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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간폐석교소’와 17세기 중반 불교계의 상황

기자명 민순의

조선불교 전체가 겪은 고충 실태 낱낱이 기술

17세기 현종, 승려 환속 및 비구니 사찰 폐원 등 폐불
백곡처능 8150자 ‘간폐석교소’ 상소…폐불 부당 논증
각종 승역 현황 및 비구·비구니 단일 승단 인식도 확인

2022년 봉은사에서 열린 백곡처능 스님 부도 및 비 제막식 모습. 스님이 지은 ‘간폐석교소’는 봉은사와 봉선사를 철폐 위기로부터 구하였다.
2022년 봉은사에서 열린 백곡처능 스님 부도 및 비 제막식 모습. 스님이 지은 ‘간폐석교소’는 봉은사와 봉선사를 철폐 위기로부터 구하였다.

간폐석교소(諫廢釋敎疏). 전공자가 아닌 다수의 독자들께는 아마 낯선 단어일 것이다. 다섯 글자의 이 단어는 어떤 글에 붙은 제목이다. ‘석교(釋敎), 즉 석가모니의 가르침인 불교를 폐훼(廢毁)하는 것에 대하여 간언(諫言)하는 상소문(上疏文)’. 그 제목의 뜻이다.

상소문을 지은 이는 벽암각성의 제자인 백곡처능(白谷處能, 1619~1680). 8150개의 한자로 쓰여져 조선 최장 길이의 상소문이라고 알려진 이 글이 임금에게 바쳐진 것은 현종 2년(1661)의 일이었다. 부왕 효종이 대군 신분으로 병자호란의 인질로 끌려간 청나라 심양에서 태어나 유아기를 보내고, 18세에 즉위한 그해부터 예송논쟁(1차 논쟁, 기해예송)에 휩싸이면서도 왕권과 신권 사이에서 비교적 온건하게 균형을 잡을 줄 알았던 이 젊은 임금 현종은, 그러나 재위 초 불교에 대해서는 다소 완강한 입장이었다. 즉위 1년째 되던 해 승려의 환속을 지시하고, 그로부터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자수원(慈壽院)과 인수원(仁壽院) 등 도성 내 비구니 사원을 허물게 하였다.

승려의 환속 지시는 사찰 노비[女婢] 출신의 비구니가 노비의 신역(身役) 면제를 청하자 취해진 반응이었다. 이날 왕은 “이단의 교는 매우 허망하다”라고 운을 뗀 후, “이것을 다스리지 않으면 민정(民丁)은 날로 줄어들고 승니(僧尼)는 날로 증가할 것이니…경외(京外, 서울과 시골)의 양민으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된 자는 모두 환속시키고, 명령을 따르지 않을 경우 관리나 환속 대상자를 막론하고 모두 죄를 줄 것”을 명하였다.(‘현종실록’ 3권, 1년 12월19일) 불교를 허망한 이단의 교라고 전제하긴 하였으나, 사건의 발단이나 지시의 내용으로 보아 백성의 출가로 야기되는 각종 역의 수취에 차질이 빚어질 것을 우려하는 취지였다.

그러나 이러한 전면적인 환속 조치가 과격하다는 의견이 있자 소요 사태를 우려한 임금이 일단 먼저 “도성 내 두 비구니 사원(자수원과 인수원)을 혁파하고, 40세 이하의 비구니는 모두 환속시켜 혼인하게 하고, 그 나머지 늙어서 돌아갈 곳이 없는 자들은 모두 도성 밖의 비구니 사원으로 내보내며, 나이가 넘은 사람도 환속하려는 자는 허락하라”고 하였다.(‘현종실록’ 4권, 2년 1월5일) 특히 자수원에 대해서는 이곳에 봉안되어 있던 선왕들의 위패를 땅에 파묻게 하였는데, 이는 봉은사의 예에 의한다고 하여 이에 앞서 봉은사에서도 유사한 일이 벌어졌음을 짐작하게 한다.

‘간폐석교소’는 이러한 상황에 즈음하여 쓰여진 글이었다. 처능 스님은 1660년(현종 1년) 입적한 각성 스님 뒤를 이어 교계의 중진으로 자리하며 대둔산 안심사(安心寺)에 주석하고 있었다. 현종의 지시 사항이 서울 비구니들을 대상으로 취해진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먼 남도에서 활동하던 중진의 비구가 직접 붓을 들어 항거했다는 것은 조선 후기의 승단이 전국적으로 긴밀히 소통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비구 승단과 비구니 승단 간에도 단일 승가라는 의식 하에 돈독한 결연이 있었음을 반증한다.

소문(疏文)은 먼저 “듣건대 비구와 비구니를 모두 없애는 방침이 정해져, 비구니는 환속시키고 비구는 없애자는 논의가 있었다고 합니다”라고 하여, 저술 동기가 국가권력의 승단 철훼 움직임에 대한 반발임을 밝힌다. 또한 당시의 불교 비판에 대하여 ①발생한 지역이 다르다고 해서 불교를 배척하는 것은 옳지 않다 ②발생한 시대가 다르다고 해서 불교를 배척하는 것은 옳지 않다 ③윤회설이 민중을 호도한다고 판단해서 불교를 배척하는 것은 옳지 않다 ④직접적인 노동을 통한 생산이 없다고 불교를 폐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 ⑤국가 정책에 위배되는 승려가 있다고 불교를 폐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 ⑥군대 조직에서 빠진다고 불교를 폐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등 6가지 이유를 들어 불교 폐지의 부당성을 주장한다. 

구체적으로 ①~③과 관련해서는 중국 유교와 인도 불교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없음을 들고, ④와 관련해서는 사람마다 다르게 부여받은 역할론을 거론하며, ⑤와 관련해서는 일반화의 오류를 지적하고, ⑥과 관련해서는 당시 불교계가 국가를 위해 수행하고 있던 각종 역(役)의 실태에 대해 낱낱이 열거하며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유려한 논증을 구사하고 있다.

이어 중국과 한국의 역사를 들어 불교가 미친 긍정적인 효과와 이를 모르거나 핍박하고자 하였던 이들의 폐단을 명시하고, “불교를 배척하였던 이들도 전면적인 폐지를 시도하지는 않았음”과 “모든 세상에는 불교가 있으니 함부로 없애려 들어서는 안 됨”을 주장하였다. 마지막으로 중국과 한국의 비구니의 유래와 내원당‧외원당의 구분을 확인하고, 선대의 유업을 계승하여 자수원과 인수원을 복원하고 불교 탄압을 중단할 것을 간곡히 주청하며 글을 맺는다.

글의 내용과 관련하여 특히 눈길을 끄는 곳은 당시 교계에 부과된 각종 역의 현황과 내원당‧외원당의 구분에 대한 인식이다. 전자와 관련하여 소문은 “불교의 세력은 점점 약해지는데 국가에서 승려들에게 요구하는 부담과 역할은 매우 많아, 호적에 편입된 일반 백성들과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다”고 말하며, 그 구체적인 사례로 황해도‧평안도 양서 지역의 군적(軍籍) 승려의 존재와 경상도‧충청도‧전라도 삼남 지방의 부역과 공출 징발, 공물용 종이 제작 등 각종 잡역(雜役)의 수취, 남한산성과 각 도 보루(堡壘)의 수비 활동 등을 들고 있다.
 
또 내원당과 외원당에 대해서는 각각 “자수원과 인수원은 궁궐 바깥의 도성 안에 위치하는 내원당이고, 봉은사와 봉선사는 성 밖에 위치한 외원당”이라고 규정하며, 이러한 차별은 남녀의 구별이 있기 때문이라고 파악하였다. 그러니까 자수원과 인수원을 중심으로 한 비구니 위주 내원당과 봉은사와 봉선사를 중심으로 한 비구 위주 외원당이라는 원당의 이중구조적 인식이 비구니와 비구를 모두 포함하는 단일 승가 개념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며, 나아가 자수원과 봉은사에서 동일하게 시도된 선왕 위패의 매안(埋安, 땅에 파묻음)은 도성 비구니 사원의 철훼가 경외 비구 사찰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는 우려로 확장될 수 있었던 것이다.

‘간폐석교소’는 백곡처능 스님에 의해 쓰여진 글이지만 그 속에 담긴 인식과 주장은 당대 조선 불교계 전체가 공유했던 것으로 보는 데에 어려움이 없다. 이는 또한 그 시절 교계가 직면했던 시대적 상황과 고난의 실태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본문에 인용 또는 소개된 ‘간폐석교소’의 내용은 ‘한국불교전서 8’에 수록된 ‘대각등계집(大覺登階集)’(권지2)과 벽산원행 스님이 감수 해제하고 자현 스님이 쓴 ‘백곡 처능, 조선 불교 철폐에 맞서다’(조계종출판사, 2019)를 참조하였음을 밝힌다.)

민순의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 nirvana1010@hanmail.net
 

[1698호 / 2023년 9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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