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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발심수행] 조사선 수행 주경림 씨 [하]

기자명 법보신문

지루하던 경전이 연애소설 같아

경향 각지에서 도반들이 지리산에 모여 여름 정진법회를 열었다. 나는 갈피가 잡히지 않는 ‘이것’을 잊어버리고는 오랜만에 출몰한 은하수도 보고 물소리도 들으며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다. 저녁 무렵 멍하게 대나무 숲가에 서 있었다. 개구들이 엄청 큰 악다구리 소리로 울어대고 있었다. 마침 그 옆을 지나가시던 선생님께서 갑자기 물으셨다.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엉겁결에 불쑥 나도 모르게 대답이 나와 버렸다. “개구리 소리 아닙니까?”
나의 당연하다는 이 답변에 선생님께서, “그래요? 나는 새소리인 줄 알았습니다!”
어쩌면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오히려 반문하는 것이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떤 썰렁한 것이 가슴을 쓰윽 스치고 지나가는데, 무엇을 놓쳐버린 듯 너무도 안타까웠다. 하지만 깜깜 무소식이었다. 분명 무엇이 지나갔는데, 이게 뭐지? 이게 뭐지? 나는 심연처럼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못내 아쉬웠다.

다음 날 밤 법회 시간, 법문이 유난히 또렷이 들리고 몰입이 잘 되는 것 같았다. ‘지공선사의 십이지송’ 법문이 며칠째 계속되었다. 그런데 흘러가는 법문 중에 ‘캄캄한 밤에 손전등이 땅을 비추는데, 빛이 저한테서 나온 줄을 모르고 오히려 땅에서 올라온다고 착각한다’는 말끝에 그만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다. 한 순간도 아니고 영원한 시간도 아니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무엇이 관통한 듯 했다. 문득 내가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온 세상도 녹아서 없어져버렸다. 가슴이 뻥 뚫려버리고 머리를 제거해버린 듯 텅 비었다. 그저 정체모를 눈물만이 하염없이 흘러나왔다. 손이 사라지니, 붙잡는 것마다 모두 진실할 뿐이었다.

한 달이 지나가도 여전히 나는 평화로운 기쁨으로 벅찼다. 나는 이것이 고양된 심리상태이거나 착각일지도 모른다며 스스로 꼬집어보았다. 한편 밝고 또렷한 이것이 사라질까봐 염려하기도 했다. 살아오며 가슴에 응어리졌던 온갖 감정의 옹이들과 심리적인 찌꺼기들이 사라지고 안정된 상태가 계속되었다. ‘만법유식’ 같은 불설이 ‘이것’에서 확인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있는데 없으며, 없는데 있다는 관문이 사라짐으로써, 어록을 위시한 논장들도 예전과는 비견할 수 없을 만큼 소화가 잘 되었다. 경전의 말씀과 선(禪)은 상동(相同) 관계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평소에 지루하게 느껴지던 ‘원오심요’도 예전에 연애소설을 읽던 것처럼 재미있고 무엇이 가슴을 탕탕 치는 듯 했다. 이젠 좋아하던 시(詩)도, 이런 저런 이치도, 정치적 견해에도 붙잡히지 않게 되자 번민의 굴레를 벗어나 큰 깃털(鴻翼)처럼 가벼웠다. 그저 직장이나 집에서 바쁘게 일하지만 마음은 한가했다. 물론 예전의 습성에 이끌려서 술자리나 분별사량을 일삼는 담소자리에 끼기도 하지만 금방 이것이 확인되었다. 이것은 자전거를 탈 줄 알면 타는 법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과 같았다.

선생님께서는 이것을 확인하는 것, 실재를 체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면서도 입학에 불과하다고 했다. 초발심과 하심으로 정진하길 독려하셨다.

흔히 “뛰어봤자, 부처님 손바닥!”이라고들 말하는데, ‘부처님 손바닥’이 무엇인가? 여기서 잔꾀를 부리며 날뛰는 손오공을 거머쥔 부처의 신통력을 본다거나, 부처라는 절대적 인격과 심오한 사상을 구한다면 망상에 떨어진 것이다.

나도, 그리고 우리 도반들도 좀 더 선생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며 한 가지 좋은 소식이 당도하길 기다려본다.

(55, 부산, 해운대공고 국어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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