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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심청심]不二의 세상

기자명 법보신문

거금도 금천선원장 일선 스님

실핏줄 같이 투명한 숲에는 여명이 밝아오고 있다. 마침내 기축년 새해가 진흙밭에서 뚜벅뚜벅 걸어나오고 있다. 오랜 무명이 일시에 걷히고 나니 첫 배는 마치 무소처럼 거친 파도를 갈아엎어 하얀 포말을 지혜로 소용돌이치며 힘차게 나아가고 있다.

비야리성의 유마거사는 부처님 제자들의 병문안을 받고 “중생이 병들었기에 나도 병들었으며 중생의 병이 나아야 나의 병도 따라서 나을 것”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마치 부모가 품안에서 기른 사랑하는 자식이 병이 들면 그 자식을 따라서 함께 병이 들었다가 자식이 나으면 부모의 아픔도 함께 사라지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지금 세상이 병든 것은 무시이래로 지은바 탐진치의 삼독으로 인하여 몸과 마음을 둘로 보고 소유가 전부인양 끝없이 탐욕을 부추기며 존재의 가치를 망각한 채 욕망의 불꽃 속으로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나와 세계가 연기 속에 존재하는 줄 모르고 실제 한다는 착각 속에서 절대자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는 어리석은 믿음으로 인하여 종교와 인종의 차별이 끝없는 갈등의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편 보살의 병은 ‘나는 보살행을 실천하고 있다’는 법상(法相)을 떨치지 못하고 세간과 출세간을 나누어 번뇌와 깨달음을 둘로 보고 범부를 구제의 대상으로 삼아 누구나 가지고 있어 본래 평등한 불성을 끝까지 요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보살행은 범부의 행도 아니고 성현의 행도 아니어서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무주(無住)를 근본으로 삼는다. 희망의 항구에는 또 다른 출발을 알리는 뱃고동 소리가 긴 울음을 토하고 있다. 무주의 배는 머무는 바 없어 항상 텅 비었지만 인연 따라서 실어주고 내려주며 오늘도 끝없이 오고간다.

많은 부처님 제자들이 유마의 방장에 모여서 위와 같은 차별로 인하여 세상의 온갖 생명들이 마음대로 숨 쉬지 못하고 양극의 대립 속에서 고통을 받고 있음을 토로하고 있다. 세상의 병인 일체 대립과 차별의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오직 중도불이의 자기 성품으로 돌아가야 한다. 문수보살은 이러한 중도불이의 세계는 더 이상 어떤 말이나 침묵으로도 논할 수 없는 세계라고 했다. 이에 유마거사는 ‘성스러운 침묵’으로 불이법문을 설하니 모두가 희유함을 찬탄하고 기뻐하였다.

세계는 아직 금융대란의 충격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마치 그물코처럼 얽힌 중중무진한 연기의 세계여서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나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이 따라서 멸한다는 장엄한 설법을 하고 있다.

성스러운 침묵 속에는 일체 생멸인연이 사라졌다. 하지만 여기에 머물지 말고 보살행을 일으켜야 한다. 온통 서로를 부둥켜안고 살을 부비고 따뜻한 체온을 서로 나누며 다시 몸을 벌떡 일으켜 소처럼 우직하고 근면하게 걸어가야만 한다. 세상은 피와 땀이 아닌 요행이나 거품은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눈물로써 증명해 보이고 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남이 함께 살아야 하며 내가 잘되기 위해서는 남을 위해 먼저 기도해야 한다는 참다운 보살행이야 말로 걸음걸음 정토의 출현이며 새해 벽두에 새겨야할 화두이다. 세상이 없으면 깨달음이 존재할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온갖 차별이 사라진 불이의 세상,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뛴다.

관음상 앞에는 한 송이 동백꽃이 붉게 타오르고 있다.

거금도 금천선원장 일선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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