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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금오 스님 (1896∼1968)

기자명 법보신문

현대 한국불교의 구심점

1968년 10월 8일 입적
살신성인, 정화 앞장

월산-탄성 스님 등
현대 이끈 후학 배출


“스님이 가신지 한세대가 훌쩍 지났지만 추모의 정은 해가 갈수록 짙어만 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스님의 덕화가 그만큼 광대무변 했기 때문입니다. 종단의 화합과 교단의 중흥에 기여하는 것이 스님의 유지를 받드는 것인 만큼 이일에 게을리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지난 9월 30일 법주사 대웅전에서 진행된 ‘태정당 금오 대종사 36주기 추모다례’에서 몇 남지 않은 직계 상좌 중 한 분인 혜정 스님은 이 같이 금오스님을 추모했다. 금오 스님은 현대 한국불교의 구심점과 같은 인물이었다. 조계종의 수행가풍을 진작시키는가 하면 정화불사에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앞장섰으며 수많은 후학들을 길러내 종단 발전에 이바지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1896년 전남 강진에서 태어난 금오 스님은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일제시대 척박한 시대적 상황을 헤쳐 나가기 위해 보다 큰길을 찾던 금오 스님은 16세 되던 해인 1916년 금강산 마하연에서 도암 스님을 은사로 불연을 맺었다. 출가 이후 10여년 간 금강산과 안변 석왕사에서 참선 정진을 거듭하던 스님은 26세 되던 해 오대산 월정사와 경허 스님이 있던 통도사 보광전, 혜월 스님의 천성산 미타암 등지를 찾아다니며 수행의 폭을 넓혀나갔다.
스님은 28세 되던 해 예천 보덕사 보월 스님을 찾아 2년 간 보월 스님의 지도 하에 수행하다가 보월 스님 입적 후 서른의 나이에 만공 스님의 증명으로 보월 스님의 법계를 이었다.

보월 스님의 법계를 이은 금오 스님은 이후에도 승속의 경계를 넘는 만행을 걸림 없이 감행했다. 법계를 전수 받은 것에 안주하기보다는 자신의 수행에 더욱 매진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마흔의 나이에 직지사 조실을 맡아 법회를 펴는 등 스님은 자신의 수행 뿐 아니라 후학을 양성하는 일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스님은 법을 구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참선 정진과 선풍진작을 본분으로 삼았지만 눈앞에 닥친 승단의 문제에 대해 결코 외면하지 않았다. 1950년대 비구와 대처간의 분쟁이 일어나자 스님은 전국 비구승 대회 준비위원회 추진위원장을 맡아 승단 재건에 대한 단호한 의지를 표출했다. 스님은 “정화 불사에 실패하면 무슨 면목으로 승복 차림을 하고 다니겠는가”라며 전국의 비구승들에게 호소했다.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정화불사에 참여한 금오 스님의 노력으로 비구·대처승간의 분쟁이 끝나자 스님은 다시 수행자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특히 스님은 전국의 선방을 돌며 많은 후학들을 일깨웠다. 월산, 범행, 탄성, 이두, 혜정, 월성, 월주 등 기라성 같은 제자들이 그의 문하에서 정진을 한 후학들이다.
조계종의 선풍 진작을 위해 앞장섰던 선승이면서 종단의 문제에도 좌시하지 않았던 금오 스님은 1968년 10월 8일 법주사에서 입적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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