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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하〉

기자명 법보신문

“두번 다시 못 쓸 것 감투!”

졸면 산문 밖으로 내 쫓아

금오 큰 스님은 말 그대로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붙잡지 않는’ 절 집안의 불문율을 고스란히 실천한 스님이었다.

그래서 월(月) 자(字)로 시작되는 법명을 받은 제자가 하두 많아서 속칭 ‘월자문중’(月字門中)이라는 말까지 생겨났을 정도였다.

월(月)자 법명을 받은 금오 큰 스님의 제자들만 해도 월만, 월성, 월주, 월서, 월탄, 월조, 월포, 월담, 월룡, 월선, 월북, 월탑, 월은 등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고, 월자 아닌 법명을 받은 제자도 범행, 탄성, 이두, 혜정, 정일, 천룡, 정월 등 수없이 많았으니 그야말로 ‘월자 부대’를 꾸미고도 남을 정도였으니, 근세 한국불교계에서 가장 많은 제자를 거느린 큰스님은 두말 할 필요도 없이 동산 큰 스님과 금오 큰 스님 두 분이었다.

이렇듯 삭발 출가하겠다고 찾아오는 젊은이들에게 “그래라. 그래라.” 하시며 까다롭지 않게 출가를 허락했던 금오 큰 스님은 허락만 인심 좋게 하셨을 뿐, 일단 머리를 깎고 나면 그 후에는 인정사정 없이 무지막지한 참선수행만을 강조하셨고 제자들에게 참선수행만 하도록 몰아 세웠다.

뿐만 아니라 참선 수행 중에 꾸벅꾸벅 졸고 있는 수좌에게 한 번 두 번 장군죽비를 내리쳐 주의를 주었는데도 또 다시 졸면 그땐 스님이 직접 그 수좌의 승복을 등 뒤에서 낚아 채 끌고 밖으로 나가서 주장자로 내려치기까지 하였다.

<사진설명>동화사에 주석하던 금오 스님은 후에 종정에 오른 혜암 스님과의 법거량을 통해 그가 ‘큰 그릇’임을 내다 보았다.

“이놈아, 참선수행 하겠다고 선방에 들어 앉아, 해야 할 참선수행 하지 않고 꾸벅꾸벅 잠이나 자다니, 이건 시주님네들 눈을 속여 먹는 도적놈이다! 제대로 수행하지 아니하고 밥만 축내면서 꾸벅꾸벅 조는 놈은 밥도적이란 말이다!”

이렇게 소리치시며 흠씬 두드려 팼는데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또 꾸벅꾸벅 조는 수좌는 별 수 없이 산문 밖으로 내쫓았다.

첫째도 참선, 둘째도 참선, 셋째, 넷째… 열째도 참선. 금오 큰 스님은 오직 참선만이 목표였으니, 여기서 벗어나면 누구도 제자 취급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출가수행자는 누구나 위로는 부처님 진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할 것이라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이 일생의 목표이니 참선 수행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되겠지만, 금오 큰 스님은 남다른 점이 또 한 가지 있었으니, 금오 큰 스님의 걸망을 유달리 큰데다가 유달리 무거웠으므로 제대로 모르고 금오 큰 스님의 걸망을 메겠다고 나선 젊은 수좌는 어김없이 큰 고생을 해야만 했다.

어디 서고 천막치고 용맹정진

그도 그럴 것이, 금오 큰 스님의 걸망 안에는 뜻밖에도 언제나 그 무거운 천막이 들어있었던 것.

여름, 겨울 안거를 마친 금오 큰 스님은 해제철이면 어김없이 북으로는 함경도 석왕사에서 남으로는 전라도 보길도에 이르기까지 팔도강산을 정처 없이 돌아다니며 행각을 통한 수행을 멈추지 않으셨다.

그런데 다른 스님들은 이럴 경우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큰 절이나 암자를 찾아가 신세를 지거나,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마을 사랑방 신세를 지기도 하는 게 예사였다. 그런데 금오 큰 스님은 행각을 하다가 해가 지게 되면 곧바로 근처 솔밭이나 모래언덕 밑에 늘 짊어지고 다니던 천막을 치고, 그 안에서 하룻밤 용맹정진을 하시곤 했다.

언제 어디서나 항상 참선수행 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다니신 분이 바로 금오 큰 스님었던 것.

특히 금오 큰 스님은 충청남도 안면도 백사장 솔밭에서 여러 번 천막생활을 하면서 참선 수행을 하셨던 것으로 제자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고 있는데, 어느 해 겨울에는 혹심한 추위 속에 눈보라를 헤치며 제자 월서와 월초를 데리고 지리산 천왕봉 아래까지 기어이 올라가 천막을 치고 밤새도록 참선수행을 강행하기도 했다.
금오 큰 스님이 대구 팔공산 동화사 선방에서 후학들을 제접하고 계실 때의 일이었다. 어느 날 금오 큰 스님이 젊은 수좌 혜암에게 물었다.

“그대는 악행을 짓지 아니하고 선을 받들어 행하며 스스로를 맑게 하는 것이 여러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뜻을 아는가?”

이 때 의기탱천해 있던 젊은 수좌 혜암은 느닷없이 큰 스님께 덤벼들어 큰 스님의 목을 뒤로 확 제껴 버렸다.

실로 전광석화와도 같은 기습적인 수좌의 거친 행동이었다.
그런데 이런 불의의 봉변(?)을 당한 금오 큰 스님께서는 당황해 하시거나 불쾌해 하시기는커녕 껄껄 웃으시면서 한마디 하셨다.

“하하하, 그러고 보니 동화사에도 제법 사자 새기 같은 게 있기는 있네 그려..응 하하하…”

금오 큰 스님은 이 때 벌써 혜암 수좌의 남다른 선기를 알아보셨던 셈. 그 후 혜암 수좌는 결국 해인사의 방장을 거쳐 조계종 종정을 지냈다.

이토록 오직 참선수행을 오매일여로 하는 수좌만을 아끼고 사랑했던 금오 큰 스님은 불교정화운동에도 뛰어들어 잠시 조계종 총무원장 자리를 맡은 적이 있었는데 이 때 큰 스님은 몹시도 괴로워 하셨다. 그래서 큰 스님은 감투에 환멸을 느끼시고 “세상에 못 쓸 것이 이놈의 중 감투로구먼” 하시며 하루하루 총무원 떠날 궁리를 하셨다.

“동화사에도 사자새끼가 있네”

이 때 제자 범행이 한 말씀 올렸다.
“스님, 노래기 아시지요? 냄새 지독한 벌레 노래기 말씀입니다. 그 노래기 회를 먹고도 눈 하나 깜짝 안 해야 이런 감투자리에 앉으실 수 있는 건데, 스님께서 어찌 견디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스님께서 어찌 견디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래 그래. 네 말이 맞다. 그럼 내가 어찌해야 되겠는고?”
이 때 제자 월탑이 한 말씀 올렸다.
“스님, 저 같으면 사표 쓰고 산 속으로 내려가겠습니다 스님.”
“그래 그래 네 말이 맞다. 월주야 거기 있는 내 도장 좀 가져오너라. 사표 쓰고 내려가야 겠다.”

금오 큰 스님은 그 길로 총무원장 사표를 쓰고 산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는 한 말씀 다시 한번 강조하셨다.
“두 번 다시 못쓸 것이 중감투구나!”

윤청광(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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