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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발이 부은 가을 저녁 

기자명 동명 스님

발 담근 대야에서 별의 발을 보다

위대한 사상과 문화 탄생해도
발 없이 다른 지역 전파 안돼
길에서 동물들의 많은 발 목격
빛은 우리 눈 방문한 별의 발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오래 걸었습니다
저녁을 말아먹고 검어지는 수제비마당에
대야를 내놓고 발을 담급니다

걷다가 아주 많은 발을 보았습니다
말, 양과 돼지 오리와 토끼의 발 자전거 자동차의 발도
빌딩이라는 황무지를 걷다가
김밥을 넘기며 잠시 멈춘 발도

지금쯤 그들의 발도 퉁퉁 불어 있을 겁니다
모두들 걷고 있었으니까요
심지어 낙엽도 온몸으로 걷고 있었습니다

바람은 파스를 붙인 어깨로
늙은 호박의 가장자리를 말리고
마당 그늘에서 고사리는 갈빛의 우산을 펴네요

여름길 걷느라 지쳐서 낡은 구두는
늙은 소처럼 어둠 속에 웅크립니다
앞으로 걸으려던 발자국들이 미숙한 아이로 남은 이 저녁

별들에게는 빛이 발이었나 봅니다
대야는 별빛으로 가득합니다
퉁퉁 부은 발에 시퍼렇게 청태가 끼어
빛이 되는 건 천체의 일이겠지요

별빛의 퉁퉁 부은 발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아직도 걷고 있는 이 세계의 많은 발들을 생각합니다
바다를 걷다 걷다가 결국 돌아오지 못한 발들에게는

차마 안부를 묻지 못할 거라 생각하니 사무칩니다
바닷속의 발들을 기다리는 해안의 발들이
퉁퉁 부어 있는 가을 저녁입니다
(허수경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문학과지성사, 2016)

허수경 시인이 걸어서 독일에 갔다는 것을 이 시를 통해서야 알았다. 그는 자동차의 발, 비행기의 발을 이용하여 걸어서 독일에 갔다. 그리고 살아 있는 육신으로는 돌아오지 못했다.

발이야말로 신체기관 중 가장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 발이 없었다면, 위대한 사상이나 문화가 탄생하기도 힘들었겠지만, 설사 어느 지역에서 위대하고 찬란한 사상이나 문화가 탄생했다 하더라도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시인은 걷는 것이 취미였던 듯싶다. 그날도 시인은 오래 걸을 일이 없었음에도 오래 걸었다. 걷다가 시인은 수많은 발을 보았다. 말과 양, 돼지, 오리, 토끼 등 동물들의 발은 물론이고, 자전거나 자동차 등 기계의 발을 본다. 가만히 보니 세상 모든 것들이 가만히 있지 않고 모두 조금씩이라도 발을 움직여 이동하고 있다. 저녁이 되니 바람은 파스를 붙인 어깨로 쉬고, 고사리는 갈빛의 우산을 펴고 멈추는 등 세상 만물은 이동을 완성하지 못하고 미숙한 아이로 남는다.

오래 걸은 날 저녁이면 시인은 발이 퉁퉁 부어 있어서 대야의 물속에 발을 담갔다. 그때 물속에 별빛이 가라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시인은 생각한다. ‘별에게는 빛이 발이었나? 그러니 대야에 살며시 빛을 담그는 것이겠지?’ 낮 동안 별도 자신의 발인 빛을 이용하여 우주를 걸었던 것일까? 수백 개의 별빛이 물속에서 시인의 발과 함께 쉬고 있었다.

나는 발 씻는 것을 은근히 귀찮아한다. 그럴 때 허수경 시인의 대야에 발을 담근 별들을 생각하자. 별들마저도 자신의 발들에게 소중한 휴식을 제공하는데, 하루종일 수고한 발을 소홀히 해서야 되겠는가? 발처럼 가장 낮은 곳, 보이지 않는 곳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우선 내 발은 어떤지 항상 알아차리자. 저녁이면 “발아, 오늘도 참 수고했어!”하며 어루만져주자. “오늘도 나를 이리저리 적당한 곳에 옮겨주어서 참 고맙구나!” 인사도 건네야겠다.

그리고 끝없는 황무지를, 망망한 바다를, 높고 넓은 하늘을 한없이 걷고 또 걷다가 끝내 돌아오지 않는 발들이 무수히 많음을 깨달아야겠다. 그 발들이 별이 되었고, 별들의 발이 곧 우리 눈을 방문한 별빛임을 상기해야겠다.

동명 스님 시인 dongmyong@hanmail.net

[1700호 / 2023년 10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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