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46. 막고굴 제308굴 ‘석굴로 들어가는 행각승’

기자명 오동환

버거운 등짐에도 얼굴엔 전법의 기쁨 가득

경전 짊어지고 호랑이가 지키는 도상 옆 방제엔 ‘보승여래도’
신라 무루·당 현장 스님·고원 넘나들던 달마다라 존자일 수도
벽화 속 행각승은 부처님 세계로 들어서는 모든 구법자 상징 

1)막고굴 제308굴 행각승도. 2)국립중앙박물관소장 행각승도. 3)기메박물관소장 행각승도.
1)막고굴 제308굴 행각승도. 2)국립중앙박물관소장 행각승도. 3)기메박물관소장 행각승도.

막고굴 제308굴은 수나라 때에 처음 조성되었지만, 11세기 전반 돈황을 장악했던 회골(回鶻)인이 다시 벽화를 장식하였다. 

주실로 들어가는 통로의 한 벽에는 왠지 친근한 모습의 인물이 그려져 있다(사진1). 챙이 넓은 삿갓, 몸에 들러붙은 옷, 동여맨 허리와 다리, 발이 드러난 나막신, 검게 그을린 얼굴 등의 행색에서, 먼 길을 떠나온 흔적이 보인다. 그가 짊어진 짐엔 뭔가 둥글게 말린 것들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이 사람은 마치 둥그스레한 얼굴에 기쁨이 가득한 표정으로, 석실 안으로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 모습이다. 곁을 지키고 있는 동물마저도 동그랗게 뜨고 석실 안을 들여다보는 눈에서 친근함이 느껴진다. 

그러나 퇴색한 화면으로 인해 모습이 뚜렷하지 않다. 구체적인 정황이 궁금하다면,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비슷한 구도의 장경동 출토품을 보자(사진2). 

화면에서 보이는 인물은 드러난 가슴이나 얼굴에 가득한 주름에서 여정에 찌든 행색이 엿보이고, 등에 빼곡히 짊어진 경전 두루마리가 피로함을 더한다. 그 곁에 해맑은 표정의 동물은 외양이 영락없는 호랑이다. 그의 머리 위로는 한 부처님이 구름을 타고 마치 이 인물을 위호하는 듯하다. 308굴 통로의 인물도 그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뚜렷한 팔자주름이 보인다. 세월이 만든 퇴색이 본래와는 사뭇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낸 것이다. 

‘행각승도(行脚僧圖)’라 불리는 이 도상은 석굴 벽화뿐 아니라 장경동에서도 12폭의 작품이 발견될 정도로 돈황에서 꽤 유행하였다. 행각승이란 도처를 돌며 도를 구하는 스님을 말한다. 도상에서 일관되게 표현되는 모습이 여행자의 행색과 장비를 갖춘 채 어디론가 가고 있는 측면상으로 그려지기 때문에 명명된 것이다. 

미술사학자 김혜원은 이러한 “걷는 모습의 아이콘”이 도상의 핵심임을 지적하였다. 이 도상이 과연 누구를 모델로 한 것인가에 대해서 현장법사, 티베트 존자 달마다라(達磨多羅), 화엄장자 이통현, 심지어 각지를 돌며 변문공연을 하는 서역인 등등 의견이 분분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행각승도의 방제(傍題)에서 확인되는 ‘보승여래(寶勝如來)’라는 명호다. 도상에서 행각승의 머리맡에 등장하는 여래가 곧 보승여래이며, 행각승의 칭명염불에 응하여 그를 위호한다는 것이다. 장경동 작품들을 비교하면 행각승의 위상이 갈수록 승격하여 행각승을 곧 보승여래의 화현으로 인식하는 추세가 확인된다. 오대(五代, 907~960)에 중수된 막고굴 제45굴에 그려진 행각승도에는 ‘호랑이를 조복시키고 널리 다니며 중생을 제도하시는 보승여래에게 귀의합니다’라는 방제가 적혀있다. 

이와 관련한 신라승 무루(無漏)의 행적이 흥미롭다. 

안사의 난(755)이 일어났을 때, 황제 숙종은 지금의 샨시[山西] 지역으로 피난하였다. 그가 어느 날 꿈에서 금빛 몸을 한 스님이 보승여래를 칭념하는 모습을 보았다. 주위에 물어보니 인근 지역인 지금의 닝샤[寧夏]의 하란산에서 무루 스님이 항상 보승여래를 칭념하며 수행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승전(僧傳)에 의하면, 무루는 원래 인도 구법길에 나섰다가 총령(葱嶺)에서 중생교화를 하고 관음보살을 응험하기도 했다. 무루는 돌아오는 길에 하란산에 머물렀던 것인데, 그의 법력이 황제에게까지 전해진 것이다. 숙종은 곧 무루를 불러 밀교대사 불공(不空)과 함께 머무르게 하고 기복을 청했다고 한다. 이 기록은 당시 무루의 명성이 보승여래에 대한 칭명염불 신앙을 매개로 총령에서 산서성에 이르는 서북지역에 널리 퍼졌음을 방증한다. 그렇다면 행각승도의 모델이 신라승 무루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는 행각승도를 보면서 등에 가득 진 경서들에 눈길을 주게 된다. 

기메박물관이 소장중인 행각승도를 보면 그 인상이 극대화된다(사진3). 행각승의 등에는 자신의 몸보다도 더 크고 많은 경전이 그의 온몸을 짓누르고 있다. 그는 ‘사진2’에서 보는 것처럼 연륜이 쌓인 인물이 아닌 현실에서 볼 법한 젊은 스님이고, 그의 다리는 구름 위에 있는 것도 아니다. 경서의 무게는 성큼성큼 앞으로 내딛는 그의 발바닥을 통해 현실의 땅에 그대로 각인된다. 삭발한 머리가 자라고 수염이 듬성듬성한 얼굴에 피로가 엿보이지만, 그의 눈길은 오직 나아갈 방향만을 향하고 있다. 그가 의지하는 것은 오직 오른손으로 염주를 굴리면서 염불을 하는 것이다. 무시무시하게 부릅뜬 눈을 하고 동행하고 있는 호랑이의 모습에서 그의 결기가 중첩된다. 

생각해보면, 이 행각승은 황막한 땅을 지나 인도로 구법을 떠났다 돌아오는 현장법사일 수도 있고, 험준한 고원을 넘나들며 법을 전한 달마다라 존자일 수도 있고, 화엄경전의 심오한 뜻을 풀이하여 대중에게 알리고자 한 이통현 장자일 수도 있으며, 경전을 이야기로 풀어 재미있게 전하는 변문공연자일 수도 있다. 이 땅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불법을 짊어진 채 오고 갔던가. 지금은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전법에 힘쓰고 있는가. 그림에서 전하는 그의 모습에서 불·법·승 3보의 뜻이 자연히 체감된다. 

이제 다시 막고굴 제308굴 문전으로 돌아가 보자. 통로의 행각승은 오랜 여정 끝에 마침내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서는 구법자이다. 동시에 그는 등에 짊어진 경전으로 부처님의 세계를 이 땅에 구현할 설계자다. 바래진 벽면을 통해 전달되는 그의 즐거운 표정은 오독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동환 중국 섬서사범대 박사과정 duggy11@naver.com

[1709호 / 2023년 12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