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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가능주의자-나희덕

기자명 동명 스님

“얼마나 가당찮은 꿈인가요”

불가능 없다는 시인의 선언
부처님 탄생게와 같은 맥락
문제해결 출발은 정확한 인식
가능주의가 불국토 만들 것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
그렇다고 제가 나폴레옹처럼 말하려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은 불가능들로 넘쳐나지요
오죽하면 제가 가능주의자라는 말을 만들어냈겠습니까
무엇도 가능하지 않은 듯한 이 시대에 말입니다

나의 시대, 나의 짐승이여,*
이 산산조각 난 꿈들을 어떻게 이어붙여야 하나요
부러진 척추를 끌고 어디까지 가야 하나요
어떤 가능성이 남아 있기는 한 걸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가능주의자가 되려 합니다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믿어보려 합니다
​큰 빛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반딧불이처럼 깜박이며
우리가 닿지 못한 빛과 어둠에 대해
그 어긋남에 대해
말라가는 잉크로나마 써나가려 합니다
​나의 시대, 나의 짐승이여,
이 이빨과 발톱을 어찌하면 좋을까요
찢긴 살과 혈관 속에 남아 있는
이 핏기를 언제까지 견뎌야 하는 것일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무언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어떤 어둠에 기대어 가능한 일일까요
어떤 어둠의 빛에 눈멀어야 가능한 일일까요
​세상에, 가능주의자라니, 대체 얼마나 가당찮은 꿈인가요

* 오시프 만델슈탐, ‘시대’,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2012, 조주관 옮김, 96쪽. ​​​(나희덕 시집, ‘가능주의자’, 문학동네, 2021)

가능주의는 프랑스 사회주의 노동자 연맹이 가능한 것부터 점차적으로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부터 비롯되었지만, 나희덕 시인의 관점에서는 ‘어떻게든 가능하게 해야 한다’는 신념을 뜻한다.

시인은 시가 회의주의와 가능주의 사이에서 배회하는 것이고 그중에서도 회의주의에 가까운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제는 의도적으로라도 ‘불가능이란 없다’라고 말하려 한다. 시인은 “큰 빛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반딧불이처럼 깜박이며/ 우리가 닿지 못한 빛과 어둠에 대해/ 그 어긋남에 대해/ 말라가는 잉크로나마 써나가려 합니다”라고 선언한다. 이 선언이 나에게는 “이 세상이 고통으로 가득 차 있으니, 내가 마땅히 이를 편안케 하리라(一切皆苦 我當安之)”라는 부처님의 탄생게와 같은 맥락으로 들린다. 시인이 말하는 ‘우리가 닿지 못한 빛과 어둠’은 곧 우리가 닿아야 할 빛과 어둠이어서 부처님께서 편안케 하실 세상에 다름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닿지 못한 빛과 어둠’은 곧 불성(佛性)이다. 불성은 우리를 환히 밝혀줄 빛이지만, 그것은 어둠에 둘러싸여서 잘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어둠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잘 보이지 않는 빛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시인이 가능주의를 선택한 이유는 ‘나의 시대, 나의 짐승’이 가지고 있는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 찢긴 살과 혈관 속에 남아 있는 더러운 피를 극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가 짐승 같은 야만의 피를 연료로 삼아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으로 서로 물어뜯고 있음을 도저히 보아넘길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무언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가능주의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둠에 기대어야’ 한다. 그 어둠은 어둠이 아니라 ‘어둠의 빛’, 다시 말해 쉽게 보이지 않지만 환한 빛으로 숨어 있는 불성이다. 시인은 막연하게 그 불성에 기대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그 불성을 확신하기까지는 “세상에, 가능주의자라니, 대체 얼마나 가당찮은 꿈인가요”라고 수없이 탄식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문제 해결의 출발은 문제에 대한 정확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 시인의 “얼마나 가당찮은 꿈인가요”라는 탄식은 문제의식에 다름아니다. 문제의식이 살아 있는 한 회의적일지라도 가능주의는 우리 사회를 점차 불국토로 만들어갈 것이다.

동명 스님 시인 dongmyong@hanmail.net

[1706호 / 2023년 11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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