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행복과 깨달음에 이르는 비법

기자명 혜민 스님

3. 불성을 깨닫는 길

행복은 지금 주어진 것 외에
더 원하는 마음 없을 때 느껴
무엇인가 해야 깨달음은 오해
일체 조작 멈출때 불성 드러나

어떻게 하면 우리가 행복할 수 있을까? 아무리 오랫동안 궁리해 봐도 방법은 단 한 가지 뿐인 것 같다. 그것은 바로 지금 우리가 이미 행복하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 방법이다. 만약 행복하려고 ‘노력’을 하게 되면, 그 노력을 들이는 한 아직은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게 된다. 왜냐면 노력의 결과로 오는 미래의 행복한 상태와 지금 나 사이에는 시간적인 간격이 존재해서, 그 갭이 있는 한 현재가 불만족스럽게 되어 버리거나, 아직은 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즉, 행복하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당장 행복할 수 있는 경우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반대로 우리 삶에서 지금 내가 감사할 수 있는 일들, 내가 편하고 기분 좋다고 느끼는 것들, 이만해서 다행이라고 여기는 사항들을 손가락으로 한번 세어보자. 몸이 이 정도 건강한 것에 감사하고, 친한 친구를 만나 오늘 점심 맛있게 먹을 수 있어서 좋고, 날씨는 좀 추워도 파란 하늘을 볼 수 있어서 너무도 다행이라고 느낄 수 있다. 즉, 행복은 지금 주어진 것 이외에 다른 더 좋은 것을 따로 또 원하는 마음이 없을 때 느끼게 된다. 주어진 현재를 감상할 줄 아는 능력이 바로 행복의 빈도수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불성은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 있을까? 20대 초반부터 깨닫기 위해 나름 열심히 노력한 결과 찾아낸 오직 한 가지 방법이 있다. 그것은 바로 도달하고자 하는 깨달음이라는 목표에 내가 이미 도달해 있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 방법이다. 즉, 구도자가 찾는 깨달음도 앞에서 말한 행복과 유사해서, 노력을 하면 할수록 도달하고 싶은 깨달음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왜냐면 불성은 내가 노력을 들여 행하는 일체의 모든 조작이 멈추었을 때 비로소 드러나기 때문이다. 노력을 들여 조작을 하고 있으면, 마음이 조작하는 일에 신경을 쓰느라 이미 완벽하게 갖추어진 불성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된다.

초심 구도자가 자꾸 혼동하는 것이 내가 무언가를 해야지만 깨달음이 생길 것이라고 오해하는 것이다. 내가 노력을 들여 고행하지 않으면 깨달음이 오지 않을 것 같은 것이다. 하지만 노력을 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추구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깨달음이라는 출세간의 목표라고 해도 추구심이 있는 한 불성은 드러나지 않는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내가 무언가를 하기 이전부터 이미 불성은 항상 밝아 있고, 인과를 벗어나 있다. 그러기에 내가 들인 노력의 결과로 깨달음이 오는 것이 아니다. 내 노력과 아무런 상관없이 항상 밝아 있는 것을 문득 깨닫는 것뿐이다. 
20대 때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던 가르침이 바로 법성게에 나오는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라는 내용이었다. 처음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마음을 낸 그 순간이 바로 정각의 불도를 이미 다 이룬 순간이라는 의상 스님의 말씀이 전혀 믿어지지 않았다.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진작에 내었지만, 매일 이런저런 생각들로 마음이 늘 복잡했던 나에게 지금 이런 상태가 정각을 이룬 것과 다름없다는 이야기가 말이 안 된다고 느껴졌다. 정각을 이루었다면 마음 안에 번뇌가 다 떨어져 나가 아주 평화로운 상태이지 않을까라고 상상을 했었는데, 그에 반해 내 마음은 복잡하기만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의상 스님의 말씀이 옳았다. 초발심을 냈을 때도 불성은 분명했고, 정각을 다 이루고 나서도 불성은 한끝 차이 없이 분명할 뿐이다. 문제는 모양을 가지고 불성을 판단하려고 했기 때문에 믿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법성게를 보면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 라고 해서, 불성은 이름도 없고 형상도 없이 모든 것이 다 끊어졌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깨달은 사람의 마음은 시끄러운 형상이면 안되고, 평화로운 형상을 가졌을 것이라는 제멋대로 상상을 해서 유무를 판단했으니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눈앞에 아무런 형상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살아서 모든 것을 알고 느끼는 이것이 하나 있다. 텅 빈 이것을 우리는 벗어날 수도, 더럽힐 수도 없고, 없앨 수도 없다. 일체 모든 모양 있는 것들을 다 품고 있지만 그렇다고 어떤 모양에 한정 지어져 있는 것은 또 아니다. 눈앞에 항상 분명한 이것을 문득 깨달아 이거 찾으려고 그렇게 헤메고 다녔다는 사실에 박장대소 하시길 바란다.

혜민 스님 godamtemple@gmail.com

[1715호 / 2024년 2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