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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개화산에서-박철

기자명 동명 스님

낮은 산이 더 오래된 산이다

산도 나이 들면 작아질 수도
낮다고 주눅들 일 아님 강조
재롱과 훼손도 말없이 수용
낮은 산 많으면 살기도 좋아

히말라야를 다녀왔다는 한 사내가
껌을 밟고 섰듯 우렁차게 먼 이야기를 하지만
사실 낮은 산이 더 오래된 산이다

조용한 산이 높은 산이다
눈보라에 이것저것 다 내주고
작은 구릉으로 어깨를 굽히고 앉았으나
부러울 것 없네 손자 손녀도 우습게 매달리고
때론 사이클 탄 이가 우주로 떠오를 듯 달려나가기도 하니

언덕에 섰는 갈참나무나 자귀나무도 마음이 연해
별다른 벌레들 기어들지 않고
청설모며 족제비가 종갓집을 이루는 터
내가 오늘 먹을 걱정에 터벅거리며 산을 내려오자
산은 슬며시 나의 옷깃을 잡으며
곧 볍씨 뿌리는 들판이 될 것이라 귀띔을 한다

따뜻한 바람을 모아 군불 지피는
끝내 고향이 되어버린 아우 같은 산
머리 긁적이며 돌아보니 오솔길은 발장난을 치고
묵은 꽃향기 수북이 손등처럼 쌓여 있다
(박철 시집, ‘작은 산’, 실천문학사, 2013)

작은 산과 큰 산 중에서 누가 더 오래되었느냐는 질문에 정답을 말하기는 힘들다. 히말라야에서 소금이나 조개무지가 나오는 것은 히말라야가 먼 옛날에는 바다였음을 말해주지만, 그것이 히말라야가 언제부터 산이었는지를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낮은 산은 오랜 세월 중력에 의해 조금씩 낮아져서 지금의 높이가 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시적 진실로는 높은 산보다 낮은 산이 오래된 것일 수 있겠다. 사람이나 짐승도 늙어가면서 키가 작아지듯이, 산도 나이가 들어 키가 작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낮은 산이 더 오래된 산이다”라며, 낮은 산이라고 주눅들 일 아니라고 말한다.

시인은 또 ‘조용한 산’이 높은 산이라고 말하는데, 조용한 산은 사람들의 장난과 재롱과 훼손과 이용을 말없이 수용해주는 산을 말한다. 시인에게 ‘높은 산’이란 해발이 높다는 뜻이 아니라, 그 덕이 높다는 뜻이겠다. 참으로 ‘덕 높은’ 낮은 산은 “눈보라에 이것저것 다 내주고/ 작은 구릉으로 어깨를 굽히고 앉았으나/ 부러울 것 없네 손자 손녀도 우습게 매달리고/ 때론 사이클 탄 이가 우주로 떠오를 듯 달려나가기도 하니” 사람들의 희로애락과 생사윤회를 보듬어준다.

김포에 몇 년 있으면서도 개화산을 가지 못했다. 개화역에는 몇 번 가보았으나 개화산이라는 존재도 잘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낮은 구릉 같은 산이기 때문이리라. ‘김포평야’라는 이름에 걸맞게 김포에서는 이렇다 할 산이 잘 보이지 않는다. 중앙승가대 뒷산인 금정산은 매일 가다시피했는데, 해발 240미터다. 산이라기보다는 언덕, 구릉 정도로 보인다. 그래도 사람들은 등산화에 스틱까지 짚고 산을 오르고 내린다. 풍무동과 산 너머 인천 불로동 사람들은 금정산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낮은 산이야말로 “따뜻한 바람을 모아 군불 지피는/ 끝내 고향이 되어버린 아우 같은 산”인 것이다.

광명 금강정사에서 살 때는 구름산을 자주 올랐는데, 구름산 전망대에서 개화산이 보였다. 구름산도 해발 240미터인데, 구름산은 김포 금정산에 비하면 넓어서 작게 느껴지진 않는다. 개화산이나 금정산이나 구름산 같은 낮은 산들은 대체로 “언덕에 섰는 갈참나무나 자귀나무도 마음이 연해/ 별다른 벌레들 기어들지 않고/ 청설모며 족제비가 종갓집을 이루는 터”이다.

우리나라가 살기 좋은 것은 어쩌면 정답고도 편안한 낮은 산이 많아서일 것이다. 산은 험한 겨울바람을 막아주고, 시원하거나 아늑한 쉼터가 되어주며, 운동할 수 있는 체력단련장 역할도 하고, 계곡을 통해 뭇 생명체에게 맑은 물을 내려보내 주기도 한다. 우리나라 어느 지역에서든 어느 산을 가도 “머리 긁적이며 돌아보니 오솔길은 발장난을 치고/ 묵은 꽃향기 수북이 손등처럼 쌓여” 우리들의 마음까지 향기롭게 하는 그런 곳이 있으니, 개화산 같은 낮은 산이 많아서 한국은 살기 좋다.

동명 스님 시인 dongmyong@hanmail.net

[1711호 / 2024년 1월 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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