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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주 장편소설 - 인연 6

기자명 법보신문

제 2장 출가, 멀고도 가까운 여행

글·정찬주  삽화·송영방

“김사의는 가슴이 뛰었다. 산자락에 흐드러지게 핀 진달래꽃 때문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계신다는 내원암을 본 순간 심장이 콩콩 두근거렸다.”

세 사람은 대전역에 도착했다. 역사 앞에는 지게꾼들이 양지쪽에 몰려 잡담을 나누고 있거나 졸고 있었다. 헐벗은 거지들도 보였다. 거지들은 영천을 보더니 얻어먹을 것이 없다는 듯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김사의는 처음으로 기차를 보았다. 멧돼지처럼 생긴 머리통이 연기를 풀풀 내며 용을 쓰듯 기적소리를 내뿜어댔고, 그 뒤로는 네모 난 기차 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다.

“사의야, 이것이 대구 가는 특급기차다.”

기차표를 끊어 온 영천이 역사 안으로 앞서 들어가며 말했다. 김봉수와 김사의는 두리번거리며 들어가다 이불보따리가 좁은 개찰구에 걸려 애를 먹었다. 뒷사람들이 빨리 들어가지 못한다고 소리를 쳤다. 기차가 곧 떠날 듯이 칙칙폭폭 칙칙폭폭 하고 다급하게 기적소리를 내고 있었다.

“한발만 늦었어도 놓칠 뻔했다. 나무관세음보살.”

영천은 기차를 올라타고서야 안도했다. 영천의 말대로 기차는 곧 대전역 역사를 미끄러지듯 빠져나와 대구역을 향해서 달리기 시작했다. 김사의가 차창을 열고 고개를 내밀자 김봉수가 소리쳤다.

“이놈아, 외삼촌스님 기침한다. 어서 창문 닫아라.”

마침 영천이 해소기침을 하기 시작했으므로 김사의는 얼른 창을 내렸다. 기차의 꼬리는 생각보다 길었다. 긴 꼬리를 달고 달리느라고 기차는 거칠게 소리를 지르곤 했다.

쿨럭쿨럭.

영천은 수건을 꺼내 입을 틀어막으며 기침을 했다. 차창으로 흘러든 햇살이 창백해진 영천의 얼굴에 비쳤다. 영천은 기침을 하면서도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자신의 지병을 원망하는 빛이 없었다. 김봉수는 영천에게 기침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물었다.

“스님, 고통스럽지 않습니까. 용한 의원을 찾아 병을 나으십시오.”
“쿨럭쿨럭.”

영천은 기침을 한 번 더 토해내더니 말했다.

“매형, 부처님께서는 삶을 고해(苦海)라고 했습니다. 고통스런 바다를 건너가는 것이 인생이지요. 삶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더 고통스러워지는 법입니다.”
“스님은 언제까지나 병을 달고 다니겠다는 것입니까.”
“매형, 스님이라고 왜 병을 낫고 싶지 않겠습니까.”
“출가하실 때 도인이 되면 무엇이든 다 해결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도인도 전생에 지은 업은 어쩌지 못합니다. 제가 지금 해수병을 앓고 있는 것은 전생에 지은 업이 큰 원인이고, 어렸을 때 참외를 먹고 찬물에 들어가 논 것이 작은 원인입니다.”
“전생에 지은 업이 두텁다면 평생 동안 병을 달고 다녀야 합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운명은 타고 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주쟁이들 얘깁니다. 누구나 선업을 쌓으면 운명을 바꿀 수 있습니다. 제가 도를 닦는 것은 전생의 업을 씻기 위해서입니다. 선업을 쌓아 악업이 다 씻어지면 해수병도 나을 것입니다.”

김봉수는 마곡사 어느 스님한테서 비슷한 법문을 들었던 것도 같았지만 영천에게 업 이야기를 듣고 보니 스님 노릇도 할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사의도 귀를 쫑긋하고 영천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는지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매형, 깨치기만 하면 단번에 해탈할 수 있어요. 일시에 고통에서 벗어나버린다니까요.”
“고통에서 훨훨 벗어난다는 것입니까.”
“허공을 나는 새같이 되지요. 물같이 구름같이 자유스럽게 되지요.”
“허허.”

김봉수는 영천의 얘기를 듣고 나서는 맛있는 음식을 삼킨 듯 입맛을 다셨다. 영천의 말솜씨는 출가 전이나 출가 후나 똑같았다. 사람을 감쪽같이 홀리는 데 귀신 못지않은 재주가 있었다.

기차가 김천역에 멈추자 일본헌병이 올라와 승객들을 검문했다. 눈을 매섭게 뜨고 승객들의 짐을 뒤지고 있었다. 김봉수의 이불보따리도 풀게 했다. 그러나 옷가지와 명주이불만 나오자 실망한 듯 지나쳤다. 김사의는 아버지 김봉수의 허리에 찬 전대를 걱정했으나 일본헌병은 거기에는 관심이 없었다. 마음씨 좋게 생긴 김봉수의 얼굴을 한번 훑어보았을 뿐 그냥 다른 칸으로 가버렸다.

차창 너머로는 웃자란 보리들이 파랗게 물결치고 있었고, 지척의 산자락에서는 진달래꽃들이 붉게 피어나고 있는 중이었다. 김사의는 보름달이 두둥실 떠오른 날 뒷동산에 올라가 진달래꽃을 따먹으며 싸우고 장난치던 꼴뚜기 여자애가 생각나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검둥이 강아지도 쫓아와 보름달을 보고는 멍멍 짖어대던 모습도 떠올랐다. 이제는 공주로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떫은 감을 씹은 듯했다.

그러나 도를 부지런히 닦아 큰스님이 되면 금의환향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마을 사람들을 모두 불러 모아놓고 덕숭산의 만공 큰스님처럼 법문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드는 것이었다.

김사의는 문득 외갓집의 외할아버지부터 외삼촌들이 무슨 이유로 하나 둘씩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던 것인지 궁금했다. 외갓집에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알고 싶은 것이 생기면 궁금해 못 견디는 김사의는 어느 새 꾸벅꾸벅 졸고 있는 영천을 깨웠다.

“외삼촌스님.”
“그래, 무슨 일이냐.”
“외갓집 식구들이 외증조할머니 귀신에 홀려 하나 둘 스님이 되었다는 소문을 동네어른들한테 들었어요.”
“귀신에게 홀려 스님이 된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오히려 스님은 귀신을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사람이다. 외증조할머니 얘기가 잘못 전해진 것이다. 외증조할머니는 우리 형제들에게 기도염불을 하시면서 아미타부처님의 광명을 직접 보여주시고, 우리들을 그 광명 속에서 살게 하신 생불(生佛)이시었다.”

김사의는 5살 때쯤 뵌 안성 이씨인 외증조할머니를 또렷하게 기억했다. 위장병이 있는 외증조할아버지 김영인(金永仁)은 마곡사에 가서 요양하기를 좋아했고, 또 그곳 스님들을 만나 법문을 자주 들었다. 안채 기와집 기둥 주련에 『법화경』의 ‘제불양족존 지법무상승(諸佛兩足尊 知法常無性)’ 같은 구절을 주련으로 걸어놓고 살 정도였다.

외증조할머니의 불명은 평등월(平等月)이었다. 5살의 김사의는 외갓집에 가서 외증조할머니 방에 몰래 들어 간 적이 있었다. 외증조할머니 방에는 설탕이 덕지덕지 붙은 눈깔사탕이 외증조할머니 입가심거리로 늘 큰 사발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또 방 위목에는 바가지 두 개에 율무염주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러나 김사의는 율무염주를 갖기보다는 사탕이 먹고 싶어 몰래 들어가곤 했다. 그러면 외증조할머니는 졸면서도 불경 구절을 외는 듯 홀쭉한 뺨과 입술을 달싹이다가 눈을 뜨고 나서는 막대기를 찾는 시늉을 했다.

외갓집의 형편이 기운 것은 외증조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였다. 빚보증을 잘못 서 가산을 탕진한 상태에서 도인이라 불리던 외증조할아버지마저 타계한 것이었다. 그래서 외증조할머니는 자식들이 남은 논을 팔아 공주읍으로 나가 사업을 하자는 데 허락했다. 양반이라고 기운 가산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양반이 장사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당시 공주는 하루가 다르게 농촌에서 도시로 바꿔지고 있었다. 서구의 문물과 편리한 기계가 들어서는 이른바 공주개명(公州開明)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외증조할머니 가족도 가산을 정리한 돈으로 일본에서 솜틀기계를 구입했다. 솜틀기계는 손으로 목화를 두들겨 솜을 만드는 것과 달리 생산 능률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목화를 기계에 넣고 발로 밟기만 하면 솜이 뭉게구름처럼 한가득 쏟아져 나왔다. 공주시내에 솜틀기계 공장이 생겼다는 소문이 나자, 공주 인근 사람들이 목화를 지게에 지고 와 줄을 섰다. 구경을 오는 사람도 많았다 특히 장날이 되면 목화 짐을 지고 오는 사람들로 더욱 붐볐다. 외증조할머니의 아들인 학남, 용남, 용학 삼형제가 하루 3교대로 일을 해도 감당하지 못했다. 수입은 농사를 지을 때보다 몇 십 배나 많았다. 수입은 달마다 합산하여 평등월보살과 삼형제 몫으로 똑같이 4등분했다.

평등월보살이 어느 아들 집에 가 있느냐에 따라서 1등분을 그 아들집에서 가졌다. 평등월보살이 생각해 낸 지혜였지만 결과적으로 며느리들이 서로 평등월보살을 자기 집에 모시려고 효도경쟁을 했다. 어느 집에서나 가장 크고 좋은 방이 평등월보살 방이었고, 어머니가 절에 간다고 하면 아들 며느리들은 시줏돈을 듬뿍 내놓곤 했다.

그래도 평등월보살은 주로 막내아들 집에서 머물렀다. 평등월보살이 절에 가기도 했지만 스님들이 보살이 있는 집으로 찾아오기도 했다. 비구스님도 오고 비구니스님도 찾아와 탁발을 해갔다.

하루는 달덩이처럼 이목구비가 훤하게 생긴 비구니스님이 탁발을 하러 와 평등월보살을 만났다. 보살은 인물 좋게 생긴 비구니스님의 걸망에 큰 바가지로 쌀을 퍼와 부었다. 두서너 바가지나 쌀을 붓자, 비구니스님이 걸망이 무거운지 그만 부으라며 말했다.

“할머니보살님, 요새 세상사는 재미가 엄청 좋으신가 봐유.”

평등월보살은 그렇지 않아도 누구를 붙들고 자랑하고 싶던 참이었다.

“아이고 재미가 나고말고요. 우리 큰아들이 효자지요. 작은아들들도 효자고요. 모두가 돈을 많이 벌어 공주부자가 됐어요. 스님, 솜틀공장 구경 한번 가보세요. 그 집이 우리 공장이지요. 사람들이 날마다 줄을 서 있어요.”

평등월보살이 자랑을 멈추자, 삿갓을 다시 눌러 쓴 비구니스님이 합장을 공손하게 하더니 걱정스럽게 말했다.

“할머니보살님, 그렇게 세상일에 애착심을 가지면 죽어서 업이 됩니다유.”

충청도 사람들에게 ‘죽어서 업이 된다’는 말은 ‘죽어서 구렁이가 된다’고 말과 같았다. 재물에 애착심이 지나친 까닭으로 죽어서 극락왕생하지 못하고 징그럽게 생긴 구렁이가 되어 장독대의 큰 독을 감고 있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60살이 넘어서부터 근심 걱정을 해본 적이 없는 평등월보살은 머리카락이 하늘로 곤두서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등을 돌리고 돌아서는 비구니스님에게 평등월보살이 다가가 물었다.

“아이고 스님, 어떻게 하면 업이 안 되겠습니까.”

비구니스님이 쌀쌀맞게 말했다.

“뭐, 업이 다 되가는데 이제야 나한테 물으면 뭐해유.”

그때부터 평등월보살은 비구니스님을 따라가면서 통사정을 했다. 날이 저물고 있으니 하루 묵어가라며 붙들었다. 마지못해 집으로 따라온 비구니스님은 좀 전에 탁발할 때와는 태도가 완전히 달랐다. 잠을 자지 않고 새벽까지 도도하고 위엄 있게 좌선을 하더니 함께 밤을 세운 평등월보살에게 매몰차게 한 마디를 툭 던졌다.

“할머니보살, 참말로 업이 되기 싫지유.”
“스님, 제가 업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업이 되기 싫습니다.”
“그럼 오늘부터 이집 저집 다니며 부자라는 거 자랑하지 말고 자나 깨나 나무아미타불을 외워 봐유. 앞으로 얼마나 더 사시겠시유. 돌아가시는 날까지 아미타불을 외시면 업 같은 것은 십만팔천 리 도망갈 것이구만유.”

그런 뒤였다. 평등월보살이 정랑을 가느라고 방을 비운 사이에 비구니스님은 삿갓을 방벽에 걸어둔 채 사라져버렸다.

그 비구니스님이 다년 간 지 10여 년.

평등월보살은 동구불출하며 아미타불만 외웠다. 그러자 어느 날 놀라운 신통이 생겼다. 막내아들집에서 공주까지는 30리 길인데, 그곳의 화기(火氣)가 평등월보살에게 느껴졌다. 아들을 불러 공장에 화기가 있으니 물통에 물을 가득 담아두라고 말했던 것인데, 아닌 게 아니라 그날 오후에 쉬지 않고 돌던 솜틀기계에 불이 붙었다. 다행이 준비해두었던 물로 불을 꺼 공장이 탈 뻔했던 화를 면했던 것이다.

이후 평등월보살은 무슨 이유에선지 기도염불을 아미타불에서 문수보살로 바꾸었고, 또 경허의 속가형인 태허(太虛)를 마곡사에서 만나 다시 아미타불로 되돌렸다. 태허가 기도염불을 바꾸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라며 상방대광명(常放大光明)이란 『법화경』의 한 구절을 써주며 바로잡아 주었던 것이다. 평등월보살은 상방대광명이란 휘호를 벽에 붙이고 다시 아미타불을 자나 깨나 외웠다.

常放大光明.

늘 크나큰 밝은 빛을 내뿜다는 부처님 말씀이었다. 지혜의 빛을 밝게 뿌리므로 어리석음의 어둠이 물러간다는 이치이니 상방대광명이야말로 바로 아미타불의 밝은 세계인 것이었다. 평등월보살은 태허와 약속한 대로 죽을 때까지 아미타불을 외웠고, 죽은 후에는 7일장 동안 이적(異蹟)을 보였다. 매일같이 시신이 누운 허공에 부처님의 말씀인 상방대광명이 나타났다. 밤에도 노을 같은 방광(放光)이 나타나곤 하자 ‘불이 났다’며 마을사람들이 물통을 들고 오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평등월보살의 둘째손자인 영천은 얘기를 더 하려다가 목이 멘 듯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또 쿨럭쿨럭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영천은 대구역에 내릴 때까지 기침을 했다. 영천은 대구역에서 시내에 자리한 조그만 포교당에 도착해서야 겨우 기침을 멈추었다.

다음날, 세 사람은 다시 팔공산 내원암으로 갔다.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가다 내원암 입구인 산길부터는 걸어갔다. 김사의는 가슴이 뛰었다. 산자락에 흐드러지게 핀 진달래꽃 때문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계신다는 내원암을 본 순간 심장이 콩콩 두근거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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