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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면목이야 변함 있으랴

기자명 법보신문

이원섭시인의 선시를 찾아서 ⑭사자존자의 머리

소위 천축이십팔조(天竺二十八組) 중의 한 사람에 사자존자(師子尊者)라는 분이 있었는데, 계빈국(인도의 나라 이름)의 왕이 칼을 들고 찾아가 물었다.

“오온(五蘊)이 공하다는 도리를 얻었는가”

“얻었다.”

“그렇다면 생사를 여의었다는 말이 되는데?”

“그렇다. 생사를 여의었다.”

“그럼 부탁이 있는데, 머리를 내게 줄 수 있겠는가.”

“몸도 내 것이 아니거늘 무엇이 아깝겠는가.”

이에 왕이 칼을 들어 내려치자 사자존자 몸에서는 우유같은 흰 피가 치솟고, 때를 같이하여 왕의 팔도 땅에 떨어져 땅에 뒹굴었다.



이 화두를 어떻게 볼 것인가. 용문청원(龍門淸源)의 게송부터 읽어보자. 오조법연(五祖法演)의 제자인 그는 조정에서 하사받은 불안(佛眼)이라는 이름을 따서 ‘불안청원’으로도 일컬어지는 선사다.



양자강변 양류(楊柳)에 봄이 무르익어서

양류의 꽃 나그네의 애를 끊노니

누가 부는 피리이랴 날도 기울고

이제 그댄 소상에 가고 나는 장안 갈 때어라.

揚子江頭楊柳春 楊花愁殺渡江人

一聲羌笛離亭晩 君向瀟湘我向秦

○楊柳. 갯버들. ○愁殺. 시름을 젖게 함. 殺(쇄)는 강조하는 조자. ○羌笛. 오랑캐가 부는 피리 소리. ○離亭. 이별의 술잔을 나누고 있는 정자. ○晩. 날이 저무는 것. ○瀟湘. 호남성 동정호의 남쪽에 있는 소강과 상강.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어서 둘을 하나로 하여 부르는 일이 많다. ○秦. 여기서는 장안(長安)을 일컫는다.



먼저 털어놓지만 이것은 만당(晩唐)의 시인 정곡(鄭谷)의 작품이다. 전당시(全唐詩)에 실린 것과 글자가 달라진 곳이 약간 있지만, 이는 인용하면서 제 기호에 맞게 고쳐서 읊조린 것일 뿐 내용과는 관계가 없다. 그렇다면 명성이 자자한 선사인 주제에 이 무슨 표절이냐고 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주조차도 한 낱의 티끌로 보는 선사들에게는 저작권 따위는 아랑곳할 바가 못되는데다가, 그들의 손에 들어가 쓰일 때에는 한 줄기의 풀이 장륙신(丈六身)으로 바뀌듯 원작은 불법의 차원에서 새로운 변신을 성취하고 있는 것이니까, 이용당해서 고마워해야 할 것은 원작자의 몫이 되어버린다.

그러면 어떤 변모가 이루어졌는가. 원시가 보여 주는 것은 극도의 센티다. 당(唐)이라는 제국이 멸망을 향해 가속도로 굴러가고 있던 시대상이 반영된듯, 여기에 나타나 있는 것은 구성진 감정의 범람과, 언어의 구사에서 보여 주는 말단적인 기교로의 경사 뿐이다. 양자강·양류·양화… 하면서 ‘양’이라는 음이 포개진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음악적 효과는 크게 내는 데 성공했지만, 강정처럼 그 속은 공허하다. 그리고 다시 어디선지 들려오는 피리 소리와, 이별을 재촉하는 듯 저물어가는 시간까지 등장시키고 나서 두 사람의 헤어지는 장면으로 마무리를 짓는 솜씨를 발휘했는데, 서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운명 속에 있는 처지라 슬픔은 극한점에 이른다. 슬퍼하되 센티에는 안 빠진다(哀而不傷)는 잣대는 들먹일 처지가 되지 못한다.

그러면 용문청원에 의해 이 시는 어떻게 변화했던가. 그 끔찍한 살인사건은 버들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봄 풍경임이 되었다. 모든 것이 공하다 함이 불교의 근본을 이루는 진실이라면, 이 진실의 세계(眞如)에 파문을 일으키는 악이란 존재할 리 없는 까닭이다. 그렇다고 악과 그 과보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까지 포함해 일체가 공해짐이 진여의 시각인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댄 소상에 가고 나는 장안 갈 때’라는 두 사람의 이별도 각자 자기의 본래면목을 찾아나서는 색체를 띄기에 이르니, 계빈국왕인들 삼십이상(三十二相)을 구비한 그 본래면목에야 일찍이 어떤 변동이 있어 왔겠는가.

같은 시면서도 도인의 손에 들어가자 이리나 달라졌다. 돌이건 나무 토막이건 손에 닿는대로 황금으로 바뀌어지는 듯한 솜씨다. 대단하지 않은가.



〈시인·불교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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