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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주 장편소설 - 인연 9

기자명 법보신문

제2장 출가, 멀고도 가까운 여행

정찬주 장편소설  삽화·송영방

“『화엄경』 80권을 맷돌에 넣고 갈면 나중엔마음 심(心), 한 자만 남을 것이다. ”

목탁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들려왔다. 저녁공양 시간을 알리는 목탁소리였다. 추금이 부엌을 나서면서 말했다.

“절에서는 목탁소리를 잘 들어야 한다. 그래야 굶지 않는다. 누가 말해주지 않으니 늘 귀를 세우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추금은 공양간으로 가지 않고 법당으로 갔다. 김사의는 추금의 행동이 이상해서 물었다.

“할아버지 스님, 공양 시간이라고 했잖아요.”
“음, 나는 하루 한 끼만 먹는다.”
“저는 먹을래요. 배고파요.”
“절밥은 부처가 되기 위해 먹는 밥이다. 밥이 법(法; 진리)이 되어야 하느니 어서 가 먹어라. 먹고 나선 장작불 지핀 방으로 가거라. 나도 그 방으로 가마.”

추금은 법당으로 가서 기도를 했고, 김사의는 저녁공양을 한 뒤 장작불을 넣은 방으로 돌아왔다. 김사의는 밥을 한 그릇 더 먹고 싶었지만 발우를 깨끗이 비우고 말없이 일어서 나가는 스님들의 눈치를 보느라고 자신도 숟가락을 놓고 일어서고 말았다. 밥 먹는 분위기가 너무 엄숙해서 김사의는 시래기 국을 넘기거나 김치를 씹을 때도 소리를 죽였다.

‘내가 이런 데서 잘 살 수 있을까.’

김사의는 자신이 없어져 겁이 났다. 발우는 모두가 어찌나 깨끗이 닦았는지 반들반들 빛이 났고, 대중의 눈은 밥알을 하나라도 흘렸는지 모이를 찾는 묵은 닭처럼 간단없이 살피는 듯했고, 콧구멍은 고사리에 묻힌 들기름 냄새조차 빨아들이려는 듯 벌름거렸고, 입으로 들어간 음식은 소가 되새김질하듯 어금니에 잘근잘근 씹히어 목구멍으로 꿀꺽 넘어가곤 했다. 모두가 하나처럼 똑같은 모습이었으므로 덤벙대기를 잘하는 김사의는 스님들이 공양하는 태도만 보고도 기가 질리고 숨이 막히는 듯했던 것이다.

‘절이 정말 좋은 곳일까.’

문득 누나 응민이 떠올랐다. 공주사범대학을 졸업한 후 금강산 법기암으로 들어가 승려가 되고 나서는 집으로 찾아와 김사의에게 절이야말로 참된 인생 공부를 할 수 있는 곳이라고 으스댔던 것이다.

김사의는 낯선 방에서 엎치락뒤치락하다가 잠이 들었다. 추금이 저녁예불을 끝내고 왔을 때는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추금은 김사의에게 이불을 덮어주고는 방을 나갔다. 내일은 통도사로 가 김사의를 대강백 고경(古鏡)에게 맡기기로 돼 있었다. 말하자면 내일은 고경이 은사가 되고 김사의가 제자가 되는 날이었다.

고경을 은사로 삼기로 한 것은 속가의 가족들이 결정했다. 선사보다는 강백을 은사로 삼은 이유는 김사의가 세속의 공부를 더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였다. 보통학교를 졸업했으니 적어도 중학교 공부는 더 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다행히 통도사에는 절에서 운영하는 중학교가 설립되어 있었다.

추금이 김사의에게 고경에 대해서 얘기해 준 것은 다음날 통도사로 가는 도중이었다. 은사가 어떤 스님인지 알아야 존경심이 생길 터였다. 김사의는 아침공양으로 멀건 죽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추금을 따라 나섰는데, 마침 내원사를 나설 때부터 이슬비가 내려 두 사람은 도롱이를 걸치고 걸었다.

오랜 봄가뭄 끝에 내리는 이슬비였으므로 농부들에게는 단비였다. 차츰 빗방울이 굵어지면서 빗물도 불어나 고랑에 물이 차고 실개천에는 금세 물이 넘쳐 콸콸 소리치며 흘렀다. 도롱이가 비에 흠뻑 젖어버리자 추금은 빈 누각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비가 갤 때까지 쉬었다 가자.”
“어제 많이 걸어 발바닥에 물집이 생겼나 봐요.”
“내 발바닥을 보아라.”

누각 마루에 오르더니 추금은 자신의 발바닥을 김사의에게 보여주었다. 추금의 발바닥은 굳은살이 구두 굽처럼 박혀 있었다.

“나는 짚신이라도 신었지만 부처님은 평생 동안 맨발로 걸어 다니신 분이다. 수행자는 얼굴이 아니라 발바닥을 보면 도를 구하는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김사의는 더 이상 추금에게 투덜거리지 못했다. 추금에게 물집이 생긴 것을 핑계 삼아 쉬어가려고 했는데, 추금의 험한 발바닥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던 것이다. 추금이 안거할 선방을 찾아 10여 년 동안 걸어 다닌 곳은 주로 금강산 마하연과 덕숭산 수덕사, 영축산 통도사, 천성산 내원암 등이었다.

추금이 고경을 만난 곳은 통도사에서였다. 추금이 통도사 보광선원에서 서너 번 안거를 하는 동안 고경을 경내에서 오다가다 만났던 것이다. 고경의 불학(佛學)은 이미 이름난 강백들 사이에서도 우뚝하여 그가 펴는 강석(講席)으로 학인들이 줄을 지어 모여들 정도였다.
봄비가 쉬이 멈출 것 같지 않자 추금은 무료해진 김사의에게 고경을 얘기했고, 김사의는 누각 지붕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를 들으며 귀를 기울였다.

<네 은사되실 고경스님도 너와 마찬가지로 14살 때 통도사로 출가를 하셨다. 울주 땅에서 파평 윤씨 양반 자손으로 명민하게 태어났지만 조실부모하니 어디 의탁해서 공부할 데가 있어야지. 그래, 공부도 하고 배고픔도 면하려고 통도사로 출가한 것이야.>

고경의 은사는 기연(琪衍)대사였고, 그때 고경이 받은 법명은 법전(法典)이었다. 고경은 은사가 지어준 법전이라는 법명대로 유별나게 경전을 좋아했다. 경전 중에서도 『화엄경』을 읽고 또 읽었다. 표지가 너덜너덜 닳은 『화엄경』을 머리맡에 두고 자나 깨나 사경과 독경, 기도를 했다.

사경과 독경, 기도는 황홀한 삼매 속에서 이루어졌다. 한 나절의 시간이 한 순간에 흘러가버렸다. 사시예불을 끝내고 사경에 들어갔는데 깨어나 보면 어느 새 저녁예불이 시작돼 있곤 했다.

그러기를 몇 년 만에 고경은 『화엄경』 80권을 앞뒤로 줄줄 외우다시피 했다. 『화엄경』을 달통하고 나니 모든 경전의 부처님 말씀이 마음 심(心)자 하나로 회통되었다. 오직 마음 하나를 닦는 것이 수행이고, 오직 마음 하나를 밝히는 것이 불교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때가 고경의 나이 26세 때였다. 이윽고 고경은 통도사 대강백으로 추대되었고, 36세 때는 범어사로 강석을 옮겨 제자들을 길렀다.

그러자 강원의 강사들은 남북 2대 강사 중 한 분이라고 칭송했다. 금강산 유점사의 김일우(金一愚)스님이 북방대강사라면 고경은 남방대강사라는 것이었다. 당시 호남에서 활약하던 박한영(朴漢永)스님을 전국 7대 강사 중 한 분이라 하였으니 고경은 그보다 더 빛을 냈던 것이다.

고경은 다시 통도사로 돌아와 41세 때인 1923년부터는 금강계단에서 보살신도들에게는 불자가 지켜야 할 보살계를, 사미승들에게는 비구승이 지녀야 할 구족계를 주었다. 또한 고경은 자신의 법문을 서울에서도 듣고자 하므로 사간동 법륜사를 찾아가 많은 서울의 불자들에게 신심을 북돋아주었다.

고경의 이러한 면모를 두고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를 발간한 이능화는 고경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옛 거울 중의 호한이여(古鏡中之胡漢).

옛 거울(古鏡)이란 부처님 이후의 조사(祖師)를 말함이고, 호한(胡漢)의 호(胡)는 서역을 말함이니 천축에서 온 달마와 같은 전법승을 가리킴이었다. 그렇다면 전생에 천축에서 태어난 전법 비구승이었을지도 모르는 고경은 마침내 조선으로 건너온 또 한 명의 달마가 되니 최고의 찬사인 셈이었다.

비는 오락가락하더니 개려는 듯 하늘 끝이 파랗게 트이고 있었다. 발 빠른 농부들은 벌써 논밭으로 달려와 씨를 뿌리거나 물고를 손보고 있었다. 추금은 도롱이를 벗어 갠 뒤 걸망에 넣고 다시 김사의의 손을 잡아끌었다.

“저 산모퉁이만 돌면 통도사가 보인다. 어서 가자.”
“고경스님이 그렇게 유명한 스님인 줄 몰랐어요.”
“이놈아, 고경스님이 뭐냐. 큰스님이라고 불러라.”
“외할아버지 스님, 그러면 작은스님이 커서 큰스님이 되는 거네요.”

그러나 추금은 통도사 일주문이 보일 때까지 대답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럴수록 김사의는 궁금한 것이 많아져 견딜 수 없었다.

“외할아버지 스님도 『화엄경』 80권을 다 외우시겠지요. 출가하신 지 10년 다 되가니까.”
“『화엄경』 80권을 맷돌에 넣고 갈면 나중에는 마음 심(心), 한 자만 남을 것이다. 그러니 마음이 무엇인지 깨달으면 됐지 무슨 헛수고를 하겠느냐.”
“고경 큰스님께서는 헛수고를 한 것이네요.”
“아니다. 고경스님은 『화엄경』을 온몸으로 읽어 마음 심(心), 한 자를 깨달은 분이다. 말하자면 고경스님에게는 당신 온몸이 맷돌인 것이야.”

김사의가 또 다시 따따따 물어오자, 추금이 앞서가다가 걸음을 멈추고 벽력같이 소리를 질렀다.

“사의야!”
“네.”

추금의 위엄 있는 얼굴을 보는 순간 김사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추금의 두 눈에서 화살이 날아와 가슴에 꽂히는 듯했다. 외할아버지가 아닌 선승의 길을 걷는 추금의 본래 모습인 것 같았으므로 김사의는 등골이 오싹했다.

“너는 너무 말이 많다. 말이 많은 놈은 실천이 적은 법이다.”

추금은 주먹으로 김사의의 머리통을 치면서 다시 말했다.

“너는 네 집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남의 집으로 가고 있다. 네가 가는 집에 고경 큰스님이 있다, 이 말이야. 알겠느냐.”
“네.”

김사의는 ‘남의 집’이란 말에 기분이 이상했다. 추금은 일주문 안으로 들어서 다시 말했다.

“일본 사람들은 말이다, 아이를 점원으로 쓰기 전에 아이가 진실한지 아닌지를 이렇게 시험해보더구나.”

추금이 직접 본 것인지 누구에게 들은 얘기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내용인즉 이랬다. 아이가 잘 다니는 길에 돈이나 시계, 만년필 등을 놓아두고서는 아이가 그것을 주워 주인에게 갖다 주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확인해 본다는 것이었다. 김사의는 가슴이 뜨끔했다. 속가집에서 생활하는 동안 응민 누나나 월현 형님의 물건을 함부로 사용하곤 하여 두들겨 맞았을 때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의야, 내가 왜 이런 얘기를 너에게 하는 줄 알겠느냐. 네 것이 아닌 것에는 절대로 눈길도 주지 말거라. 네 마음속에서 진심이 달아나니까. 한 푼, 1전이라도 생기거든 큰스님에게 보여드리고 말씀드려야 한다.”
“외할아버지 스님, 절에 살면서 좌우명으로 삼겠습니다.”
“무엇을 좌우명으로 삼겠다는 것이냐.”
“첫째는 말을 적게 하고, 둘째 네 것이 아닌 것에는 절대로 눈길도 주지 않는다.”
“좋다. 그렇다면 너는 고경스님의 제자가 될 만한 아이다.”

추금은 일주문 안으로 들더니 통도사 경내를 향해서 합장을 세 번 하고는 더 빠르게 걸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추금이 그렇게 합장한 것은 금강계단의 사리탑에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어서였다.

고경이 머무는 방까지 가는 길은 송림 가운데로 나 있었다. 솔바람소리는 김사의의 온몸을 시원하게 비질해 주었다. 김사의는 가슴까지 맑아지는 기운을 받았다. 추금의 말대로 남의 집으로 단숨에 걸어온 길이었으나 왠지 편안했다. 남의 집이 아니라 내 집으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고경은 방에서 추금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 반갑게 맞이했다. 고경과 추금이 맞절을 한 뒤, 김사의가 고경에게 삼배를 올렸다. 잠시 후 추금이 말했다.

“외손자를 잘 부탁합니다.”
“근기가 있어 보이는 아이 같습니다. 일단 절에서 세운 중학교에 보내겠습니다.”
“앞으로는 스님 마음대로 하십시오.”
“내가 할 일이 딱히 있겠습니까. 불가의 대들보가 되는 것도, 서까래가 되는 것도 이 아이가 공부할 나름입니다. 하하하.”

추금은 차를 한 잔 마시고는 바람처럼 훌쩍 일어나 가버렸다. 김사의가 인사할 틈도 주지 않고 야속하게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이제 김사의가 천지간에 의지할 사람은 어머니 성호도 아니고, 외할아버지 추금도 아닌, 오직 통도사 대강백 고경뿐이었다.

그날 밤, 김사의는 성호가 시킨 대로 고경 앞에서 양복저고리를 벗어 주었다. 갑자기 양복저고리를 받아든 고경은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이것이 무엇이냐.”
“어머니 스님이 바느질로 꿰매면서 큰스님을 갖다 드리라 했습니다. 안감 안에는 돈이 들어 있습니다.”

고경은 김사의가 보는 앞에서 바느질로 봉해진 안감을 뜯었다. 그러자 방바닥에 돈이 쏟아졌다. 속가의 논밭을 팔아 김사의 몫으로 나눠진 8백원이었다. 거금이 방바닥에 쏟아졌는데도 고경의 표정은 무심했다. 잠시 후, 김사의에게 일타(日陀)라는 법명을 내리면서 희미하게 미소를 지을 따름이었다.

“일(日)은 불일(佛日)을 줄인 말이기도 하다. 부처님 지혜를 밝게 펴는 수행자가 되어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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