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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강에서 달을 보다]행복마을 회주 용타 스님

지족하는 마음 향기 천리에 미치네

죽음 문제 풀려 철학 선택 청화 스님 만나 출가 결심
보시-감사-사과-관용 4가지 덕 실천하면 완벽

 

 
대학진로를 고민하고 있던 청년은 고등학교 은사를 만났다.

“무슨 학과를 지망할까요?”

철학을 전공한 은사의 답변은 간단명료했다.

“거지될 각오가 서 있으면 철학이 좋지!”

어려서부터 죽음에 천착했던 그에게 죽음과 철학, 그리고 거지는 낭만(浪漫)적으로 전해져왔다. 철학과에 진학한 그는 자신의 의식변화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두 친구를 만난다.

한 친구는 늘 『반야심경』을 독송하고 있었다. 얼마나 좋으면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읊조릴까? 그에게 배움을 청했다. 『반야심경』 260자 중 색즉시공(色卽是空)에 마음이 꽂혔다. 철학적 사유의 최초 주제가 되었고, 2개월 만에 나름의 가름을 했다. 그 때의 감회를 이렇게 술회한 바 있다.

‘우주가 깨지는 것 같았다. 나를 감싸고 있던 어떤 투명 보자기가 순식간에 걷혀버린 것 같았다.’

청화 스님 문하에서 사미를 지내다 온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틈만 나면 ‘청화스님 예찬’에 열을 올렸는데 당시의 청년은 ‘청화 스님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줄 알았다’고 한다. 대학교 2학년 때 청화 스님을 만났다. 색즉시공 사유를 통해 얻은 알음알이로 열린 의식 상태를 점검받았다.

“증오(證悟)가 아니라 해오(解悟)네!”

낙심했을까? 아니다. 오히려 오랫동안 들떠 있던 의식이 점차 가라앉으며 안정을 얻는 듯 했다. 줄탁동시(啐啄同時) 와도 같은 절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이후에도 청화 스님 친견은 거듭됐는데 만남이 잦아질수록 청화 스님은 위대해 보였다. 대학교 3학년 때인 8월15일 청화 스님의 맏상좌가 되었다. 용타(龍陀) 스님이다.

용타스님은 대학을 졸업하고 독일어와 윤리 교사로 10여 년 동안 교편을 잡은 바 있는데, 교단에 서면서도 대학원에 진학 해 ‘불교의 선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제방 선원에서 20안거를 성만 한 후 1980년부터 ‘동사섭수련회’ 프로그램을 가동 해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다. 2007년 3월 경남 함양에 건립한 재단법인 ‘동사섭 행복마을’(2012년 서울센터 개설)에는 오늘도 수련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동사섭수련회’에 뛰어 든 수행인들을 보면 불자도 많지만 개신교 목사와 원불교 교무, 대학교수, 초중고 교사, 한의사, 화가, 시인, 기업인 등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다. ‘선 수행’이라는 용어 대신 ‘명상’이라는 용어를 택한 것에 따른 부수효과도 있겠지만 그 속에 담긴 사상과 프로그램이 튼실하지 않았다면 30여년의 ‘동사섭수련회’는 존재(2016년까지 2만5천여명의 수련생을 배출했다)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동사섭수련회’의 기본 취지는 행복한 세상을 꾸며가자는 것이다. 동사섭과 행복은 어떤 연관성을 갖고 있을까?

우선 동사섭이란 보살이 중생을 교화해 불도에 들게 하는 네 가지 실천행 즉 보시섭, 애어섭, 이행섭, 동사섭 등의 사섭법(攝法法) 중 하나다. 보시섭(布施攝)은 진리와 재물을 베풀어주는 일이고, 애어섭(愛語攝)은 항상 따뜻한 얼굴로 부드럽게 말을 하는 일이다. 이행섭(利行攝)은 몸(身)·말(口)·마음(意) 3업으로 선행을 하여 중생들에게 이익을 주는 일이고, 동사섭(同事攝)은 동체대비심을 내어 중생들과 어울려 살며 그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일이다. ‘동사섭수련회’의 동사섭은 사섭법의 하나일 뿐만 아니라 사섭법을 대표하고 있는 셈이다.

사섭법에 근간을 둔 용타 스님은 ‘동사섭수련회’가 실천해야 할 삶의 오대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오요(五要)라고도 한다. 정체(자아)의 원리를 체득하고, 원대한 희망을 갖는 대원의 원리, 마음을 닦아가며 수행하는 수심의 원리, 이웃과 좋은 관계를 맺는 화합의 원리, 그리고 바람직한 행동을 해야 한다는 작선(作善)의 원리를 전하고 있다. 여기에 ‘보시’, ‘감사’, ‘사과’, ‘관용’의 네 가지 덕을 실천해야 한다는 ‘사대교류’(四大交流)도 제시하고 있다. 오요와 사대교류는 ‘동사섭 행복마을’의 정수다.

용타 스님이 말하는 정체, 자아원리는 무엇이고 어디에 근거하는지가 궁금하다. 분명 무아관이 배어 있을 것은 확실한데 왜 무아가 아니고 자아일까?

“자아관 확립을 위해서는 ‘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합니다. 그에 대한 궁극의 답은 아니더라도 지금 이 순간 품을 수 있는 답 하나를 수지해야 합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일단 부정 자아관이 아닌 긍정 자아관을 권장합니다. ‘모든 중생은 불성이 있다’는 부처님 말씀 속에도 긍정적 자아관이 배어 있습니다. ‘나는 못 한다’라기 보다는 ‘할 수 있는 사람’이라 여기고, 단점이 많은 사람이라 생각하기 이전에 장점이 많은 사람이라고 단언해 보자는 겁니다. 인생이란 안으로는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밖으로는 무엇인가를 말하고 행동하는 과정입니다. 그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이 대부분 긍정적이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부정적 생각, 말, 행동이 반복되면 습관화되고 나아가 성격이 되어 그 사람의 인생과 운명을 나락의 길로 이끌고 맙니다. 부정관에서 긍정관으로 바꾸는 것만도 일대사 인연입니다.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난 닦을 게 너무 많은 중생’이라기보다는 ‘이미 부처’라고, 활불(活佛)이라고 스스로 선언하자는 겁니다.”

 
그러한 긍정적 자아관을 어떻게 확립해 나갈 것인가.

“연기, 무상에 기반 한 무아관부터 시작합니다. 무아라 해서 없는 건 아닙니다. 그래서 비아(非我)라 하기도 합니다.”

용타 스님은 무아관을 논파함에 있어 ‘즉비(卽非)’를 꺼내 들었다. 『금강경』에 ‘즉비’는 딱 20회 나오고, 즉시비(卽是非), 개위비(皆爲非) 처럼 즉비와 같은 개념으로 쓰인 것까지 합하면 30회 정도 나온다고 한다. 비교적 글자 수가 많지 않은 경전에서 30회씩이나 사용했다면 분명 깊은 연유가 있지 않겠냐고 반문하며 설명을 이어갔다.

“즉비는 일단 공(空)과 같은 개념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뒤따르는 말을 부정지양(否定止揚)하는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 컵은 컵이 아니고 그 이름이 컵이다 하는 식이며, 또한 이 컵은 컵(만인 것)이 아니다 하는 것이지요. 이 즉비는 어떤 개념이든 명제를 세운 찰나지간에 즉시 부정, 지양시킴으로써 어떤 대상에도 걸리지 않고 초월하도록 돕습니다. 이 구조를 이해해야 『금강경』을 명확히 읽어낼 수 있습니다. 사실 알고 보면 유형이든 무형이든, 유정이든 무정이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무아요, 공이요, 즉비입니다. 천하의 모든 것이 다 부정 지양되어야지만 1번으로 부정지양 될 것은 ‘나’라 하는 ‘자아’입니다. 천하의 모든 고통과 모든 싸움, 모든 재앙은 이기심에서 옵니다. 그런데 이 이기심의 뿌리는 ‘나’라 하는 자아의식입니다. 그러니 자아의식을 넘어서는 일이야말로 역사의 궁극적인 구현 목표라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실제로 용타 스님은 공을 이해하는 10가지 길인 ‘해공10조(解空十條)’를 체계화해 동사섭수련회에서 쓰고 있다. 해공십조에는 연기고공(緣起故空)에서부터 방하고공(放下故空), 무한고공(無限故空), 무상고공(無常故空), 성주괴공(成住壞空), 생멸고공(生滅故空), 불가득공(不可得空) 등 24개 항목이 있는데 다양한 공관(空觀)을 세세하게 지도하는 독특한 수행법을 펼쳐 보이고 있다. 무상과 공을 어느 정도 이해한 후 단견에 빠지는 위험성을 감안해 세부적인 수행단계까지 설정해 놓고 있다. 정체관 확립 후에는 바로 초월적 자아관과, 묘유(妙有)적 자아관으로 이끌고 있다. 무아관에 입각한 정체성이 확립되면 이후 묘유적 자아관은 절로 따라온다고 한다. 그렇다면 용타 스님이 말하는 ‘묘유’란 무엇인가.

“묘유라 해서 별도로 있는 게 아닙니다. 무아를 제대로 보았다면 있고 없고 하는 분별에 빠지지 않고 바로 초월합니다. 초월 한 순간 묘유는 스스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다만 초월만 하라 하고 아무 말이 없으면 다시 허무에 빠질 공산이 크기에 묘유라는 말로 마무리 하는 겁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을 보세요. ‘응무소주’가 목적이 아닙니다. ‘응무소주’는 ‘이생기심’의 조건인 겁니다. 집착하지 않으니(응무소주) 탁 트인 마음이 생겨(이생기심) 자유로운 삶을 사는 것이지요. 즉 마음이 일체의 경계에 걸리는 바가 없다면 저절로 자유로운 삶을 영위합니다. 이러한 삶이 묘유의 삶인 겁니다.”

용타 스님의 ‘즉비 프리즘’을 사용하니 『금강경』의 공관(公觀)이 더욱 뚜렷하게 보인다. 용타 스님이 진아(眞我)를 놔두고 굳이 자아(自我)를 말하고 있는지도 알 것 같다. 견성의 선로를 질주할 기차의 연료는 연기 무상이다. 그리고 그 기차는 ‘공’(空)이라는 터널을 지나야만 ‘깨달음’이라는 종착역에 다다를 수 있다. 자아를 말하고 있으나 실은 무아를 말하고 있는 것이며, 버리라 하는 자아를 강조하니 오히려 무아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용타 스님만이 갖고 있던 ‘즉비’는 그 기차의 시동을 켜는 열쇠다. 그 열쇠라면 굳게 닫혀 있는 그 어떤 무문관도 열 수 있을 것만 같다.

염불선을 주창했던 청정제일 청화대종사는 생전에 ‘부처 아님이 없다.’ ‘무한 우주가 한 진리요, 한 부처요, 한 생명이다.’ ‘불설여사(不說如事:마음공부에 도움 되는 말이 아닐 경우에는 차라리 침묵으로 보내라)’ 등의 메시지를 전했다. 스승의 가르침을 동사섭 수련프로그램에 온전히 녹여 낸 용타 스님이다.

인터넷 여기저기서 발견되는 용타 스님의 108 좌우명도 유명하다.

‘99% 공감할 일밖에 없다. 평가하려면 1%만, 그것도 묘를 얻어서 하라’는 좌우명은 인상 깊다. 함부로 사람을 평가하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그리고 그 행간을 들여다보면 부모가 어린 아이를 보면 말하기 전에 우선 안아 품어주듯, 이 세상 사람들도 가능하면 분별심에 이끌려 좋고 나쁨을 따지기 전에 상대방을 품으라는 뜻이 배어 있다. ‘꽃은 한 송이로되 향기는 뜰에 가득 차고, 말 한마디 없으나 덕화가 천리에 미치네’는 용타 스님이 추구하는 인품의 지향점을 엿볼 수 있는 명언이다.

스님이 전하는 꽃 한 송이가 모이고 모이면 그 꽃밭이 곧 돈망(頓忘) 극락이요 천국일 것이다. 아니, 꽃밭 이전에 그 한 송이 머문 자리가 곧 지족의 자리요, 극락의 자리이며 천국의 자리일 것이다.

용타 스님은 지금도 용타문을 두드린 사람에게 일갈하고 있을 것이다.

“여러분은 부처입니다. 지금 여기 이 자리서 부처가 됩시다.”

‘즉비’를 안다면 저 일갈이 모순이 아님을 알 것이다.
 
채한기 상임 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용타 스님은
용타 스님은 1942년 전남 강진에서 태어나 1964년 청화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966년 전남대 철학과를 졸업 한 후 1971년 동대학 철학과에서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1966년부터 1974년까지 고등학교에서 독일어 교사로 재직한 바 있는 스님은 전국 제방선원에서 20안거를 결제수선했다. 1980년부터 ‘동사섭’ 수행 프로그램을 창안, 대중에게 부처님 법음과 함께 진정한 행복의 길을 열어주고 있다. 김제 귀신사 회주, 성륜문화재단 이사, 재단법인 행복마을 회주를 맡고 있다. 석사 논문으로 ‘불교의 선에 관한 연구’가 있으며 저서로는 『마음 알기 다루기 나누기』, 『해탈 10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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