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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무왕이 세운 도시 익산은 법화·미륵사상 구현한 神都”

기자명 법보신문
  • 교학
  • 입력 2006.12.12 13:44
  • 댓글 0

조경철 동북아고대사연구소 연구원
‘백제 무왕 미륵사 창건배경’서 주장

<사진설명>백제 무왕과 선화 공주의 러브스토리를 소재로 한 SBS 방송의 드라마 ‘서동요’ 주인공 무왕.

삼국유사는 무왕이 과부인 어머니가 연못의 용왕과 사통하여 태어난 것으로 전하고 있다. 백제 국왕이 용왕의 아들이며, 수도가 아닌 변방지역 과부에게서 태어났다는 설화는 무왕의 출생과 왕위에 등극하는 과정이 순탄치 않았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무왕의 고향이자, 왕이 된 후에 선화공주와 함께 내려가 미륵사를 창건한 도시 익산은 법화·미륵사상을 바탕으로 건설된 군사·종교적 계획도시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조경철 한국학중앙연구원 동북아고대사연구소 전임연구원은 『내일을 여는 역사』 26집에 ‘왜 백제 무왕은 익산에 미륵사를 창건했나’를 발표했다.

조 연구원은 이 글에서 “익산은 백제에 있어서 군사적으로 수도 사비를 지원하는 배후도시 역할을 한 동시에 백제 무왕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하는 종교적 신성도시 즉 신도(神都)의 역할을 담당했다. 이 배경에는 백제불교의 큰 맥을 이루었던 법화사상과 미륵신앙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조 연구원은 “웅진 천도 이후 백제의 발전 방향은 남쪽이었고 그 축은 웅진·사비·익산이었다”며 “특히 사비의 남쪽에 위치한 익산은 사비가 공격을 당하게 될 경우 이를 후방에서 지원할 배후 도시의 역할이 중요했다”고 설명했다. 즉 개로왕 때 백제의 한성이 힘없이 무너지고 수습이 어려웠던 결정적인 이유가 배후도시가 없었기 때문에 사비 천도와 함께 백제 조정은 배후도시 건설에 주력했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정치적 혼란기에 등극한 무왕은 신도시에 정신적 구심점이 되는 사찰을 조성해 불국토 건설을 표방함으로써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하려 했다는 것이 조 연구원의 설명이다.

백제 성왕이 신라군에 의해 처참하게 목숨을 잃은 후, 왕위를 이어받는 대신 출가를 택하려 한 왕자 여창은 신하들의 만류로 왕위에 머무른 대신 100여명의 청년들을 출가시키고 능산리에 절을 세웠다. 위덕왕의 아우 법왕은 단 1년만에 왕위에서 물러나고 그 뒤를 이어 무왕이 등극했다. 삼국유사의 서동 설화는 이 과정이 결코 순탄치 않았음을 시사하고 있다. 왕위에 오른 무왕은 강력한 왕권을 표방하는 한편 사비의 후방에 위치한 익산에 미륵사를 창건했다.

성왕에서부터 법왕에 이르기까지 백제왕들의 계보는 법화경과 거의 일치한다. 법화경에서는 전륜성왕의 아들이 대통지승여래이며, 대통불의 열 여섯 아들 중 막내아들이 석가세존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백제불교의 주류가 법화사상이었고, 백제 성왕부터 무왕에 이르는 계보 또한 법화경에 근거하고 있다면, 익산에 세워진 사찰은 왜 하필 미륵사였을까.

조 연구원은 “법왕의 뒤를 이어 등극한 무왕은 자신이 고통스러운 현재를 구원해줄 수 있는 미래불, 즉 미륵불임을 자처하면서 국내외 갈등을 해결하고자 했고, 이 또한 법화경의 삼세불 사상에 근거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사진설명>백제 무왕의 '미륵불국토' 발원을 간직한 익산 미륵사지석탑.

사비 천도로 인한 귀족세력의 갈등, 잦은 왕위 교체로 인한 왕권의 약화, 출생의 한계로 인한 무왕 자신의 약한 정치적 입지를 극복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바로 미래불의 출현이었고, 이것이 익산의 신도건설과 미륵사의 창건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조 연구원은 “사비시대의 3대 사찰인 대통사와 제석사, 미륵사는 백제의 불국토신앙이 반영된 것으로, 웅진의 대통불국토, 사비의 석가불국토, 익산의 미륵불국토로 완성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법화경에 등장하는 삼세불의 출현과 사비시대 3대 사찰을 배치시킨 것이다.

조 연구원이 사비시대의 3대 사찰인 대통사와 제석사, 미륵사의 창건을 법화사상에 근거한 삼세불의 출현이라고 설명한 점은 기존의 연구와 크게 구별되는 점이다. 지금까지 공주 대통사는 양무제의 연호가 대통이라고 불리워진 것과 연관해 백제와 밀접한 교류를 맺었던 양무제를 기리기 위해서 세워진 절이라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었다.

하지만 조 연구원은 성왕과 위덕왕, 법왕의 이름이 법화경의 계보와 일치하는 사실에 주목하여 대통사, 제석사, 미륵사 등이 법화경에 근거한 왕실사찰이었으며, 나아가 익산이 고대 마한의 신시(소도)의 기능을 이어받은 고대 불신의 도시 곧 신도였다는 새로운 학설을 제시하고 있다.

탁효정 기자 takhj@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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