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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춘성 스님 (1891년∼1977년)

기자명 권오영

무소유-무애행 일관한 기승

1977년 8월 22일 입적
만해 스님 유일한 제자
당대 최고의 화엄법사


춘성 스님은 만해 한용운 스님의 유일한 제자라는 이력보다는 거침없는 언행과 행동, 평생을 무소유로 일관했던 스님으로 세상에 더 회자됐던 인물이다.

특히 스님은 ‘욕쟁이 스님’이라는 별호를 얻을 정도로 수행자로서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음담패설을 즐겨했지만 그럴수록 그에 대한 비판보다는 오히려 수많은 운수객들이 그의 법문을 들으러 더 몰려들었다. 스님의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삶의 골수를 찌르는 촌철살인(寸鐵殺人)과 같은 법문이었기 때문이었다.

춘성 스님은 1891년 3월 강원도 설악산 설악동에서 태어났다. 아홉 살 되던 해 어머니를 따라 우연히 신흥사를 찾은 스님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법당에 모셔진 불상을 한동안 뚫어질 듯 쳐다보고는 돌연 출가를 하겠다며 부모님의 허락을 구했다.

그의 나이 13세 되던 해 입산과 함께 당시 백담사에서 주석하고 있던 만해 스님과 운명적 만남을 가진 춘성 스님은 이 때부터 10년 간 만해 스님을 시봉하면서 불교의 사상적 토대를 다지게 된다. 이후 스무 살 되던 해 금강산 유점사로 들어간 춘성 스님은 동선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받고 안변 석왕사에서 대교과를 마친 후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했다.

여기서 강학을 전공한 스님은 탁월한 이해력을 바탕으로 이후 학문적 두각을 나타낸다. 특히 스님은 경전 중의 최고로 일컬어지는 『화엄경』을 거꾸로 외웠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드러내 당대 최고의 화엄 법사라는 명성을 얻게 된다.

그러나 경전에 대한 공부가 깊어질수록 스님은 무엇인가 부족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나이 49세 되던 해 당대 최고의 선사로 추앙 받던 만공 스님을 만나면서 그의 삶에 있어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만공 스님으로부터 ‘무’자 화두를 받은 춘성 스님은 이 때부터 자신의 생사를 건 치열한 수행정진으로 일관했다. 한겨울에도 불 한번 지피지 않고 장좌불와 수행을 계속하는 등 3년 동안의 결제를 마쳤다. 이후 춘성 스님은 전국의 선방을 돌며 25안거를 성만하는 등 생사를 건 정진력은 후학들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했다.

끝없는 정진을 거듭한 끝에 비로소 깨달음을 얻은 춘성 스님은 이 때부터 후학들을 양성하는 일에 전념했다. 특히 춘성 스님은 후학들에게 있어 수행자의 본분은 무소유에 있음을 강조하고 몸소 실천해 보이는가 하면 참선하는 수좌가 두꺼운 옷을 입거나 사치품을 사용하는 것은 결코 허락하지 않는 엄격함을 보이기도 했다.

평생을 무소유 정신을 철저히 지키며 수행자로서의 본분을 유지하면서도 걸림없는 언행과 행동으로 당대 걸출한 기승(奇勝)으로 세간에 회자됐던 춘성 스님은 1977년 8월 22일 봉국사에서 세납 87세, 법랍74세로 입적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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