 ‘드레스 코드’라는 어쩌면 매우 비근대적인 조치인 듯한 무리수를 둔 이유는 무엇일까? 프랑스 교육부 장관인 가브리엘 아탈은 “교실 안으로 걸어 들어갈 때 당신이 학생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그들의 종교를 식별할 수 있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면서 학교라는 세속적인 성전은 종교에서 해방된 공간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종교적인 정체성을 드러내는 아바야나 카미즈는 프랑스 공화국이 지향하는 세속주의 원리인 라이시테(laïcité), 즉 정교분리를 위반하고 있으므로 허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세속적인 공간인 학교에서 종교적인 의복을 착용하는 것은 타인을 개종시키려는 행위로 읽힐 수 있기 때문에 다분히 정치적인 공격이자 정치적인 신호일 수 있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나는 이러한 금지 조치에 대한 찬반을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다만 종교적인 의복이 학교를 뒤흔드는 종교적이면서도 정치적인 행위일 수 있다는 인식, 즉 세속적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개종 행위는 ‘종교 행위’이면서 ‘정치 행위’라는 그 인식에 주목하고 싶다. 우리는 흔히 정치와 종교가 서로의 일에 개입하지 않는 것을 정교분리라고 생각한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정교분리는 정치의 종교적 중립을 강조하는 표현인 것 같다. 국가기관도 공직자의 종교 차별 또는 종교 편향 금지만을 강조한다.

그런데 프랑스 정부의 아바야 착용 금지는 이제 정교분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요구하고 있는 것 같다. 특히 나는 종교적인 의복의 착용이 ‘정치적인 행위’로 읽히는 바로 이 장면을 강조하고 싶다. 이제 정교분리의 원칙은 세속 공간을 뒤흔드는 ‘종교의 정치적 행위’에 대한 재검토를 요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겉보기엔 순연한 종교적인 행위처럼 보이더라도 그 이면에 정치적인 의도를 숨기고 있는 행위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고민할 시점이 된 것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2015년 8월23일 천주교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는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1주년을 기념해 광화문 광장에 ‘한국 천주교 순교자 124위 시복 터’ 기념 표지석을 설치했다. 광화문 재구조화 공사 후 2022년에 이 표지석은 청동 재질로 바뀌어 다시 설치됐다. 경복궁과 광화문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한국 역사의 중심에 서 있는 장소이다. 따라서 경복궁 일대는 세속적인 성스러움으로 충만한 공간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가장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공간에서 가장 종교적인 시복식이 열리고, 지극히 순도 높은 종교적인 기념물인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다.

조선정부를 상징하는 광화문 앞에서 당시 희생된 천주교 순교자의 시복식을 열고, 아울러 이 상징적 공간에 청동 표지석을 새기는 것이 종교적인 승리의 환희를 가져다주는 것인지 어떤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나는 학교에서 종교적인 의복을 입는 것만으로도 선교 행위일 수 있고, 세속의 성전에서 선교 행위를 하는 것은 정치적인 도발이라는 프랑스 정부의 과도한 해석을 떠올린다.

광화문 같은 세속적이고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종교적인 행위는 타 종교를 자극하면서 세속 질서를 교란하는 정치적인 행위일 수 있다. 그러한 공간에 설치된 표지석은 세속 공간을 뒤흔드는 위험한 정치적 상징물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것이 바로 정교분리의 위반이다.

이창익 고려대 민족문화 연구원 교수 changyick@gmail.com

[1696호 / 2023년 9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