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창건주 연기대사 어머니說 500년만에 뒤집힐까”

기자명 법보신문
  • 교학
  • 입력 2006.12.18 10:41
  • 댓글 0

신용철 통도사博 연구실장
‘화엄사사사자탑 조영’발표

<사진설명>화엄사사사자삼층석탑 속 인물은 지금까지 화엄사의 창건주 연기 스님의 어머니라는 설이 통설이었다. 그러나 신용철 연구원은 이 인물이 화엄경의 사자빈신비구니라는 주장을 제기했다.

구례 화엄사에서도 지리산의 넉넉한 품이 가장 잘 보이는 효대(孝臺)에는 네 마리 사자가 탑신을 받들고 있는 석탑 하나가 서있다. 바로 국보 제35호로 지정된 화엄사4사자3층석탑(이하 화엄사석탑)이다. 탑 중앙부에 네 마리 사자들로 둘러쌓인 가운데는 가사를 걸친 스님이 서있으며, 탑과 마주보고 있는 석등에도 작은 잔을 든 또 한 명의 인물이 서있다. 서로 마주보고 있는 이 심상치 않은 인물들을 둘러싸고 조선시대 문인들과 근현대 학자들은 여러 설을 제기해왔다. 혹자는 화엄사 창건주 연기 스님과 그의 어머니를 새긴 것이라 했고, 혹자는 의상 스님이 중국 땅에 두고 온 도반 법장을 기린 것이라고도 했다.

그런데 최근 화엄사석탑이 화엄경에 근거하여 사자빈신비구니과 선재동자를 형상화한 탑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신용철 통도사성보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미술사학연구』 250·251권 합집에 「화엄사 사사자석탑의 조영과 상징-탑으로 구현된 광명의 법신」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 신 연구실장은 화엄사석탑 속 인물을 사자빈신비구니로, 석등의 공양상을 선재동자로 설명하고, “화엄사 전체가 부처님이 모든 대중을 사자빈신삼매에 들게 한 광명의 순간을 표현한 가람”이라고 주장했다.

사자빈신삼매는 범어를 한역한 것으로, 사자가 입을 크게 열어 위엄을 나타낸 삼매의 경지를 의미한다. 여래가 도달한 깨달음의 세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남효온 문집』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조선시대 문헌에는 이 석탑이 화엄사 창건주인 연기 스님과 그의 어머니를 형상화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설화에 근거해 후대 학자들은 화엄사 사사사석탑을 효(孝)와 관련하여 분석하고 화엄사 전체 가람구조를 불교와 유교의 효 사상에 맞추어 해석했다.

또 1971년 일본인 학자 나카기리 이사오(中吉功)는 화엄사의 중창에 의상 스님이 관여한 점을 주목, 의상 스님이 화엄사삼층석탑을 통해 법장 스님을 형상화한 것이라 주장했다. 즉 “탑 속의 인물은 중국 화엄의 3조이자 화엄경탐현기 등을 저술한 법장이며, 네 마리의 사자는 법장이 자신의 저술 ‘화엄금사자장’에서 언급한 장생전 내부 모서리의 4마리 금사자를 형상화했다”는 것이다.

신 연구실장은 이같은 주장들을 ‘공양탑 설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해석’이라고 지적하고, 현재 남아있는 사사자석탑들의 조성형태와 비교해볼 때 “화엄사삼층석탑은 화엄경 입법계품의 사자빈신삼매를 형상화한 것으로, 탑 속의 인물은 사자빈신비구니”라고 주장했다.

신 연구실장의 주장대로 네 마리의 사자가 사자빈신삼매를 형상화했으며 석탑 속 인물이 화엄경 입법계품에 등장하는 스님을 표현한 것이라면, 왜 하필 그 인물을 사자빈신비구니라고 단정지을 수 있는 것일까.

화엄경 입법계품에는 비구 5명과 비구니 1명 등 총 6명의 스님이 등장한다. 석탑 속 스님이 사자빈신비구니라면 그가 ‘여성’이라는 사실을 밝혀낼 필요가 있다. 신 연구실장은 화엄사석탑 속의 인물을 추적하기 위해 1022년 제작된 월악산 사자빈신사지 사사자석탑과 통일신라시대말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금강산 금장암지 사사자석탑 등 다른 사사자석탑을 역추적했다.

“사사빈신사지 사사자석탑의 인물상이 두건을 쓰고 있는 이유는 비구니이기 때문일 것이다. 금강산 금장암지와 월악산 사자빈신사지 사사자석탑의 상은 유독 가슴이 강조되어 여성상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고려대장경 목판본 화엄경 입법계품 변상도에도 사자빈신비구니는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다. 화엄사석탑의 경우 머리에 두건을 쓰지 않고 민머리를 들어내고 있다. 송대에 제작된 입법계품 변상에도 사자빈신비구니가 두건을 쓰고 있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이로 보아 비구니상이 두건을 쓰지 않는 모습에서 두건을 쓰는 모습으로 변모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금장암지와 사자빈신사지에 남아있는 사자빈신비구니의 모습은 두건을 쓴 비구니로 표현되었지만 이보다 먼저 제작된 화엄사석탑에는 두건을 쓰지 않은 비구니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사자에 둘러쌓인 인물이 사자빈신비구니라면, 탑과 마주하고 있는 공양석등의 공양자는 자연스럽게 선재동자로 설명될 수 있다.

“입법계품에는 선재동자의 집에 500개의 보기(寶器)가 있어 각 그릇마다 갖가지 보배스러운 물건들이 가득하다는 부분이 등장하는데, 따라서 공양자상이 든 보주는 선재동사의 보기 중 하나”라는 것이 신 연구실장의 설명이다.

또한 연하장사자좌위에 앉아 사자빈신삼매에 들고 있는 주체는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 즉 법신불이 된다. 법계의 경계를 알기 원하는 모든 대중들을 위한 불타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신 연구실장는 나아가 “화엄사의 가람배치가 입법계품의 클라이막스라 할 수 있는 불타가 모든 대중을 사자빈신삼매에 들기 위하여 대광명을 발하는 순간, 즉 화엄불국토의 완성”이라고 설명했다. 화엄사석탑은 일반적인 석탑의 위치, 즉 금당 앞에 위치하는 대신 화엄사에서도 가장 경관이 좋은 서북쪽 언덕(효대)에 위치해 있다. “화엄사 사사자석탑이 화엄사 전체 가람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한 것은 바로 사자빈신삼매 속에서 발하는 깨달음의 빛을 화엄사 전체에 내려 비추는 의도에서 조탑된 것이며, 사사자석탑과 장육전, 화엄석경은 동시대에 동일한 사상체계에 의해 건립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신 연구실장의 설명이다.

신 연구실장의 설명대로 화엄사석탑이 사자빈신삼매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이때 화엄사 가람은 불보살과 오백성문, 천왕, 천인 등과 티끌 수의 부처님이 상주하는 서다림(제다의 숲)이 된다. 

탁효정 기자 takh@beopbo.com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