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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강에서 달을 보다]전 해인율원장 무관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계율의 강물에 몸을 담그라

원효 ‘무애’-혜능 ‘무상게’ 인용 막행막식-‘不持戒’ 절대 안 돼
계·정·혜는 셋이 아닌 하나요 지계없인 선정 힘도 약할 뿐

부처님이 사위국 기원정사에서 대중 설법을 하실 때 한 바라문이 “나는 부처보다 더 청정하고 훌륭하다”며 손타리 강에서 목욕을 하자고 제안했다. 이유인 즉, “복과 광명을 주는 강이므로 거기서 목욕을 하면 모든 죄가 없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자비로운 마음으로 죽이지 않으며, 진실을 지켜 거짓이 없으면 그것이 진정으로 깨끗한 것이다. 그대는 ‘계율의 강물’에 목욕 하라. 그러면 반드시 편하고 아늑하게 될 것이니 굳이 강물에 갈 필요가 없다.” 이에 바라문은 부처님을 찬탄하며 제자가 되어 수행정진 한 결과 아라한에 이르렀다. 바로 강측(江側) 아라한이다.

계정혜 삼학등지(戒定慧 三學等持)는 수행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말이다. 지계를 청정히 하고 있어야 선정 삼매에 들 수 있고, 선정삼매를 얻어야 반야지혜가 발현된다고 하지 않는가.

계정혜 삼학등지의 참 의미를 묻기 위해 사자산 법흥사를 찾았다. 해인사에서 율원장을 지냈던 무관 스님이 얼마 전 해인사에서 법흥사로 자리를 옮겨 정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1973년부터 강단에 섰던 스님은 1981년 조계종 단일계단 설치 이후에도 해인사 강주와 조계종 교육원 교재편찬위원장, 해인사 율원장 등을 역임했다.

조계종은 청정승가 구현을 위해 계율의 중요성을 부각하며 포살법회를 정례화 하고 있지만 아직도 승가를 보는 세간의 시선은 곱지 않다. 무관 스님 역시 승가의 계율 정신에 일침을 놓았다.

“원효 스님의 무애행과 작금의 막행막식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흔히 경허 스님을 예로 들며 ‘계율에 묶이는 것 또한 속박’이라며 ‘걸림 없이 살아야 한다’는 말을 서슴지 않는데 당치도 않는 말입니다. 원효, 경허 스님이 이룬 경지에 가 보았습니까? 세간에서 회자되고 있는 그 분들의 ‘걸림 없는 삶’은 대중들을 진리의 길로 인도하기 위한 방편의 일부였을 뿐입니다.”

일각에서는 육조 혜능 스님의 ‘무상게’를 일명 ‘무상계’로 잘못 이해하는데 기인하고 있다고도 보고 있다. “마음이 평탄하면 어찌 계를 지키려 애 쓸 것이며(心平何勞持戒) 행동이 바르면 선을 닦아 무엇에 쓰겠는가.(行直何用修禪)” 정말 지계도 수행도 필요 없다는 뜻일까?

“보살계 법회를 할 때 수계식에 앞서 ‘심지법문’을 합니다. 육조 혜능 스님이 계단에서 설한 심지법문을 후학들이 편집해 세상에 내 놓은 것이 바로 『육조단경』입니다. 심지법문에서 내린 사자후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보조 스님이 주창한 ‘정혜쌍수’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보조 스님 시대 이전에는 삭발염의하고 계율만 지키는 스님이 많았습니다. 이에 보조 스님은 계율을 지키는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정혜’를 닦아 깨달음의 길로 들어서자는 주장을 강도 높게 펼쳐 보인 겁니다. 혜능, 보조 두 스님 모두 계율이 필요 없다고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달마 스님이 계율을 말하지 않은 이유를 밝힌 중봉(中峰) 선사와 일맥상통 한다. 중봉 선사는 “근본 종지만을 투철하게 하려는 것이었고 제자들을 믿었기 때문”이라며“애초에 계율을 지키지 않고 부처님의 심종(心宗)을 전수했다는 소리는 내 아직 들어 본 적이 없다”고 설파했다. 달마 문하 제자들은 이미 계율을 철저히 지키고 있었던 상근기 수행인들이었기 때문에 계율 수지를 굳이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선가로부터 ‘화두만 타파해 깨달으면 그만’이라는 말도 들린다. 삼학과 깨달음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 무관 스님은 일단 ‘지혜’는 닦아가는 것이 아니라 발현되는 것이기 때문에 ‘돈수’라고 설명한다. 반면 계와 정은 닦아가야 하는 ‘점수’다.

“『유교경』이나 『능엄경』만 보아도 삼매를 경유하지 않으면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청허 스님의 『선가귀감』에서도 ‘계의 그릇이 온전하고 견고해야 선정의 물이 맑게 고이고 거기에 지혜의 달이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마음에 악한 게 없으면 계요, 산란하지 않으면 정이고, 맑은 판단을 할 수 있는 게 지혜입니다. 지혜는 본래의 마음이 대상과 부딪혔을 때 최종적으로 내리는 판단입니다. 지혜를 증득했다고 하나 이후의 모든 대상과의 부딪힘에도 언제든지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한다면 아직 지혜는 제대로 발현된 게 아닙니다. 또한 지혜가 발현됐다면 실천이 따라야 합니다. 말 따로 실천 따로라면 이 또한 갈 길이 멀고도 멀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결국 계정혜는 셋이 아닌 하나입니다.”

무관 스님은 승속을 막론하고 간혜의 눈으로 이해한 불법으로 자신을 위한 변명과 억측이 난무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간혜(乾慧)란 ‘마른 지혜’라는 말로 생사 이치는 알아도 자유롭지는 못해 참다운 지혜를 발현하지 못하는 ‘알음알이로 이해한 단계’라 할 수 있다.

“전국에 교양대학이 많고 불교관련 교리서와 철학서가 많이 출판돼 있어 불교를 이해하고 사유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많이 알고 있다는 오만으로 인해 독선적인 해석을 내놓으며 잘못된 견해를 대중에게 주지시키려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오히려 이 분들한테는 ‘아는 게 병’이 된 셈이지요. 작금의 불교를 들여다보면 간혜는 넘쳐나는데 계율과 선정은 너무 희박한 실정입니다.”

무관 스님은 한국 불교의 병통 중 하나로 ‘지범개차’를 꼽았다. “오계와 십계 등을 받아 지니고, 범함과 열고 닫음을 잘 알아야 한다.(受五戒十戒等 善知持犯開遮)”는 수승한 이 법을 악용한다는 것이다.

“대의와 선의를 위해 잠시 계를 범할 수밖에 없는 경우에 한해 지범개차를 써야 하는데 지계정신이 해이한 상태에서 계를 범하고는 열고 닫는다 하니 문제입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포살 자자’를 더욱 견실히 하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포살법회에서 행하는 참회도 상중하 참회 세 단계로 나뉩니다. 상참은 적어도 네 명의 대중이 있는 가운데 이뤄져야 하며 중참은 한 명, 하참은 스스로 인정하고 뉘우치는 것입니다. 상·중참에서는 자신이 범한 잘못을 솔직하게 꺼내 놓고 참회할 뿐만 아니라 대중이 그 참회를 인정해야 일단락 됩니다. 하참은 스스로 인정하고 참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큰 잘못을 저지르고도 꺼내 놓지 않거나, 상·중 단계에서 뉘우쳐야 할 일을 스스로 하참이라 변명하고 참회했다고 한다면 이는 부처님이 설한 계율 정신을 크게 위배하는 행위입니다.”

조계종 계율교육 너무 미비 비구계 수지 후 율장 안 봐
계율 범할까 두려워 해야 ‘지범개차’ 악용도 근절 돼

부처님이 계를 수지케 한 이유와 근본 의미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승가를 청정하게 유지하고, 수행을 여법하게 하며, 불법이 오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 계율인데 이를 외면하거나 왜곡하려 한다면 청정한 승가 구현은 요원한 것이며, 수행 또한 제대로 될 일이 없으니 어찌 불법이 오래 갈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에서 계율교육은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 것일까? 율장은 비구가 아니면 볼 수 없으므로 비구계를 수지한 후에나 정통적인 계율을 공부할 수밖에 없다. 비구가 수지해야 할 250계를 암송하고 있는 스님은 몇 분이나 될까.

무관 스님은 계율정신 확립을 위한다면 현 ‘선교육 후득도’를 ‘선득도 후교육’체제로 바꿔서라도 율장 공부를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현 출가 연령 평균이 20세를 넘는다고 본다면 사미계를 수지 한 후 일정 기간 비구계를 수지토록 하자는 것이다. 즉, 기본교육기간 내든, 교육기간을 다소 늘려서라도 율장을 교육함에 따라 계율정신을 높이자는 말이다. 물론 조계종의 교육제도를 일순간에 바꿀 수 없는 일이지만 심사숙고해 봐야 할 문제다. 현행 교육제도를 바꿀 수 없다면 비구계 수지 후 반드시 율원을 거칠 수 있게 하는 방법도 고려해 봄직하다. 혹여, ‘수행가풍’ 속에 선어록만 난무하고 경전과 율장이 잠을 자고 있지는 않은지 자문해 볼 일이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5계, 10계는 지키고 있는지, 매월 보름마다 포살은 못할지언정 일 년에 몇 번이나 참회하며 살고 있는지 되돌아보아야겠다.
“최근 철야정진 법회를 많이 합니다.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오후 불식을 하며 기도하고 절하며 참회해 보세요. 그간 해 온 수행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대열반경』에도 나와 있지 않습니까? ‘계가 실천되었을 때 정의 큰 이익과 과보가 있고, 정이 실천되었을 때 혜의 큰 이익과 과보가 있다. 혜가 실천된다면 마음은 번뇌, 욕루, 유루, 견루, 무명루로부터 해탈하게 된다.’ 삼학등지의 정수를 말하고 있습니다.”

단운 지철은 “도적질 음행이 반야에 해로울 것 없다고 하는 자는 부처님의 혜명을 끊으려는 자”라고 했으며 청허도 “음란하면서 참선하려는 것은 마치 모래를 쪄서 밥을 지으려는 것과 같다”고 했다.

『법구경』에서 부처님이 전한 한마디를 다시금 새겨야 할 것이다.
“계율의 복을 지켜 기쁨을 만들고(守戒福致喜) 계율을 범할까 두려워하는 마음 있으면(犯戒有懼心) 삼계의 온갖 속박을 끊을 수 있나니(能斷三界漏) 그는 벌써 열반에 가까이 있다.(此乃近泥洹)”
바라문이 될 것이냐 강측 아라한이 될 것이냐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채한기 상임 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사 족  蛇 足]

화두만 타파해 깨달으면 그만?

무관 스님의 ‘삼학등지’ 설명에 비추어 보면 ‘화두만 타파해 깨달으면 그만’이라는 이 한마디도 전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에 따라 천지차이다. 수승한 경지에 선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똑 같이 이 말을 했다 해도 듣는 이에 따라서는 오해나 왜곡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계율은 구속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화두만 타파해 깨달으면 그만’이라고 했을 때 듣는 사람 역시 계율은 아랑곳 않고 ‘화두’라는 문자에만 얽매이다 이번 생을 마칠 수도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혜능 선사의 “마음이 평탄하면 어찌 계를 지키려 애쓸 것이냐”는 말과 선가의 “화두만 타파해 깨달으면 그만”이라는 두 일갈의 속뜻을 곱씹어 보아야 할 것이다.


무관 스님은

무관 스님은 1964년 보산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하고 1972년 월하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1983년 동국대 교육대학원을 졸업한 후 조계종 교육원 교재편찬위원회 위원장, 해인사 율원장을 역임 했으며 현재 조계종 행자교육원 운영위원, 계단위원회 위원, 법계위원회 위원 등의 소임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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