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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GO 활동하는 사업가 김광하 씨

김포 외국인상담소 설치 적극 후원

외국인 노동자 임금체불-산업재해 해결 앞장

『쌍윳따니까야』 등 경전 번역-출판도 나서


꼭 20년만이었다. 그동안 불교를 떠나본 적이 없다고 생각했었지만 상대적으로 밀려드는 공허함과 허탈감만은 어쩔 수 없었다. 그토록 오랜 세월을 무엇을 위해 그토록 먼 길을 돌아와야만 했을까. 무엇에 쫓겨 그리 정신 없이 달려와야 했나. 그러나 후회는 없다.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고 어쩌면 그것 또한 자신이 겪어야만 했던 긴 여정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까닭에 지금의 날들이 한없이 소중하고 기쁠 뿐이다.

여운(如雲) 김광하(50) 씨가 불교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 70년대 초였다. 연세대 경영학과에 재학 중이던 그는 처음 노장사상이나 유교 등 동양철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서양의 종교와 철학에서는 찾을 수 없는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동양철학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가 2학년 때인 71년 자유교양회라는 독서모임의 회장을 맡으면서 이러한 그의 관심은 불교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어졌다. 불교를 주제로 회원들과 밤새워 토론하기도 수십 차례.

그해 여름방학에는 아예 절에서 생활해야겠다는 각오로 대구 동화사 말사인 양진암을 찾았다. 그곳 암자에서 생활하던 중 당시 통도사에 계시던 경봉 스님이 동화사에서 법문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고, 자의반 타의반 스님의 법문을 듣게 됐다. 그 때 들은 불이(不二) 법문은 이후 그의 인생관을 결정짓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불교는 고리타분한 과거의 옛이야기가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최고의 진리라는 확신이었다.

서울로 돌아온 그는 불교공부에 더욱 매진했고, 기독교 재단의 대학임에도 ‘불교연구모임’이라는 불교학생회를 구성해 공부와 신행을 병행했다. 이런 가운데 당시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회장이었던 전재성 씨의 요청으로 ‘불교의 현대화’라는 주제의 세미나에 참석해 발표하기도 했다.

그당시 민중불교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 고은, 황석영, 여익구, 전재성 씨 등과 함께 개운사에서 모임을 갖던 중 경찰서에 연행돼 심한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렇게 대학생활은 흘러갔고 수행에 관심이 있던 그는 졸업과 함께 당시 부산 보림선원에서 선(禪)을 지도하던 백봉 김기추 거사를 찾아가 수행에 전념했다.

1년 6개월 정도 됐을까. 부모님의 걱정과 성화로 취직할 수밖에 없었던 그는 이왕이면 주말이라도 불교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외국인 회사에 취직했다. 그 때가 78년이었다. 직장생활을 하며 공부도 하고 수행도 했지만 하루하루 불교에서 멀어지고 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지난 87년 도이상사라는 작은 무역회사를 시작하면서부터는 더욱 그런 회의는 더욱 깊어만 갔다.



민중불교에 심취…경찰서 연행 고초

그런 그가 다시 불연(佛緣)을 맺은 것은 햇살이 물엿처럼 녹아들던 지난 97년 여름이었다.

그가 속해 있는 로터리클럽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의 인권보호활동을 펼치고 있는 김해성 목사를 초청해 강연회를 가졌다. 한국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가 3만여 명에 이르고 있다는 점과 그들이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심한 노동착취에 시달리고 있다는 전언이었다. 비록 큰 규모는 아니지만 외국과 교역하는 일에 종사하는 그로써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너무 무심했었구나 하는 자책감과 함께 불교계에서도 이런 일을 하는 곳이 있다면 도와야겠다는 서원을 세웠다. 강연회가 끝난 뒤 이곳 저곳 수소문한 끝에 찾은 곳이 바로 외국인 노동자인권문화센터였다. 처음에는 후원만 하다가 얼마 후 운영위원으로 참여해 본격적으로 외국인 노동자 문제에 뛰어들었다.

무역상사를 경영하는 그가 시간을 낼 수 있는 시간은 주말 뿐. 매주 토요일이면 어김없이 외국인 노동자들과 만났다. 그러면서 마주해야 했던 것은 그들이 참혹한 현실이었다. 옷염색 일에 종사하던 선재구릉이라는 30초반의 네팔 노동자는 염색약의 심한 독성으로 인해 폐암에 걸린 상태였다. 당장 수술을 받지 않으면 목숨까지도 위태로웠다. 인권문화센터의 정진우 실장 등과 함께 모금운동을 벌인 결과 수술비를 마련했고, 다행히도 완치될 수 있었다.

그러나 월남 노동자인 리반친의 경우 백혈병이 걸렸지만 비싼 수술비용으로 인해 수혈만 해주었을 뿐 결국 병든 몸을 이끈채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예전보다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임금체불, 산업재해, 폭행 등 인권침해를 받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권유린의 원인은 자기만 잘 살아보겠다는 지독한 이기주의의 산물 아니겠습니까.”

지난해 12월에는 외국인 노동자가 가장 많이 밀집해 있다는 김포지역에 그들이 어려움을 토로하고 쉴 수 있는 상담소를 마련했다. 임금체불, 산업재해 등 상담활동은 물론 한글 및 컴퓨터 교육을 실시하고 있으며, 곧 무료진료도 실시할 계획이다.



수행시간 확보위해 외국인회사 취직

그가 외국인 노동자를 돕기 위해 경불련의 자주 찾을 무렵 그의 인생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또 하나의 인연과 만나게 된다.

그가 바로 전재성 박사다. 70년대 초 처음 알게된 후 함께 불교활동을 하기도 했지만 군사정권 하에서의 지독한 탄압으로 인해 각자 다른 길을 걸어가야 했었다. 김 씨가 직장을 택한 반면 전 박사는 독일 유학의 길에 올랐다. 그렇게 20여 년이 지난 뒤 우연히 경불련에서 만난 것이다. 전 박사는 80년대 말 귀국한 직후부터 한역경전의 아함부에 해당하는 팔리 경전인 니까야를 꾸준히 번역해오고 있었다.

그는 전 박사가 번역한 「쌍윳따 니까야」를 한 권 한 권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전쟁과 살육의 시대에 맞서 평화와 생명존중을 부르짖었던 부처님을 만날 수 있었다.

젊은 날 아함경을 보면서 윤리적인 측면을 강조한 낮은 단계의 경전이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구체적인 사건 속에서 만나는 부처님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분명하고 알기 쉽게 제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전 박사가 대단히 열악한 조건에서 번역에 종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급기야 자신이 교정과 윤문을 보겠다고 자처하고 나섰다. 이 만남으로 김 씨가 생생한 부처님의 육성을 만날 수 있었다면, 전 박사는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해주는 평생 도반을 다시 만난 격이었다.



외국인노동자문화센터에서 인권활동 시작

그들은 번역과 관련해 일주일에도 몇 번씩 토론으로 밤을 지새웠으며, 특히 김 씨는 전 박사가 번역한 내용들을 교정하고 윤문하기 위해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다. 그렇게 「쌍윳따 니까야」는 한권씩 번역돼 갔고 지난 1월 마침내 11권의 방대한 분량을 모두 완역할 수 있었다. 지난해 1월 전 박사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거지성자 페터 노이야르 선생과 함께 한 3개월은 무소유의 삶이 무엇인지를 여실히 체험할 수 있는 기회였다.

이제 그는 무역회사를 운영하는 사업가에서 외국인 노동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NGO활동가로, 경전번역을 기획하고 교정하는 출판인으로서의 삶이 더 이상 낯설지 않다. ‘나는 부자 아빠를 꿈꾼다’는 한 광고문구와 달리 더 이상 ‘그는 부자 아빠도 꿈꾸지 않는다’.

이제는 무소유와 비움이 더 이상 우리 사회의 미덕이 아닐지라도 그 같은 삶을 포기할 때 최소한의 너그러움과 넉넉함마저 사라져버린다는 것을 잘알고 있기 때문이다.



글·사진= 이재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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