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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주 장편소설 - 인연 8

기자명 법보신문

제 2장 출가, 멀고도 가까운 여행

정찬주 장편소설  삽화·송영방

“수월스님은 북방으로 가셨고, 만공스님은 충청도에 계시고, 혜월스님은 남방으로 내려오시어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단다. 세 분은 모두 달처럼 컴컴한 세상을 밝히는 분들이지. 그래서 우리나라가 동서남북으로 밝은 것이야.”

며칠 후.
김사의는 성호가 시킨 대로 대구에서 경부선을 타고 물금역에서 내렸다. 물금역에서 내린 김사의는 갈대숲 사이로 드러난 바다처럼 넓은 낙동강을 한동안 넋을 잃고 쳐다보다가 다시 20리를 걸어 양산읍에 있는 양씨 술도가를 찾아갔다. 외할아버지 추금이 계시는 천성산 내원사로 가려면 그곳에서 하룻밤을 자야만 했다.

술도가 주인인 양씨를 찾아 내원사로 가는 길이라고 하니 술에 취한 듯 대낮부터 얼굴이 벌건 그는 두말 않고 행랑채 방을 내주었다. 양씨는 내원사 큰 신도임이 분명했다. 김사의는 양복저고리를 벗지 않은 채 누웠다. 저고리 안감 한쪽에 어머니 성호가 논 다섯 마지기 값인 8백원을 넣고 바느질로 봉해버렸던 것이다. 논밭과 집을 판 돈 중에서 김사의에게 준 몫이었다.

며칠 전 팔공산 내원암에 도착한 날, 아버지 김봉수가 전대에서 돈을 꺼내놓자 어머니 성호가 자신이 생각했던 요량대로 이리 저리 나누었는데, 아버지와 어머니는 집을 판 돈 중에서 반반씩을, 김사의는 중학교를 가야 하니 논 다섯 마지기 값을, 막내 쾌성은 보통학교도 입학하기 전에 출가했으니 논 여덟 마지기 값을, 누나인 응민과 형인 월현은 공부도 웬 만큼 했고 출가했으니 각각 논 서 마지기 값을 가져가기로 했던 것이다.

김사의는 술 취한 사람이 기어들어와 불안했으나 그가 곧 코를 골고 잠에 떨어지자 휴우, 하고 안심했다.

“관세음보살.”

어머니 성호가 관세음보살을 외기만 하면 ‘관세음보살님이 너를 지켜주실 것이다’고 당부했던 것이다. 김사의는 관세음보살님이 저고리 안감에 든 돈도 지켜주실 것이라고 믿었다. 김사의는 한 번 더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눈을 감았다.

다음날, 호젓한 산길을 가면서도 김사의는 머리끝이 쭈뼛해지면 관세음보살을 불렀다. 들판 길은 씨를 뿌리는 농부들이 논밭에 나와 있기 때문에 무섭지 않았지만 외진 산길은 짐승이나 도둑이 튀어나올 것 같아 가슴이 조마조마해졌다.

양복저고리 안감에 든 돈 탓이었다. 김사의는 돈이란 친구처럼 좋기도 하지만 사람을 괴롭히는 악마 같다고 느꼈다. 어머니 성호에게서 막 받았을 때는 친구 같았지만 지금은 가슴을 졸이게 하는 악마인 것이었다. 김사의는 저고리 안감 속에 돈이 없다면 홀가분하게 산길을 걸어갈 텐데, 하는 생각을 자꾸 하면서 길을 걸었다.

중방내를 거쳐 가는 천성산 내원사까지는 양산읍에서 30리 길이었다. 김사의는 물어물어 내를 건너고 산모퉁이를 돌고 다리를 건너 이윽고 천성산 산자락으로 들어섰다. 멀리 내원사 일주문이 보이는 순간 감사의는 자신도 모르게 관세음보살 하고 또 중얼거렸다. 30리 길을 걸어오면서 어느 새 관세음보살이 입에 붙어버린 모양이었다.

외할아버지 추금은 동안거가 벌써 끝나고 해제 철인데도 안거 중이었다. 성호가 바느질하여 만든 장삼을 한 벌 김사의 편에 보내겠다는 연락을 받은 바 있는 추금도 외손자인 김사의를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김사의가 내원사에 도착한 것은 석양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을 무렵이었다. 추금은 일주문 주변에서 김사의를 기다리다 장작을 패고 있는 참이었다. 속가 외손자를 따뜻한 온돌방에 재우기 위해 오랜만에 도끼를 휘두르며 베어놓은 소나무를 쪼개고 있었다.

추금(秋琴).

1933년, 첫째아들 김학남이 출가하고 난 지 8년 만에 셋째아들 김용학에게 집안 살림을 맡기고 자신도 56세의 나이로 입산해버린 김사의에게는 속가의 외할아버지였다. 속명은 김만수(金萬洙)였다.

출가 전에도 절로 가 한 철씩 드나들던 추금은 입산 이후 늦깎이로서 젊은이들에 비해 힘이 달렸지만 소처럼 느릿느릿 선승의 길을 걸었다. 추금은 금강산 마하연사로 먼저 달려가 속가 시절부터 인연이 있던 조실 만공선사의 지도를 받았다.

자신보다 먼저 출가한 효봉의 용맹정진은 갓 출가한 풋중 추금에게 귀감이 되었다. 1933년 동안거 때 효봉이 삼매에 들어 7일 동안 시간을 잊은 적이 있는데, 그때 만공은 <칠일정진시(七日精進詩)>라는 제목으로 게송을 지어 대중들이 더욱 발심 정진하도록 선방 벽에 붙여놓았던 것이다.

대중이 이레 동안 정진할 때에
불창삼매(佛唱三昧)에 들었다가
갑자기 깨매 나도 부처도 없나니
모든 일에 내 마음 자재하도다.

이후 추금은 해인사 퇴설당으로 옮겨 수행했다. 당시 퇴설당에는 이미 견성을 한 동산(東山)이 조실로 있었다. 동산은 1929년부터 범어사 선방과 해인사 선방을 오가며 선승들을 지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추금이 든 화두는 중국의 조주선사가 꺼낸 ‘무(無)’ 자였다.

추금은 자신의 눈으로 효봉이 견성하는 것을 보았으므로 확신을 가지고 정진을 했다. 특히 해인사 퇴설당에서의 정진은 젊은 선승들이 그의 건강을 염려할 정도였다. 추금은 노승들이 골골하는 뒷방보다는 젊은 승려들이 모이는 지대방에서 법담을 나누었고, 크고 작은 울력에도 빠지지 않았다. 어떤 풋중이 걱정하며 그에게서 호미자루를 빼앗기도 했다.

“노스님, 제발 들어가십시오.”
“내 걱정 말게나.”
“그러다 쓰러지시면 화두고 뭐고 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진짜 공부는 선방에서가 아니라 호미자루를 쥐었을 때라네.”
“노스님은 울력에 나서실 때도 화두가 성성하십니까.”
“아직은 멀었네. 다만 선방 좌복에 앉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화두가 순일한지 점검해 볼 수 있으니 울력이 좋다는 것이지.”

추금이 내원사 선방을 찾은 것도 경허의 제자 혜월이 흘리고 간 가풍을 훈습하여 거듭 발심하고자 해서였다. 참선공부의 지름길은 간절하고 치열한 정진에다 눈 밝은 선지식을 만나는 것이 필수였다.

김사의는 지게에 장작을 지고 가는 노승이 외할아버지임을 한눈에 알아보고 달려갔다. 추금도 김사의가 무사히 내원사에 도착한 것에 마음을 놓았다.

“외할아버지 스님!”
“오냐, 어서 오너라. 기다리고 있었다.”
“지게 주세요. 제가 나무를 나를게요.”
“아니다. 이제 다 날랐다.”
“큰절 받으십시오.”
“중이 합장만 받으면 됐지 무슨 절까지 하려드느냐.”
“성호스님께서 꼭 절하고 이 보따리 안에 든 장삼을 드리라고 했어요.”
“성호스님은 건강하더냐.”
“네. 그런데 쌀쌀맞아요. 정이 뚝 떨어졌어요.”
“허허. 중은 냉랭해야 한다. 정이 많으면 도가 발붙이기 힘든 법이다.”
“외할아버지 스님. 정도 닦고 도도 닦으면 더 좋을 것 같아요.”
“이놈 봐라. 네 아버지 닮아 인정이 많구나. 자, 어서 부엌으로 들어가 장작불을 피우자. 이곳은 산속이어서 봄이라 하더라도 한밤중에는 겨울처럼 춥단다.”
“불은 제가 땔게요. 어머니가 절에 간 뒤부터 제가 2년 동안 부엌살림을 한 걸요.”
“네 아버지는.”
“참선하신다고 끼니때에도 방에서 벽만 쳐다보고 계셨어요.”

추금은 외손자가 애처롭게 보였던지 한 팔로 김사의의 어깨를 감싸주었다. 성호는 추금의 속가 큰딸이기도 하지만 김사의에게는 사랑을 주어야 할 친어머니인 것이었다. 추금은 자기 딸이지만 성호의 성품이 봄바람처럼 부드럽기보다는 칼바람처럼 차갑기만 하여 어린 외손자가 얼마나 섭섭했을까 싶었다.

김사의는 고사리 같은 작은 손으로 불쏘시개를 먼저 넣고 그 위에 장작 몇 개를 얹었다. 그리고는 재속의 불티를 호호 불어 불을 살려냈다. 소나무 낙엽 불쏘시개는 탁탁 소리를 내며 탔고 장작도 금세 불이 붙었다.

두 사람은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장작불을 쬈다. 그제야 김사의는 발바닥이 따끔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양산읍에서부터 쉬지 않고 걸은 거리가 무려 30리나 되었다. 어린 김사의에게 혼자 걷기에는 먼 거리였다. 김사의가 노곤하여 자신도 모르게 눈을 붙이려 하자, 추금이 장작을 두어 개 더 아궁이 속으로 집어넣으며 말했다.

“이 내원사는 혜월 큰스님이 계시면서 절다운 절이 됐다.”
“혜월 큰스님이 어떤 분이신데요.”
“경허 큰스님의 제자지. 경허 큰스님에게는 세 분의 제자가 있단다. 수월, 혜월, 만공스님이지. 수월스님은 북방으로 가셨고, 만공스님은 충청도에 계시고, 혜월스님은 남방으로 내려오시어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단다. 세 분은 모두 달처럼 컴컴한 세상을 밝히는 분들이지. 그래서 우리나라가 동서남북으로 밝은 것이야.”

장작불이 세어져 김사의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붕알이 녹아버린 게구나. 뒤로 도망치는 것을 보니. 어디 한 번 만져볼까.”
“외할아버지 스님, 그러시지 말고 혜월 큰스님 얘기해 주세요.”

김사의의 재촉에 추금은 눈을 끔벅거렸다. 그러더니 천천히 내원사 선방에 전해지고 있는 혜월의 일화를 꺼냈다. 추금은 혜월이 파계사 성전암에서 사람들에게 ‘천진불’로 불리던 이야기부터 했다.

그때 혜월은 동자승을 하나 데리고 있었는데, 동자승을 부처님처럼 여기어 ‘큰스님’이라고 공손하게 부르곤 하여 찾아온 사람들을 당황하게 했다. ‘큰스님, 공양합시다’라거나 ‘큰스님, 아래 절에 다녀오겠습니다’라고 하니 사람들이 어리둥절해 했던 것이다. 그러나 혜월은 동자승을 부를 때마다 누가 있건 없건 간에 큰스님이라고 고집해 불렀다. 티 없이 맑은 아이의 마음이야말로 수행자가 도달해야 할 마음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혜월은 천성산 내원사에 이르러서는 사람들에게 ‘개간 선사’라고 불렸다. 자갈땅이든 산자락이든 버려두지 않고 개간하여 곡식을 심어 거두기에 ‘개간 선사’라고 했다. 소처럼 밤낮으로 손에 괭이를 들고 일만 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선방 대중이 먹을 양식을 비축하기 위해 농부에게 절에서 키우던 소를 팔아버렸다. 이에 주지가 낙심하자, 혜월은 갑자기 장삼을 벗고 엎드려 ‘음매 음매’ 하고 소 흉내를 냈다. 소처럼 일만 하는 자신이 있으니 소는 없어진 것이 아니라는 경책이었다.

마침내 혜월은 내원사 주변의 산자락 2천 평을 개간하여 논밭을 일구었다. 물욕이 있어 논밭을 불렸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공부보다는 울력만 하니 혜월을 향해 불평하는 대중도 있었으나 곧 마음을 돌렸다. 어느 날, 혜월의 욕심 없는 마음을 보고나서였다. 절에서 논 세 마지기를 마을 사람에게 팔았는데, 혜월은 뜻밖에도 논 두 마지기 값만 받고 돌아온 것이었다. 주지는 혜월의 계산을 이해할 수 없었다.

“조실스님, 마을 농부에게 속은 것입니다.”
“마을 농부는 나를 속인 일이 없다.”
“어찌 논 세 마지기를 파시고 두 마지기 값만 받아 오신단 말입니까.”

혜월은 대중을 큰방으로 불러들인 후 조용히 꾸짖었다.

“논 세 마지기는 그대로 있고, 여기 두 마지기 값이 있으니 다섯 마지기가 아니겠느냐! 욕심 없는 승려의 장사는 이렇게 해야 한다.”

논 세 마지기 값을 받으러 갔다가 논 한 마지기 값을 성실하게 사는 농부에게 보시하고 돌아온 혜월에게 아무도 대꾸를 못했다. 혜월은 천진하고 욕심 없는 그런 큰스님이었다.

“사의야, 내가 왜 혜월스님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아느냐.”
“모르겠습니다.”
“큰스님이 되는 길을 말해 준 것이다.”

추금은 갑자기 소리를 높여 게송을 읊조렸다. 혜월이 부산 범일동 안양암으로 거처를 옮겨가 77세로 숨을 거두며 남긴 임종게였다.

일체의 변하는 법은
본래 진실한 모습이 없네
그 모습의 뜻이 무상임을 알면
그것을 이름하여 견성이라 하리.
一切有爲法
本無眞實相
於相義無相
卽名爲見性

추금은 게송을 읊조린 뒤 김사의에게 큰 비밀을 하나 털어놓듯 말했다.

“네 큰외삼촌 법안(法眼)스님이 혜월 큰스님의 맏상좌다. 지금은 해인사 백련암에서 지장기도를 하고 있단다. 우리 집에서 가장 먼저 출가한 스님이지.”

김사의는 법안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김사의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출가한 외삼촌이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김사의는 큰외삼촌이 혜월의 제자가 된 것을 두고 가문의 자랑이라고 생각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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