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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주 장편소설 - 인연 5

기자명 법보신문

제 2장 출가, 멀고도 가까운 여행

글·정찬주  삽화·송영방

“김사의는 지쳐가던 다리에 힘이 나는 것 같아 영천을 바짝 따라붙어 중얼거렸다. ‘나도 스님이 되고 말거야.’”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누더기 장삼을 걸친 한 승려가 산모퉁이 마른풀 위에 앉아 있었다. 죽은 듯이 쪼그리고 앉아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목구멍을 할퀴는 듯한 기침은 멎지 않고 있었다.

쿨럭쿨럭.

승려는 두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누르며 기침이 잦아지기를 고통스럽게 기다렸다. 빈 지게를 지고 지나가던 늙은 농부가 승려를 보더니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봉수 집에 가는 스님이 아닌감.”

그래도 승려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기침을 토해냈다. 그러자 농부는 혀를 차며 혼잣말을 하고는 가버렸다.

‘쯧쯧. 천하의 난봉꾼이더니 중이 됐구먼.’

그제야 승려는 고개를 들고 저만큼 지나가는 농부를 “처사님!” 하고 불러 세웠다. 농부가 다시 돌아와 깜짝 놀랐다. 심하게 기침을 해대던 승려의 입가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공주 솜틀기계 부잣집의 둘째 아들 김용남(金容男)이 맞지유.”
“뉘신지요.”
“공주 부근에 사는 사람치고 솜틀기계집 안 가 본 사람이 어딨시유.”
“쿨럭쿨럭.”

승려는 다시 기침을 토하느라고 말을 잇지 못했다. 농부가 딱하다는 듯이 승려의 걸망을 자신의 빈 지게에 얹고 나서 말했다.

“봉수 집 가는 거 맞지유.”

승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는 앉은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지게에 얹힌 걸망을 내려 어깨에 걸치고는 등을 돌렸다. 한겨울의 삭풍이 매섭게 불어오고 있었다. 늙은 농부도 찬바람을 맞아 얼얼한지 서둘러 가자고 재촉했다.

“얼어 죽겠시유. 어서 가유.”
“어르신. 먼저 가십시오. 천천히 가겠습니다.”

농부는 가면서도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갔다. 공주 부잣집 둘째아들 김용남이 누더기를 걸친 승려가 되어 나타난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공주 읍내에서 번드르르하게 옷을 입고 호기있게 다니던 한량이 덕지덕지 기운 분소의(糞掃衣)를 입고 출현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승려의 법명은 영천(靈泉)이었다. 영험한 샘물을 마시고 해수병을 낫게 해달라는 서원(誓願)을 담아서 영천이란 법명을 당대의 대선사 만공이 지어주었던 것이다. 영천은 1940년 33세의 나이로 만공선사에게 귀의하여 제자가 된 이른바 늦깎이였다. 늦깎이란 늦게 출가한 승려를 지칭하는 절집안의 용어였다.

영천은 속가시절에 일본말은 물론 영어를 귀동냥해 조금 했고, 만주를 유랑하고 돌아와서는 중국말을 유창하게 했을 정도로 언재(言才)가 빼어나 공주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뿐만 아니라 잡기(雜技)에 능하고 배짱이 셌으므로 집안에 궂은 일이 생기면 누구보다 앞장서서 해결하곤 하여 해결사라 불리던 그가 김봉수 집에 나타난 것은 출가한 지 2년 만의 일이었다.

그가 일생 동안 해소기침을 해대는 콜록쟁이가 된 데는 예닐곱 살 때, 동네 아이들과 여름 내내 냉한 기운의 참외를 따먹고 차가운 냇물이나 연못에 들어가 멱을 감고 난 후부터였다. 기침이 한번 터지면 10여 분 이상 콜록콜록 숨이 넘어갈 만큼 했다. 지독한 해수병이었는데 처음 보는 사람은 폐병쟁이라 하여 밥도 같은 상에서 먹지 않으려고 했고, 집안에서도 병신이라고 하여 형제들 간에 그를 따돌린 적이 있었다. 그러자 김용남은 집에 있는 것이 갑갑하여 밖으로 나돌았다. 어린 시절부터 동네 조무래기들과 놀기 좋아한 그는 청년이 되자 숨은 한량기가 도져 온갖 멋을 부렸다. 일제 고급구두를 신고 명주바지저고리에다 비단조끼를 걸치고서 젊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신사지팡이를 홰홰 돌리며 나다녔다.

밤낮으로 화투장을 만지더니 어느 새 노름판의 고수가 되어 사금을 캐는 금강 지류까지 원정을 가서 날밤을 새기도 했다. 돈이 도는 곳이면 으레 도박과 싸움판이 벌어지게 마련인데, 김용남도 난장에서 싸움질을 하여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그러면 누나인 김상남이 30리 길을 걸어 그곳으로 찾아가서 화해를 붙였다.

그러던 그였으니 늙은 농부가 자꾸 뒤를 돌아보면서 도리질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비록 콜록쟁이는 여전하지만 천하의 건달로 공주 바닥에서 소문이 자자했던 그가 산중 고승처럼 변하여 얼굴에 위엄이 서려 있는 것이었다.

김용남은 출가한 후에도 해소기침이 멈추지 않았으므로 만공이 조실로 있는 정혜사 선방에서도 쫓겨났다. 수좌들이 모두 좌선삼매에 들어 있었는데, 갑자기 그가 기침을 계속 토해내는 바람에 선방 분위기가 엉망이 돼버렸던 것이다. 이후 그는 전국의 어느 선방에서도 방부를 들일 수 없어 객실에 머물면서 법당 청소나 하고 무나 배추를 뽑는 등 허드렛일을 하며 밥값을 했다.

그러나 영천은 스승인 만공선사에게 받은 ‘만법귀일 일귀하처’란 화두를 놓은 일은 없었다. 오매불망 입실하고 싶은 선방 앞을 얼씬거리면서도 화두를 들었고, 후원에서 부목과 함께 장작을 패면서도 화두를 놓지 않았다.

해소기침 때문에 선방에는 들지 못했으나 어디서나 푸대접 받는 생활은 도리어 나라고 내세우는 아상(我相)이란 자존심을 없애는 데는 최고의 방편이었다. 어디 가서나 자기를 아래쪽에 놓는 하심(下心)이 절로 닦아졌다. 그러니 병고를 양약(良藥)으로 삼으라는 부처님 말씀이 절절하게 다가왔다.

함부로 범접할 수 없었던지 농부는 도망치듯 산모퉁이 너머로 사라지고 없었다. 영천은 바람이 더 거세어졌으나 고개를 꼿꼿하게 세우고 걸어갔다. 잿빛 하늘에서는 날벌레 같은 것이 나붓거렸다. 떡가루처럼 가는 세설(細雪)이었다.

콜록콜록.

영천이 한바탕 다시 기침을 토해놓고 나자 다행스럽게도 바람이 수그러들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나붓거리던 눈발이 허공을 가득 채워버렸다. 검은 땅바닥도 희끗희끗해졌다. 영천은 눈을 맞으며 하얗게 변해가는 신작로를 따라 걸었다.

영천은 자신보다 10살 연상인 친누나이자, 매형 김봉수의 아내였던 비구니 성호(性浩)의 부탁을 받고 매형 집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비구니 성호의 부탁이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집과 논밭을 모두 처분하고, 그런 뒤 남편인 김봉수와 자식인 어린 김사의를 출가시키라는 것이었다.

영천이 김봉수 집에 도착한 것은 마을에서 저녁 짓는 연기가 피어오를 무렵이었다. 보통학교 졸업을 앞둔 김사의는 부엌으로 들어가 들기름을 부어 김치를 볶아놓고 어머니가 출가하기 전에 만들어둔 명태반찬을 고추장단지에서 꺼내고 있었다. 아버지 김봉수는 방에 앉아 면벽참선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매형 계십니까.”
“스님, 아버지는 참선중입니다.”
“이놈, 많이 컸구나. 나를 모르겠느냐. 둘째외삼촌이다. 쿨럭쿨럭.”

기침소리를 듣고 나서야 김사의는 둘째외삼촌임을 알아차렸다.

“외삼촌.”
“이놈아, 외삼촌이 무엇이냐. 스님이라고 불러라.”

면벽참선을 하고 있던 김봉수가 좌선을 풀고 나와 말했다.

“스님, 올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김봉수는 영천에게 지나칠 정도로 공손하게 예를 갖추어 맞아들였다. 저녁을 하면서 영천은 쿨럭쿨럭 기침을 하면서 집에 온 이유를 얘기했다. 김봉수는 비구니 성호의 부탁을 받고 왔다고 하자 아무런 대꾸도 못했다. 아내가 시키는 대로 살아온 물컹한 그였는데, 지금까지 아내의 말에 단 한 번도 반대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다음날부터 김봉수는 영천의 요량대로 가산을 정리했다. 김사의가 공주본정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집과 논밭을 팔고 집안의 가재도구들은 필요한 마을사람에게 나누어주었다. 그제야 김사의는 자신도 절에 가 살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김사의는 다른 소지품은 다 놓고 가더라도 일기장만큼은 꼭 챙기고 싶었다. 5학년 때 어머니가 출가한 후 산 일기장인데, 거기에는 2년 동안 하소연하듯 써놓은 글들이 많았다. 김사의는 어머니를 만나면 일기장을 보여주며 자기를 욕하고 괴롭혔던 아이들의 못된 짓을 다 일러주리라고 마음먹었다.

일기장에는 앞집에 사는 별명이 꼴뚜기인 여자아이의 얘기도 적혀 있었다. 만나면 싸우고 장난을 잘 치는 여자아이였다. 학교를 다니지 않고 몇 달 동안 서울에서 살다 오더니 서울말을 어설프게 흉내 내어 몰래 웃었다는 내용도 있었다.

마침내 1942년 3월 새벽.

마을 사람 누구보다 빨리 눈을 뜬 김봉수는 허리춤에 전대를 찼다. 전대에는 집과 논밭을 팔아 모은 돈이 두둑하게 들어 있었다. 영천은 명주이불 두 채를 하나씩 등에 짊어지기 좋게 쌌다. 김사의도 짐을 쌓느라고 부스럭대는 소리에 일어나 잠을 쫓았다.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마저 달아나버린다면 자신은 천둥벌거숭이 고아가 되고 말기 때문이었다. 김사의는 먼저 일기장을 자신이 맬 보따리 속에 넣었다.

김사의는 꼴뚜기라고 불리는 여자아이라도 한번 본 뒤 떠나고 싶었지만 아버지 김봉수의 생각은 달랐다. 김봉수는 자신이 떠나는 뒷모습을 동네 사람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두 사람은 김봉수를 뒤따라 도망치듯 마을을 빠져나와 대전으로 가는 신작로로 나섰다. 김사의는 다시는 오지 못할 것 같은 아쉬움으로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개들이 컹컹 짖었지만 이내 마을은 적막강산이 되었다. 잠이 덜 깬 채 아버지 김봉수를 뒤따르던 김사의는 신작로의 돌부리에 걸려 자꾸 넘어지려 했다. 그때마다 김봉수가 말했다.

“사의야, 내 손을 꼭 잡아라. 대전까지는 백리 길이다.”

세 사람은 공주에서 대전까지의 백리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버스를 타지 않고 굳이 걷는 것은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서였다. 봄이라고는 하지만 새벽의 공기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김사의는 졸릴 때마다 투덜거렸다.

“외삼촌 스님, 대전은 얼마나 더 가야 해요.”
“네가 가야 할 곳은 대전이 아니라 아주 먼 곳이다. 대전에서 네 어머니 스님이 계시는 대구로 갈 것이고, 대구에서 또 어디론가 갈 것이다.”

김사의는 영천의 말에 다리에 힘이 빠지는 듯했다. 동이 터오자 김봉수와 영천의 입에서는 숨을 쉴 때마다 허연 김이 새어나왔다. 등에 짊어진 명주이불보따리가 쌀가마니처럼 무거워 보였다.

“외삼촌 스님, 어머니가 계신 대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사의야, 너는 스님이 될 것이다. 스님은 아주 먼 여행을 하는 사람이다. 아니, 스님은 아주 가까운 여행을 하는 사람이다. 중생에서 부처가 될 때까지 아주 멀고도 가까운 여행을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스님을 도 닦는 수도자(修道者)라고 하는 것이다. 너도 언젠가 이 말을 이해할 때가 있을 것이다.”
“왜 멀고도 가까운 여행이라 하는 거예요.”
“부처가 되는 것이 쉽고도 어렵기 때문이다.”
“외삼촌 스님, 저는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부처가 되겠어요.”

김사의는 부처가 무언지도 모르면서 어머니와 살고 싶은 마음이 앞서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나 영천은 기침을 하면서 말했다.

“쿨럭쿨럭. 수행자를 운수승(雲水僧)이라 하지. 구름 운(雲)자, 물 수(水)자야. 구름처럼 물처럼 자유를 찾아 흘러가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흐르지 않는 것은 썩는다. 새롭게 태어나지 못하면 썩는 법이다.”

김사의는 알듯 모를 듯한 영천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며 걸었다. 영천은 김사의의 마음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었다. 문득 김사의는 아주 어린 시절에 ‘중여관집’이라 하여 집에서 자고 가는 탁발승들을 ‘중아저씨’라고 부르며 따랐던 기억이 떠올랐다. 어떤 날은 탁발승의 『천수경』 염불을 흉내 내며 신이 나 어깨춤을 추고 따라다녔던 것이다. 김사의는 지쳐가던 다리에 힘이 나는 것 같아 영천을 바짝 따라붙어 중얼거렸다.

‘나도 스님이 되고 말거야.’

멀리 계룡산이 보였다. 해가 떠올라 계룡산을 휘감고 흐르는 냇물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고, 산자락 한 쪽에서는 지난가을의 잔해인양 퇴색한 빛깔의 낙엽이 남아 있었지만 이미 온산에는 물빛 같은 푸른 기운이 돌고 있었다.

대전으로 가는 신작로는 뱀처럼 구불구불했고, 길 끝은 안개 속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세 사람은 시장기가 들어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되자, 아침을 먹으러 암자를 찾아들어갔다. 암자는 냇가에서 계룡산 계곡 쪽으로 난 산길 끝에 있었다. 스님들이 모두 탁발 나가고 노승이 혼자 지키고 있는 암자인 모양이었다. 영천이 인기척을 냈지만 노승은 법당에서 염불삼매에 빠진 듯 나오지 않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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