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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 제시 용종도면은 18세기 출토 부장품”

기자명 법보신문
  • 교학
  • 입력 2006.10.16 09:49
  • 댓글 0

신라종 원통 관련 기존 학계 연구 동향

고유섭, 신라종의 용종 영향 첫 주장
황수영, 1981년 만파식적설로 반기

신라 범종이 주나라 용종을 본 따 창안됐다는 주장을 최초로 제기한 이는 근대 미술사학자 고유섭 교수였다. 1938년 고유섭 교수는 “성덕대왕 신종은 중국의 악종 형식에 속하는 것으로 (중략) 대체로 형식이 같으면서 부분 형식에 특수한 취태를 낸 곳에 특색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 학설은 이후 이홍직·최순우·조규동·김원룡 등에게 그대로 답습됐으며, 1974년 일본학자 쓰보이 료헤이(平井良坪)에 의해 구체화된다.

쓰보이 료헤이는 『조선종』에서 용종 도면을 제시하고(도면 1) “여기에 나타난 자루는 신라종의 원통으로 발전하였고, 자루 중간의 고리(幹)에 새겨진 짐승의 얼굴은 신라종 고리의 단룡으로 진화하였으며 36개의 매(枚, 일명 종두) 역시 신라종에 재현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들 학자들이 용종을 신라종과 연관 지은 결정적인 특징은 신라종에 등장하는 원통 부분이었다.

한국종의 원통 연구는 한국미술사 연구가 처음으로 시작된 20세기 초부터 국내외 학자들의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종의 몸체 위에 달린 원통은 중국종이나 일본종에는 나타나지 않는 신라종만의 독특한 특징이기 때문이다.

최근까지 학자들은 속이 비어있는 원통을 종의 음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만든 장치로 파악했다. 그러나 이 설은 1976년 고마츠 타쿠쇼(小松澤昶)의 실험에 의해 사실이 아님이 입증됐으며, 1982년 염영하 박사 또한 음관과 음향의 관련이 미약하다는 사실을 밝힌 바 있다. 즉 원통은 단순히 장식을 위해서 만들어진 장치였던 것이다. 그런데 종의 머리 부분에 원통을 달고 있는 악기가 약 3000여년전 중국 고대 청동악기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을 확인한 근대 학자들이 용종을 신라종의 기원으로 파악한 것이다.

고유섭 교수가 원통을 악종의 형용에 해당된다고 설명한 이후 한국의 학자들은 이 설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해왔다. 김원룡 교수는 『한국미술사』에서 “신라종이 중국의 종과 탁(鐸)을 혼합한 형식이면서 용의 내부를 중공으로 하여 종신과 서로 맞뚫리게 한 독창적 형식”이라고 설명했다. 강우방 교수는 이를 더욱 구체화시켜 “신라종이 용종을 변형하고 확대 발전시킨 백제 미륵사지 출토 금동탁과 통일신라 초기 감은사지 출토 소형 동탁을 기본 바탕으로 중국 당의 범종 요소를 가미해 출현한 것”으로 설명했다.

그런데 여기에 반기를 든 첫 번째 학자가 황수영 전 동국대 교수였다. 황수영 교수는 이 원통을 만파식적의 상징이라고 설명했다. 즉 신라종에 등장하는 원통이 동해용왕으로 환생한 문무왕이 신문왕에게 전한 만파식적이라는 피리의 형상을 종에 투영된 형태라는 것이다. 황수영 교수는 1981년 한국일보에 기고한 ‘신라종 양식과 만파식적’에서 “신라종의 원통이 대마무 마디처럼 속이 비고 몇단으로 나누어진 점에서 볼 때 삼국유사 만파식적 설화에 등장하는 피리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황수영 교수의 주장은 원통 형상의 유사성에 기초한 용종기원설을 뒤집는 주장으로, 삼국유사 만파식적 설화를 기초로 한 것이어서 학계 안팎에서 커다란 주목을 받았다. 특히 1980년대 유행한 민족주의사학 붐을 타고 식민사관과 문화사대주의를 극복하는 논리로 커다란 호응을 얻었다. 하지만 만파식적 상징설 역시 직접적인 문헌기록이나 유물자료의 부재로 다른 견해를 가진 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이번에 ‘용종기원설 비판’을 발표한 성낙주 씨는 황수영 교수의 견해를 지지하는 학자 중의 한 명이다. 성 씨는 이번 논문을 통해 기존의 용종설의 직접적인 근거를 밝혀냄으로써 용종과 신라종과 관련이 미약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성낙주 씨는 한국과 중국, 일본의 범종 관련 도서들을 조사한 결과 쓰보이가 제시한 <도면 1>의 실물이 건륭 연간(1735∼1795)에 산동성 수광현 주나라 때의 유적인 기후대(紀侯臺) 아래서서 출토된 ‘주기후종(周’紀侯鐘)’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실물사진은 일본 평범사(平凡社) 판 『世界考古學大系』 7권에 수록돼 있다. ‘주기후종’은 신라종 양식의 확립기인 7∼8세기로부터 1400여년 전에 조성된 작품으로, 결국 쓰보이가 제시한 도면의 작도 시점은 18세기 이전으로 소급할 수가 없다는 것이 성낙주 씨의 설명이다.

성낙주 씨는 앞으로 원통과 단룡, 매련, 비천 등 신라종 고유의 요소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으며, 신라의 범종이 중국 양식에서 벗어나 독특한 특징을 갖게 되었는지 밝히는 논문을 발표할 계획이다.
 
탁효정 기자 takhj@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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