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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보문사 주지 지범 스님

“원력과 신심 있는 곳에 ‘반야의 꽃’ 피어납니다!”

광주 버스정류장서 만난
정진 스님 은사로 ‘출가’

출가 후 마주한 어머니
“서산 같은 도인 되시라”

명성 높은 스님 못되어도
좌복 위서 죽은 수좌 다짐

무문관 수행 중 자살 충동
짐 나르는 개미 보고 ‘화두’

보문사 주지 맡은 후부터
20여 년 동안 선객 품어

재가자 참선 지도에 심혈
도심 수행도량으로 정평

출·재가 수행처 보문선원
‘선풍 진작’ 활력 불어넣어

산과 도심·승·재가 ‘불이’
“대중 시봉에 더 힘쓸 터”

보문사 주지 지범 스님은 “주지로 살면서도 대중과 함께 호흡하고 있으면 외부에서의 공양도 함부로 할 수 없다”며 “대중 처소가 극락”이라고 강조했다.

‘산은 어진 사람에게 길을 열고(山開仁者路)/ 물은 지혜로운 사람에게 마음을 씻어준다.(水洗智人心)/ 맑은 경쇠소리 어디서 들려오는가(淸磬從何處)/ 작은 암자는 숲속에 가려 있겠지.(小庵隱樹林)’(설담 스님의 시 ‘방부용암·訪芙蓉庵’ 전문)

부용암을 찾아가는 설담(雪潭·1741∼1804) 스님의 걸음이 가벼워 보인다. 만행(萬行) 길에서 체득한 깨달음이 있었기에 산과 물이 내어놓은 길을 따라 무심히 걷고 있을 터다.

선어록에서 보듯 오도기연(悟道機緣)은 언제 어느 곳에서든 일어난다. 밥을 짓다가도, 기왓장 깨지는 소리에도, 날아가는 들오리 떼를 보는 순간에도 확철대오 한다. 가만 보면 깨닫기 직전에 스승의 ‘일갈’이 있었다. 하여 중국 당송 시대의 선사들은 선지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거나 법거량을 나누려 만행 길에 올랐다. 

한국의 운수납자(雲水衲子)도 해제와 함께 임운(任運)의 걸음을 뗀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면 자연스레 절에 들었고, 주지 스님은 미소로 맞으며 방을 내어주었다. 선객이 다시 길을 나설 때면 “어느 절에 가면 큰스님 계시다”는 정보와 함께 그 절에 닿을 때까지 쓸 최소한의 여비라도 챙겨 주었다.

운수납자라고 해도 도시에 들어서면 다소 막막하다. 도심 사찰·포교당의 건축 구조상 선객이 머물 공간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서울 상도동 보문사를 떠올리곤 한다. 선객 시봉을 극진히 한다고 소문 난 지범(志梵) 스님이 주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문사 주지를 맡은 2001년부터 지금까지 20여 년 동안 한 해 평균 150여 명의 선객을 품었다. 

1978년 부친이 유명을 달리했다. 그 직후 가세가 급격히 기울더니 형님도 병마와 싸우다가 돌아가셨다. 번민으로 긴 겨울밤을 뜬 눈으로 보내고는 서울에서 광주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고창 선운사의 한 암자에서 만난 노장 스님이 전한 얘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너는 출가해야 한다. 나주 다보사에 우화(雨華) 스님이 계신다. 가 보라!”
 
‘천진 도인’으로 불린 우화(雨華·1903~ 1976) 스님은 덕숭 문중의 운봉성수(雲峰性粹·1889∼1946) 스님 제자다. 노장 스님에게 출가 이야기를 듣고는 두 달 동안 암자에 머물렀는데 마음이 참 편했었다.

광주 버스터미널에 내려서는 ‘어디로 가야 하나?’ 망설이던 중 함께 있는 두 스님을 만났다. 한 분은 서울 도봉산 천축사 무문관에서 6년(1972∼1978)을 수행한 원공(圓空) 스님이었고, 다른 한 분은 우화 스님의 상좌 정진(正進) 스님이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정진 스님은 “큰스님은 입적에 들었으니 서산사로 가 보라”고 권했다. 곡성 서산사, 울진 수진사 등에서 행자 시절을 보낸 후 범어사에서 사미계를 받았다.(1979) 

은사 인연은 광주 버스터미널에서 만난 정진 스님과 맺었다.

출가 후 처음으로 어머님을 선운사 도솔암에서 마주했다.(1980)

“눈물을 흘리시며 제 손을 잡으셨습니다. 그때 ‘기왕 출가했으면 서산대사 같은 도인이 되어달라’고 하시며 3만 원을 손에 쥐어 주셨습니다. 이후 1985년 해인사 선원에서 여름 안거를 보낼 때 작은 누님과 매형, 어머님이 함께 찾아오셨으나 만나지 않았습니다. 25년 후 어머님의 부고를 받고 장례식장에 잠시 들러 ‘반야심경’을 독송했습니다. 명성 높은 스님은 못 되어도 ‘그 스님 공부하다가 좌복 위에서 죽었다’는 소리는 듣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정진에만 몰두하다 보니 ‘나는 수행자’라는 상(相)이 생겼는데 칠불사에서 거뒀다. 선방 수좌스님들이 ‘칠불사가 사람 만들었다’고 했을 정도다.(1987) 

“칠불사 선원에서 저는 ‘하루 1종식 12시간 정진’을 하고 있었습니다. 새벽 정진 후나 저녁 방선 때면 거의 모든 대중이 법당이나 문수전에서 절을 했습니다. 달빛 좋은 어느 날, 늦은 밤까지 절을 하고는 선방으로 들어섰습니다. 이 시간이면 아무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수좌스님들이 탑처럼 줄지어 앉아 있었습니다. ‘나만 애써가며 공부하는 게 아니구나!’ 침묵 속 치열함을 여실히 느꼈습니다. 새로운 신심이 솟았습니다.”
 

정진 스님(왼쪽)은 ‘보현보살’로 칭송받았다.

자비심도 자연스레 차올랐을 터다. ‘사람 만들었다’는 말은 진정한 수행자로 거듭났음을 뜻할 터다.

계룡산 대자암 무문관이 개원하자 곧바로 걸음 했더랬다. 선친의 묘에 절을 올리며 이별을 고하고 어머님 집 앞에서도 삼배를 올렸다.(1993) ‘이번에 끝내지 못하면 죽으리라’는 당찬 각오를 다졌음이다.

“세속 나이 40에 가까워졌던 때입니다. 공부 시늉만 하다가 인생 마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불현듯 일었습니다. 면도기로 눈썹을 밀고 좌복에 앉았습니다.” 

두 달 동안 애를 쓰니 엉덩이가 헐고 헐어 진물이 나더니 급기야 피와 진물이 방석에 덕지덕지 붙었다. 코피 또한 마를 날이 없었다. 날은 무더웠고 몸은 쇠약해 질대로 쇠약해졌다. 자살 충동까지 일었다.

“앉는 걸 포기하고 옆으로 누웠습니다. 그때 문틈 사이로 개미들이 짐을 나르고 있었는데 버거웠는지 바닥으로 자꾸 떨어졌습니다. 석양빛이 무문관 안으로 새어 들어올 즈음에 개미들은 그 짐을 모두 옮겼습니다. ‘미물도 해내는데 장부가 여기서 포기할 수 있나!’ 다시 화두를 들었습니다.”

열정은 있으나 자비심이 부족했다고 판단한 지범 스님은 불보살님을 그리며 매일 천배를 올렸다. 화두가 다시 성성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엉덩이의 진물도 아물고 코피도 멈췄다. 몇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니 환희가 절로 났다. 죽으러 간 지범 스님을 무문관은 생생하게 살려 보냈다. 

은사 정진 스님의 갑작스러운 입적으로 보문사 주지를 맡았는데 결제 철이면 선원으로 돌아갔다.

“선지식과 도반이 늘 그리웠습니다. 도시 생활 적응에 어려움을 겪다 2005년 봄날 쓰러졌습니다. 병원에 누워있는 동안 주지로서 살아온 삶을 차분하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재가불자들이라도 정진 중에는 일주문 밖으로 한 걸음도 못 나가게 하고, 대중들의 라면 공양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공부를 가장 소홀히 했던 사람은 저였습니다.”

적어도 1년에 한 번은 꼭 선원에 방부를 들였다. 

보문사는 운수납자들의 ‘쉼터’를 자청했다.

“예로부터 주지는 절 살림이 어려워도 선객에게는 성의를 다했습니다. 일례로 열 명의 대중이 사는 절에 한 선객이 들면 열 명의 밥에서 한 숟가락씩 덜어서는 밥 한 그릇을 더 만들어 공양케 했습니다. 십시일반(十匙一飯)의 유래입니다. 떠나는 선객에게는 다음 절까지 걸어갈 수 있도록 짚신 한 짝 값을 주었습니다. 선어록에 ‘짚신값을 허투루 쓰지 말라’는 대목이 있는데 이는 헛된 행각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보문사 역할을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쉼터’라기보다는 ‘휴식터’입니다. 나무(木) 아래 앉은 사람(人)이 자신(自)의 마음(心)을 들여다보는 ‘휴식(休息)’ 공간입니다.” 
 

80여 명의 불자들이 산이 되어 정진하고 있다.
80여 명의 불자들이 산이 되어 정진하고 있다.

보문사는 운수납자들의 휴식터만은 아니었다. 주지 취임 직후부터 재가불자들을 위해 참선법회와 철야정진, 자유정진 등의 다양한 법석을 제공했다. 선지식 친견이 어려운 점을 고려해 내로라하는 선사 초청 법회도 열어왔다. 그러나 낡은 시설과 선방 부재로 주방이나 거실 등에서 정진해야 했다. 선객들 또한 오랫동안 머물 수 없었다.

“출·재가자가 함께 머무르며 정진할 수 있는 선원을 늘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보문사 사무장은 물론 도반들도 ‘도심 선원은 성공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2018년 동안거를 맞이해 화엄사 선등선원에 입방해서는 ‘선원을 지을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를 놓고 100일 정진에 들어갔습니다. 방선 후엔 각황전으로 내려가 아침저녁으로 오백배씩 하루 천배를 올렸습니다.”

회향을 이틀 앞둔 날 새벽 각황전 바닥에 쓰러졌다. 아니, 잠시 꿈을 꾼 것일 수도 있다. 선명한 목소리가 들렸다.

“지범 수좌. 선원 불사를 하시게!”

동안거 해제 후인 2019년 5월 5일 ‘1차 선원불사 1029일 기도’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해 말 ‘코로나19’가 급습했다. 누가 보아도 보문선원 불사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지범 스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원력과 신심 있는곳에 반야의 꽃이 피어납니다. 그러기에 난관은 있겠으나 결국 극복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또한 불보살님의 가피가 있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2022년 10월 보문선원이 문을 열었다.

보문선원 불사는 2021년 4월 시작됐고, 2022년 10월 회향했다. 연 면적 958㎡(290평),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다. 출·재가자가 정진할 각각의 공간과 재가불자를 위한 법당, 그리고 선객을 위한 1인 1실의 방 8개를 구비하고 있다. 

“보문사에 잠시라도 바랑을 풀었던 수좌스님들의 정성이 답지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재가불자님들의 시주도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수불 스님을 비롯한 143명의 사부대중이 후원해 주어 선원을 개원했습니다.”

절을 찾은 선객의 편의를 위해 성의를 다했었다. 선객에 줄 여비를 마련하려 갖고 있던 토굴도 처분했더랬다. 재가불자들에도 선의 일미를 맛보게 하려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 지고지순한 마음을 사부대중은 헤아리고 있었음이다. 

올해 동안거를 맞이해 스님 여덟 분과 재가불자 80여 명이 정진하고 있다. 재가불자들을 위한 선사 초청 법회는 물론 ‘금강경’ ‘화엄경’ 등의 경전 강의도 열고 있다. 매주 화요일이면 참선과 연관한 소참 법문도 진행한다. 모든 프로그램에서 흥미와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세심히 배려했다. 요가 프로그램이 눈길을 끈다.

“정진은 열정만으로는 안 됩니다. 우선 몸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제 경험으로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야 하기에 척추, 골반, 복부를 지지하는 근육이 튼튼하면서도 부드러워야 합니다. 복식 호흡을 할 수 있으면 금상첨화입니다. 대중에게 익숙한 요가를 적용했는데 효과가 큽니다.”

40여 년 선원 수행담을 적어 간 ‘선원일기’.
40여 년 선원 수행담을 적어 간 ‘선원일기’.

지범 스님은 재가불자들에게 언행일치를 당부한다.

“자신이 한 말과 행동이 일치한 사람은 진실하고 솔직합니다. 수행자는 진솔해야 하고, 진솔할 때 자비심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수행 전후의 가장 큰 변화는 자비스러움입니다. 욕심내고 억지 부리던 사람이 보문선원에서 정진하더니 나눌 줄 알고 시원하게 인정하는 사람으로 변했다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원래 착한 사람이었는데 보문사에 가서 법문 듣더니 더 여유롭고 따듯한 사람이 되었다는 소문도 나야 합니다. 칭찬을 듣기 위함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변화가 정토를 일궈가기 때문입니다.”

지범 스님의 여정을 보면 늘 대중과 함께하려 했다. 

“출가 직후부터 ‘대중에서 제일 못사는 스님이 토굴에서 제일 잘 사는 스님보다 낫다’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대중 처소에서는 잘못 살면 대중이 신장이 되어 경책하고, 대중 속에 수승한 사람이 있으면 따르며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지로 살면서도 대중과 함께 호흡하고 있으면 절 밖에서의 공양 하나도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대중 처소가 극락입니다.”

보문사 곁에 보문선원이 개원됐으니 세월이 더해질수록 지범 스님이 일으킨 청량한 선풍(禪風)은 서울 도심 전역으로 불어 갈 것이다. “산과 도심, 출·재가자가 둘이 아니다”라며 “대중 시봉에 더 힘쓰겠다”는 지범 스님이 굳건히 서 있는 한 제2, 제3의 보문선원도 세워질 것이다. 간화선이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하지만 미래에도 화두는 성성할 것임을 지범 스님은 증명해 내고 있다. 한국선의 희망이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지범 스님은
정진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1979년 범어사에서 사미계를 받았다. 제방선원에서 정진하던 지범 스님은 2001년부터 서울 상도동 보문사 주지를 맡았다. 안거 때는 선원에서 정진한다. 제34회 대한불교조계종 포교대상 공로상을 수상했다.(2022) 저서로는 ‘선원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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