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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일상화된 마조선 전개 - 하

기자명 정운 스님

선문답에 쌀 등 일상 물품 등장

‘노동 곧 수행’이라는 관점
중국풍토 맞게 변형된 결과
세속 떠난 불법 의미 없듯
선은 인간 삶 속에서 구현

일상에서의 선은 노동 자체를 수행의 연장, 즉 본래심에 입각한 불행(佛行)이라고 하였다. 마조의 제자인 백장회해(749∼814)에 의해 선사들의 계율인 청규가 제정되었다. 청규 내용 가운데 노동과 관련된 부분이 있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와 보청법은 일상화된 선사상의 면모를 그대로 드러낸다. 일상에서 본래심을 전개하는 움직임[動中] 가운데 고요함[寂靜], 이를 평상심의 연장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오분율장’에 의하면 부처님께서 ‘비록 승려의 규율상 제정한 율이지만 그 나라의 풍습이나 풍토상 어쩔 수 없으면 그 나라의 형편에 따라야 한다’고 되어 있다. 계율도 인간을 위한 것인데 그 나라 문화 풍토에 변경되는 것도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고 본다. 마침 마조계 문하 교단이 발전한 것은 중앙권력이나 귀족들의 도움 없이 시골에서 생활했기 때문이다. 수백 명의 승려들이 함께 머물면서 노동이 자연스럽게 도출되었다고 본다.

이렇게 선을 일상에서 전개하면서 노동과 수행을 동일하게 보는 점이 중국 문화 풍토에 맞도록 변형된 것이다. 현재도 중국·한국에서는 승려들의 노동[운력]을 수행의 한 방편으로 보고 있다. 마조 이후로는 수행자들의 선문답에 차‧쌀‧소금‧간장·만두 등 일상에서 없어서는 안 될 물품들이 등장한다. 

앙산(807∼883)이 어느 승려에게 물었다. “유주(幽州)의 쌀값은 얼마인가?”/ 한 수행자가 찾아와 청원에게 물었다./ “불법의 대의는 무엇입니까?”/“여릉(현 江西省 吉安)의 쌀값은 얼마인가?”

이때부터 ‘여릉의 쌀값’이라는 화두가 유명해졌다. 이 화두는 불법을 묻고자 방문하는 승려가 청원산에 오는 도중에 여릉을 지나왔기 때문에 그렇게 물은 것이다. 아마 그 승려가 다른 고장을 지나왔다면 그 고장의 쌀값이나 소금값을 물었을 것이다. 또 장사경잠(?∼868)의 선문답에도 ‘쌀값은 싸고, 나무는 많으니, 두루 풍족하다’고 하였고, ‘조주어록’에도 ‘소금은 비싸고 쌀값은 싸다’라는 선문답을 통해서도 당시의 선풍을 엿볼 수 있다. 경잠과 조주는 마조의 손자뻘 제자로 모두 남전보원(748∼834)의 법을 받았다. 

어느 지역의 쌀이든 소금이든 간장은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식량이다. ‘수행이라는 것’은 형이상학적인 철학이 아니며 뜬구름 잡는 신통력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선이 전개됨을 말하고 있다. 세속을 떠난 불법은 의미가 없듯 일상에서의 선, 그리고 인간의 삶 속에 선이 구현됨을 볼 수 있다. 그만큼 깨달음이란 저 멀리 있는 형이상학적 철학이 아닌 인간 삶에 있음을 나타낸다. 일상화된 선은 이렇게 현재의 삶을 중시하고, 인간 삶과 밀착된 곳에서 도를 전개하였다. 

마조 문하는 아니지만, 동시대인 용담숭신(782∼865)에게도 일상생활에서의 선이 전개되고 있다. 용담숭신은 출가 전에 떡장사를 하면서 스승에게 떡 공양을 올렸다. 숭신은 출가 이후 천황도오(748∼807) 문하에서 수행하는데, 스승이 불법을 알려주지 않았다. 이에 용담이 스승에게 왜 불법을 알려주지 않느냐고 따지자, 천황이 ‘네가 차를 가져오면 차를 마셨고, 떡을 가져오면 떡을 먹었으며, 밥을 가져오면 밥을 먹지 않았느냐? 그대에게 심요를 보이지 않은 적이 없지 않느냐?’고 하였다. 곧 매일 매일 쓰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그 근원에 입각해 있는지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日用而不知].

앞의 용담 이야기와 비슷한 일화가 우리나라 조선시대에도 등장한다. 벽계정심(?∼?)은 유생들의 눈을 피해 산에서 나무를 해 시장에 내다 팔며 겨우 생활하고 있던 터였다. 제자 벽송지엄(1464~1534)이 찾아와 스승과 함께 생활하며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지엄이 하루 종일 일을 하다가 겨우 짬을 내어 스승에게 도를 물으면, 대답이 한결 같았다. “도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닐세. 행주좌와에 ‘내 마음이 무엇인고?’라고 궁구하게나.” 이렇게 수개월 동안 반복되자, 지엄이 하산하기로 한다. 이때 스승이 쫓아오면서 계속 이름을 불렀다. 그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지엄은 활연 대오하였다. 결국 지엄은 스승이 말한 움직이는 일상생활 속에서 도가 있는 것을 그제야 알았던 것이다.

정운 스님 대승불전연구소장 saribull@hanmail.net

[1716호 / 2024년 2월 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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