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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달라이라마 친견 - 끝

‘우연’아닌 ‘인연’이기에 다시 친견할 수 있었던 달라이라마

티베트망명정부 총리에 달라이라마 친견 의사 전해…인도 방갈로아서 친견
연기·공 주제로 장시간 대화…환영의 뜻으로 직접 목에 ‘까타’ 걸어주며 축원
인도 순례 중 바라나시 티베트대학서 재회…인연 닿으면 다시 만나길 기약

1)이상규 변호사 부부가 인도 바라나시 티베트대학에서 달라이라마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2)달라이라마가 이상규 변호사에게 까타를 걸어주며 축원했다.
1)이상규 변호사 부부가 인도 바라나시 티베트대학에서 달라이라마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2)달라이라마가 이상규 변호사에게 까타를 걸어주며 축원했다.

나는 티베트 정부의 대표이며 불교의 수반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정신적 지도자로 추앙받고 있는 달라이라마를 독대해 보고 싶은 생각이 났다. 마침 뉴델리에 주재하고 있는 티베트 망명정부 총리와 친분이 있었기에, 그를 통해서 교섭을 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그에 미치자, 곧바로 그에게 나의 의사를 이메일로 보냈다. 그는 하루도 지체하지 않고 바로 답신을 보냈다. 달라이라마의 비서실장인 텐진 탁라(Tenjin Takla)에게 나의 희망을 알렸으니, 그로부터 연락이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로부터 약 2~3일 뒤에 비서실장 탁라로부터 이메일이 왔다. 교통이 불편한 달람살라까지 올 수 있는지, 온다면 언제를 선호하는지를 묻는 내용이었다. 나는 2004년 12월 초순에 친견하였으면 좋겠다고 알렸다. 약 2주가량 뒤에 메일이 왔는데 2004년 12월4일에 달람살라에서 달라이라마를 독대하는 것으로 결정하였으니 그 직전에 구체적인 절차를 알리겠다는 내용이었다. 나로서는 퍽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굳이 2004년 12월 초로 정한 것은 2004년 5월 1일부터 나의 환태평양변호사회(IPBA) 회장 임기가 시작되고, 그해 10월 칠레의 수도 싼티아고에서 IPBA 이사회가 있어, 그 회의에 참석한 뒤에 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해 9월 중순쯤 되어 탁라실장으로부터 메일이 왔다. 달라이라마께서 12월4일 만남 장소를 달람살라가 아닌 인도 남부의 방갈로아 쉐라톤호텔로 변경하자는 것이었다. 그곳에는 비행장이 있어 교통상 불편이 없을 것이니 의사를 물어보고 내게 별 불편이 없다면 장소를 바꾸고, 숙소도 같은 장소로 예약을 잡아드리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나로서야 불감청(不敢請)이나 고소원(苦所願)이었다. 나는 즉시 좋다는 회신을 보냈다. 알고 보니, 초기 티베트 난민들 대부분 달라이라마께서 주석하시는 달람살라에 모여 살지만, 날이 갈수록 수가 증가하자 인도정부는 남부 방갈로아에서 가까운 산악지대를 구획하여 그곳에서 살도록 하였다. 그곳에 망명인 숫자가 상당하기 때문에, 달라이라마께서는 주로 동계에는 방갈로아에서, 나머지 기간은 달람살라에서 묵으시는데, 방갈로아에서는 쉐라톤호텔의 별관을 쓰시는 예가 많은 것 같았다.

나는 방갈로아 주변 관광도 겸하여 이틀 전인 12월2일 늦은 오후 호텔에 들었다. 다음 날 방갈로아의 명소 중 오래된 성청(省廳) 건물과 그 정원을 비롯하여 박물관, 영국이 통치하던 때의 차(茶) 제조창 등을 둘러보고 돌아갔다. 저녁 식사시간이 되어 식당으로 내려갔다. 꽤 넓은 식당 약 3분의 1 정도를 티베트 승복을 입은 승려들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짐작컨대, 달라이라마의 수행원과 경호원들인 듯 싶었다. 그들과 조금 거리를 두고 앉았는데, 평복을 한 5~60대 가량의 티베트 사람이 우리 쪽으로 오더니 혹시 한국에서 온 아무개 아니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답하자, 그는 탁라 실장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면서 달라이라마를 모시고 옆 별관에 묵을 예정이기에 내일 오전 10시 그 방의 입구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이튿날 아침, 우리는 약속시간보다 20분 전쯤에 방을 나서서 엘리베이터 앞으로 갔다. 조금 있자니 티베트 승려 한 분이 역시 엘리베이터 앞으로 오더니 나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한국에서 온 이상규씨 아닙니까?”라고 했다. 그의 이름은 ‘집텐 듬파’로 달라이라마의 영어통역이었다. 그의 이름을 들은 나는 “혹시 영국 옥스퍼드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신 분 아닌가?”라고 하자, 그렇다고 했다. 그는 티베트 승려로 옥스퍼드대학에 유학하여 불교철학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었다. 함께 별관 2층으로 가니, 인도 경찰이 철제탐지기를 설치해놓고 출입자를 엄중히 검색하고 있었다. 소지품 검사까지 마치고서야 비로소 들어갈 수 있었다. 

앞을 보니 저 멀리 이미 달라이라마께서 나와 서계셨다. 가까이에 이르자 달라이라마께서는 환영의 말과 함께 우리의 손을 맞잡았다. 내가 3배를 올리려 하자 한사코 거절하셔서 결국 1배로 끝내야 했던 것이 아쉽다. 티테이블을 앞에 놓고 둘러앉은 우리는 이것저것 이야기 하다가, 결국 연기(緣起)와 공(空)으로 화제가 바뀌어 흥미진진한 대화가 이어졌다. 그러자, 탁라실장이 오더니 “대중집회에 나가실 시간이 촉박합니다”라고 하자 달라이라마께서는 장난끼 어린 눈으로 “내가 저 사람 때문에 못 살아요”라고 했다. 그리곤 실장에게 신호를 보냈고 실장은 옆방으로 가더니 하얀 두루마리 두 개를 들고 나왔다. 달라이라마께서는 그 중 하나를 집어 펴시더니 내 목에 걸어주셨는데 내 키보다 훨씬 길어 땅에 닿았다. 나머지 하나는 내자의 목에 걸어 주셨다. 그것은 ‘까타’라는 것으로, 티베트에서는 환영의 뜻으로 진객(珍客)에게 걸어주는 것이다. 길이와 만든 소재에 따라 세 가지가 있는데 우리가 받은 것이 가장 상품이라고 했다. 방에 돌아와 보니, 우리의 까타는 씰크 소재에 티베트어로 경문과 불교에서 쓰는 여러 고동이나 기구가 정성스레 직조되어 있어 아주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지금도 방에 걸어놓고 가끔 그때를 연상한다.

다음 여정을 위해 짐을 챙기고 떠날 채비를 한 다음, 식당에 내려가 이른 점심을 들었다. 우리는 모처럼 방갈로아까지 왔으니 세계적으로 유명한 불교 유적지 아잔타석굴을 순례하기로 했다. 데칸고원에 있는 아잔타와 엘로라 석굴을 가려면 우선 방갈로아에서 항공편으로 뭄바이를 거쳐 아잔타 석굴의 관문격인 아울랑가바드까지 가야했다. 서둘러 공항으로 가 체크인을 마치고 탑승구역으로 옮겨갔다. 그런데 30분 이상이나 지났는데도 탑승은 고사하고 지연설명조차 없다. 하기야, 인도에서는 떠나야 떠나는 것이고, 도착해야 도착한 것으로 알라는 정도이니 알만한 일이다. 약 두시간을 기다린 끝에 겨우 비행기에 탑승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륙하여 예정대로 뭄바이를 거쳐 아울랑가바드 공항에 밤중에 도착했다. 밤중에 예약된 호텔에 들어 옷만 갈아입고 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달라이라마가 이상규 변호사에게 선물할 책에 서명을 하고 있는 모습.
달라이라마가 이상규 변호사에게 선물할 책에 서명을 하고 있는 모습.

다음날 9시에 출발할 것으로 가이드와 약속했기에 식당에서 조반을 들고 있었는데 가이드가 찾아와 출발준비가 다 되었다고 말하는 것 아닌가? 그에게 어제 밤에 늦게 왔기 때문에 조반이 조금 늦었으니, 라운지에서 조금만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다. 우리가 찾아가려는 아잔타석굴은 기원전 1~2세기에 조성된 전기서굴과 5~7세기의 후기석굴로 나뉘는데, 전기의 것이 전형적인 아잔타석굴이고, 후기의 것은 엘로라석굴이라 불렸다. 석굴은 8세기경부터 인도불교가 쇠퇴하면서 잊혀졌다가 1819년 호랑이사냥에 나섰다 길을 잃은 동인도회사 소속 영국 장교에 의하여 넝쿨 속에 묻힌 채 발견됐다. 중수과정을 거쳐 오늘날 보는 바와 같은  번듯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약 3시간을 달려 도착해 입장권을 산 다음 석굴 쪽으로 올라갔다. 한참을 올라가니 석굴로 통하는 문이 있는데 입장권을 제시하고 들어가야 했다. 입장하려는 관광객의 줄이 족히 10m는 돼 보였다. 걱정을 하자, 가이드가 “단체로 온 사람들의 줄이고 우리는 그냥 들어가면 되니 걱정할 것 없다”고 안심시켜주었다. 

석굴은 19호까지 있었는데, 밧줄 하나에 의지하여 절벽에 매달려 어떻게 저런 엄청나고 정교한 일을 해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석실을 파 들어가면서, 기둥부분을 남겼다가 정교하게 깎아 낸 것이라거나, 석실 안에 불단을 만들고 연화대 위에 불상을 모신 것은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아잔타석굴을 모두 관람한 다음, 엘로라석굴이 있는 곳으로 옮겨갔으나, 그곳은 아잔타석굴에 비하여 수 세기 늦게 조성된 것이지만, 아잔타 것만 못한 것으로 보였다.

석굴 순례를 마치고 비행기에 몸을 싣고 바라나시를 향하여 떠났다. 바라나시에 도착하자 우리는 바로 호텔을 찾아 체크인하고 점심식사를 했다. 잠깐 쉰 우리는 어둡기 전에 녹야원 참배를 다녀오려고 서둘러 호텔을 떠났다. 그런데 호텔을 나서 10분 쯤 되었을 무렵에 반대편에 다섯 대의 흰 승용차가 티베트 국기를 달고 이 방향으로 오고 있는데, 도로변에는 주민들이 나와  합장하고 어떤 이는 티베트 국기를 흔들고 있지 않는가! 나는 직감적으로 달라이라마께서 오신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사르나트에 도착하여 녹야원에 들어가기에 앞서 나는 기사에게 우리가 녹야원에 있는 동안에 자동차에 누가 탔는지, 혹시 달라이라마가 오셨다면 지금은 어디에 머물고 계시는지 등을 알아달라고 부탁하였다.

녹야원을 참배하고 나오니 기사는 이미 와 있었다. 그는 “자동차 행렬은 달라이라마께서 오신 것이고, 지금은 티베트 불교대학의 객사에 머물고 계신다”고 했다. 나는 곧 그쪽으로 가지고 말하자 가이드는 불만스럽게 거기는 무엇하려고 가느냐, 가도 어짜피 만나지 못한다고 말했다. 나는 가자고 우겼고, 그쪽으로 갔다. 티베트대학의 정문은 굳게 닫혀있고 안에서는 서너 명의 군경이 경비에 임하고 있었다. 대문 앞은 인산인해(人山人海)였다. 오체투지하고 있는 사람, 혹은 합장하는 사람, 또는 불경을 독송하고 있는 사람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대문 가까이 가서 경비소 안의 직원을 불러내었다. 나는 “한국에서 온 아무개인데, 미안하지만 안의 탁라 비서실장에게 그 뜻을 전해달라”고 청했다. 그는 바로 안으로 뛰어가더니 얼마 있지 않아 탁라실장과 함께 나왔다. 그는 나를 보자 반가워하면서, 어찌된 일인지 물었다. 나는 성지순례차 나왔음을 알렸다. 그는 달라이라마께서는 피곤하여 이미 잠자리에 드셨으니, 내가 보드가야로 가는 내일 아침 8시 반쯤에 다시 와서 달라이라마를 친견하면 어떻겠는지 물었다. 그러기로 하고 그날은 헤어졌다.

다음날 보드가야로 가는 중에 티베트대학에 들렸더니 탁라실장은 이미 나와 있어,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결국 달라이라마를 다시 만나 뵙게 되었다. 달라이라마께서는 어찌된 일인지 물으시어, 나는 어제 비행기의 연발로 인하여 우연히도 달라이라마의 자동차행렬을 만나게 되었고, 이처럼 친견하게 되었다고 말씀드렸다. 그는 “‘우연’이 어디에 있겠느냐, ‘인연’인 까닭 아니겠느냐고 했다. 우리는 ‘인연’에 관하여 한참동안 대담할 수 있어 매우 뜻깊은 만남이 되었다. 인연이 닿으면 다시 만나기를 기약하고 헤어졌다.

이상규 변호사, 전 고려대 교수 


본지 필진 이상규 변호사가 8월16일 세연을 접음에 따라 고인이 남긴 유고 ‘달라이라마 친견’을 끝으로 연재를 마무리짓습니다. 연재를 이어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유가족들에게 감사드리며 고인의 극락왕생을 거듭 발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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