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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롭고 시끄러워도 불성은 늘 밝다

기자명 혜민 스님

2. 깨달음의 상태

꿈 속에서 꿈이 실제아님 알면
어떤 꿈을 꾸든지 자유롭게 돼
깨달음은 안목 변화가 주된 것
일체가 마음이 만든 영상일 뿐

구도의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가장 크게 오해하는 점 중에 하나가 바로 깨달음을 일체의 번뇌가 없이 고요하고 평온한 어떤 좋은 심리 상태라고 상상하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을 하면서 마음이 좀 편안해지는 것 같으면 수행이 잘 되고 있는 것 같다고 여기고, 마음이 생각들로 인해 괴롭고 시끄러우면 수행이 잘 안되는 것 같다고 분별을 일으킨다.

그런데 사실 이런 마음으로 수행을 하는 것은 천상에 태어나 마음 편안하게 잘 살고 싶어 하는 욕망과 별반 다르지 않다. 말로는 수행자라고 하지만 좋은 경계 체험은 붙잡으려고 하고, 괴로운 경계 체험은 저항하는 습관은 일반 사람들과 똑같은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수행을 하는 것은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아무런 차별이 없이 항상 밝은 불성을 깨닫는 일과는 거리가 멀다.

부처님 법이 좋아 절에 다니는 분들을 보면 크게 두 가지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공덕을 많이 쌓아 이 생에서 좋은 복을 누리고, 죽어서는 괴로움 없는 극락세계에 태어나고자 하는 불자가 한 분류인데, 통상적으로 이런 불교를 “기복 불교”라 명칭한다. 다른 하나는 부처님처럼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꿰뚫어 보아 영원한 자유함을 얻고자 하는 불자들이 있다. 이런 불교를 다른 말로 “수행 불교”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첫 번째 그룹의 목표는 편안함과 즐거움에 있고, 두 번째 그룹의 목표는 깨달음과 자유에 방점이 찍혀 있다. 

수행 불교의 길을 걷고 있는 구도자들은 인생에서 진한 무상함을 느꼈거나, 아니면 삶이 가져다 주는 괴로움 때문에 구도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깨달음을 구하는 이유가 바로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결국 영원한 자유보다는 마음의 평온한 상태를 실제로는 더 원한다. 물론 드물게는 실상의 진리를 깨닫고 싶어서 구도의 길을 나서기도 한다. 하지만 진리가 궁금해서 구도의 길을 나선 사람조차도 깨달음에 대한 어떤 환상과도 같은 이미지를 그리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깨달음이란 어떤 고요하고도 좋은 상태를 경험할 것이라고 상상하면서, 마음 안에 생각이 많지 않으면 목표에 가까이 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생각이 많고 집중을 못하면 수행이 잘 안된다고 분별한다.

나 또한 승려가 되고도 한참 동안을 경계에 차별을 두어 깨달음을 어떤 좋은 체험일 것이라고 상상했던 것 같다. 하지만 공부가 익어가면 갈수록 이 접근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왜냐면 깨달음을 통한 변화는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의 변화가 주이지, 괴롭고 시끄러웠던 마음이 고요하고 편안한 마음 상태로 변화하는 것이 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안목의 변화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가?

꿈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 우리는 누구나 밤에 악몽을 꾸는 경우가 있다. 만약 악몽을 꿀 때, 그 악몽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무서운 꿈의 내용이 즐거운 꿈의 내용으로 바뀌면 문제가 해결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방법은 상당히 임시적인 조치일뿐 근본 문제 해결책이라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즐거운 꿈을 꾸어도 어느 순간 또 다시 불안하고 무서운 꿈으로 바뀔 수가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방법은 악몽을 꿀 때 그것이 실제가 아니고 내 의식이 환상처럼 만들어 낸 허망한 꿈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아 버리는 것이다. 꿈 안에서 그것이 실제가 아니고 꿈이라는 사실이 확연해지면 그 깨달음 이후부터는 어떤 내용의 꿈을 꾸든 아무런 상관없이 완전히 자유로워진다. 왜냐면 즐겁고 편안한 꿈이든 괴롭고 무서운 꿈이든 결국 모두 다 실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안목의 변화라는 것은 악몽의 내용을 즐겁고 편안한 꿈의 내용으로 바꾸려는 것이 아니고, 악몽 자체가 실제가 아니고 마음이 만들어 낸 허상이었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는 것을 말한다. 이 점은 우리가 소위 말하는 현실의 세계에도 그대로 적용이 된다. 그래서 지금 눈으로 보이는 일체가 마음이 묘하게 만들어 낸 영상일 뿐, 영상 안에서 보이는 사람들이나 대상들이 각각 분리되어 실체가 따로 있는 존재들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즉 일체 모든 것이 한마음이라는 점이 분명해지면 질수록, 고요하던 시끄럽던, 편안하던 괴롭던 상관 없이 마음은 항상 가벼우면서도 걸림이 없이 완전히 자유롭다.

혜민 스님 godamtemple@gmail.com

[1713호 / 2024년 1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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