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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암〈상〉

기자명 법보신문

“늘 떠나는 삶 살아야 참된 수행자”

우리나라 불교 대표종단인 조계종단에서 종정(宗正)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 지고지엄(至高至嚴)한 종정의 자리에 한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추대된 분이 계셨으니 바로 그 분이 윤고암(尹古庵) 큰스님이셨다.
<사진설명>조계종 종정으로 세 번이나 추대된 고암 스님은 자비보살의 화현으로 불렸다.

1899년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나 1988년 가야산 해인사에서 열반한 고암스님은 19세에 해인사에서 제산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이후 무소유, 무집착, 자비보살의 화현으로 한평생을 사셨고, 그 덕화로 종정의 자리에 세 번이나 추대될 수 있었다.

고암 스님은 말 그대로 욕심이 전혀 없는 분이었다. 흔히 불가에서는 무소유, 무집착, 무차별, 자비보살이라는 말로 사람을 칭찬하지만, 고암 스님이야말로 무소유, 무집착, 무차별, 자비보살이라는 말에서 한치 한푼도 어긋남이 없는 그런 스님이셨다.

어느 사찰에서 보살계 법문을 내리시고 법사료 봉투라도 받으시면 형편이 어려운 사찰임을 헤아리시고 주지스님 모르게 법사료 봉투를 법단에 올려 놓고 나오시는 분이었다.
형편이 어렵지 않은 사찰에서 법문을 하시고 봉투를 받으시면 그 돈은 곧 제자들의 몫으로 돌아갔다.

“스님, 저 부산에 좀 다녀오고 싶습니다. 노잣돈 좀 도와 주십시오.”
어떤 제자건 고암스님께 이렇게 말씀드리면 스님은 두말없이 있는대로 꺼내어 주었다. 봉투에 담긴게 있으면 봉투째 내 주었다. 고암스님은 누구에게 돈을 줄 때 한 장, 두장, 돈을 헤아려서 주는 법이 없었다. 잡히는대로, 있는대로, 아낌없이 망설임없이 내주었던 것.

돈 뿐만이 아니었다. 고암스님께는 많은 거사들과 보살들이 마음의 정성을 담아 가져오는 선물도 많았다. 그리고 귀한 책도 많이 보내왔다. 고암 스님은 그 갖가지 진귀한 선물도 당신이 소유하거나 쓰는 일이 별로 없었다.

“고암스님 돈은 받아쓰는 사람이 임자”

“아이구 스님, 이거 아주 귀하고 값진 물건인데요?”
“자네 마음에 들면 자네가 갖게나.”
“아이구 스님, 좋은 책들이 굉장히 많이 있네요.”
“자네가 볼만한 책 있거든 몇 권이건 가지고 가시게.”

고암스님은 늘 이러셨다. 돈도, 물건도, 책도, 누구나 갖고 싶어하면 주저없이 나누어 주었다. 그래서 고암스님 문하에 있던 스님들 사이에서 이런 말이 퍼질 정도였다.
“고암스님 물건은 누구나 선착순, 가져가면 임자요, 고암스님 돈은 누구나 먼저 얻어쓰면 임자.”

“자고나면 늘어나는 옛날 빚”

이렇듯 고암스님은 돈에도, 물건에도, 책에도, 감투에도 애착이 없이 손에 잡히는대로 나누어주고 물려주고, 그러고도 돈이 수중에 남으면 제자를 시켜 그 돈만큼 단주나 108염주를 사오게 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불교 신도들이 읽을 만한 좋은 책을 사오게 하셨다.
그리고는 찾아오는 사람에게 무조건 단주나 염주나 책을 나누어 주셨다. 고암스님은 돈만 있으면 무조건 이렇게 단주, 염주, 책을 무한정 사다 놓고 무차별로 나누어주셨으니 스님은 늘 빈털터리 신세를 면치 못하셨다.

곁에서 모시던 제자가 하루는 스님께 간절히 말씀드렸다.
“스님, 이제 돈이 들어오면 통장 하나 만들어 저금을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요 다음에 더 늙으시면 약도 잡수시고 용돈도 쓰셔야지, 들어오는대로 남김없이 다 나눠줘버리시면 요 다음에 어쩌실려구 그러십니까?”
이 말을 들은 고암스님은 한동안 먼 하늘을 바라보시더니 나직히 말씀하셨다.
“옛날빚 갚기도 바쁜데 어찌 저금을 하라는겐가?”
“스님께서 무슨 옛날빚이 있으시다는겁니까?”
“자고나면 늘어나는 옛날빚이 있다네….”

고암스님은 다시 먼 하늘을 한참 바라보시더니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내가 스무살때였네. 처음으로 운수행각길에 올라 임진강을 건너 묘향산으로 들어가려고 나룻터에 당도했는데, 나룻배 뱃삯이 10전이라는게야. 헌데 내 수중에는 단돈 5전 밖에 없었어. 그래 뱃사공에게 사정을 해봤지만 소용없었지. 나는 그만 나룻배에서 내려 처량한 모습으로 강건너만 바라보고 있었네. 헌데 바로 그때, 나룻배에 타고 있던 한 젊은 아낙이 아기 젖을 물리다 말고 돌아앉더니 허리춤에서 돈 5전을 꺼내 뱃사공에게 내밀며 저 젊은 스님 태워드리라는게야. 나는 그만 감사하기도 하고 부끄럽고 창피하기도 하고 어쩔줄 몰라서 고개만 푹 숙이고 있다가 강을 건넜는데, 아 그만 그 아낙이 어디 사는 어느 집 며느님인지 그걸 물어보지도 못한채 헤어졌어.
그 후로 나는 아침마다 그 아낙과 그 자손이 잘되게 도와 주십사 기도를 드렸네만, 그래도 그 때 진 빚 5전이 자고나면 자꾸 늘어나느게야.

은혜 입은 아낙 위해 매일 기도

어디 사는 누구인지도 모르니 당사자에게는 갚을 길도 없고…. 그 후로 돈만 생기면 누구에게나 대신 빚 갚는 심정으로 나눠주지만, 그래도 그 빚은 지금도 자고나면 자꾸 늘어나는것만 같은데 내 어찌 옛날빚 갚기도 바쁜데 저금을 할 수 있겠는가.”
고암스님은 그 후로도 여전히 돈, 물건 가릴 것 없이 생기면 나누어주고, 생기면 나누어 주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고암스님은 종정을 세 번이나 지내면서도 당신께서 후에 편히 지낼 사찰 하나도 점지해 둔 일이 없었다. 출가수행자는 무엇에든 애착심을 가져서는 안된다는게 스님의 생각이었다.
“출가자는 늘 떠나는 삶을 살아야 참다운 수행자라 할 것이야.”
그러면서 스님은 한 사찰에 결코 오래 머무는 일이 없었다. 스님은 ‘늘 떠나는 삶을 사는 타고난 수행자’였던 셈이다.
종정에 세 번이나 추대되고도 문도들이 머물 수 있는 큰 절 하나 없이 빈손으로 훌훌 털고 종정 자리에서 내려오신 스님은 아마 윤고암 스님 한 분 뿐이 아닌가 한다.
윤청광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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