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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강에서 달을 보다]성원사 회주 여강 주경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지극정성 염불하면 단 1초도 극락

“마명(馬鳴)도 용수(龍樹)도 염불을 했는데 나는 무엇이기에 염불을 하지 않겠는가!” 서산대사가 『선가귀감』에서 일갈한 일구다. 염불을 하근기 불자가 하는 수행법이라 오해하는 풍토가 아직까지도 상존하고 있지만 실상염불의 역사는 지금의 화두선과는 비견되지 않을 정도의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어떤 이들은 염불을 극락왕생만을 기원하는 타력신앙에 지나지 않는다고까지 말하지만 그들에게 영명연수 선사는 이렇게 말한다.

“선정만 있고 염불이 없으면 열 사람에 아홉이 미끄러지고 중음경계가 나툴 때 별안간 그를 따라간다. 선정과 염불 모두 없으면 무쇠 평상과 구리기둥의 지옥, 일만 겁과 일천 생에 믿고 의지할 데 하나도 없다.”

영명연수의 이 말은 안일하게 흘러가고 있던 중국의 묵조, 조사선에 대한 비판의 일성이지만 선정과 염불의 중요성을 오늘날까지 일깨우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마명, 용수, 서산, 영명 선사들과 함께 지금 이 시대에도 염불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스님이 있다. 바로 강릉 성원사 회주 주경 스님이다. 주경 스님은 오신채를 하지 않는 스님으로 불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만 실은 계율청정을 근간으로 참선은 물론 염불수행에도 진력해 온 선지식이다.

백천겁 지나도 과보 있어
인연법 알면 업장 녹일 것
농부가 비를 기다리듯
‘갈앙심’으로 수행해야

주경 스님의 주석처인 성원사 경내 ‘갈앙굴’로 향했다. ‘갈앙’(渴仰)이란 ‘목마른 사람이 비를 기다리는 마음처럼 하늘을 우러러 발하는 간절한 마음(갈앙심)’을 뜻한다. 성원 스님이 전국에 조직한 갈앙회는 ‘부처님을 닮아 가겠다’는 간절한 마음을 내며 수행에 임하고 있다. 주경 스님은 자신의 주석처를 ‘갈앙굴’로 이름 지었는데 현판에 쓰인 ‘굴’자가 좀 이상하다. 보통 산사에서 ‘굴’이라 하면 사람이 모인다는 뜻을 가진 ‘굴 굴(窟)’을 쓰는데 이 현판에는 ‘굽힐 굴(屈)’이 쓰여 있다. 이곳을 찾는 모든 사람은 자신에게 허리를 굽히라는 뜻일까? ‘갈앙굴’(渴仰窟)이 아닌 ‘갈앙굴(渴仰屈)’이 된 사연부터 들어보기로 했다.

“부처님을 닮겠다는 사람이 먼저 허리를 굽혀야지요. 하심(下心) 한다고 하지만 그게 그렇게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이 방에 들어올 때마다 내 스스로 직접 써 넣은 저 ‘굴’자를 보며 하심의 마음을 놓지 않으려 합니다.”

‘갈앙굴’의 의미는 단순히 주경 스님뿐 아니라 갈앙굴을 찾은 사람에게도 해당될 것이다. ‘이 곳을 찾는 사람은 허리를 굽혀라!’ 그러나 그 허리는 자신을 향한 것이지 주석처에 머물고 있는 주경 스님이 아니다. 다시 말해 ‘나를 찾는 사람은 허리를 굽혀라’는 뜻이 아닌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나를 향해 허리를 굽히든, 주경 스님을 향해 허리를 굽히든, 그 모양새가 중요한 게 아니다. 스스로 마음을 낮추려는 그 한 가닥 하심 하나가 이곳을 찾는 사람에게 생겨난다면 ‘갈앙굴’이 던지는 메시지는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내 스스로 숙이면 되는 것을 ‘굴(屈)’자 하나에 쓸데없는 의심만 짓고 말았다.

정토삼부경 중 하나인 『관무량수경』을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모든 부처님은 바로 법계를 몸으로 하는 것이니 일체 중생의 마음 가운데 들어 있다. 그러므로 그대들이 마음에 부처님을 생각할 때 이 마음이 바로 32상과 80종을 갖춘 원만덕상이다. 이 마음으로 부처님을 이루고 이 마음이 바로 부처님 마음이다.”
부처님을 생각하는 그 마음이 부처 마음이라는 의미는 무엇일까?

“염불이란 본래 부처인 우리가 본래 부처인 것을 잊어버리고 있다가 다시 부처님 가르침을 만나서 본래 부처인 줄 알고, 부처를 생각하고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다시 부처가 되는 것이지요. 어렵습니까?”

그렇다면 정말 부처님의 상호를 떠올리며 ‘아미타불’, ‘석가모니불’을 염하는 것만으로 극락왕생은 물론 해탈도 할 수 있는 것인가.
“‘아미타불을 입으로 외우는 것은 송불(誦佛)일 뿐입니다. 염불이라 할 때 보통 네 가지로 분류해 말합니다.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것은 칭명(稱名)염불이고, 부처님의 원만한 덕상을 생각하며 하는 염불은 관상(觀像)이며, 부처님의 자비사상과 자비광명을 생각하며 하는 염불은 관상(觀想)이며, 우주법계를 실상적인 차원에서 볼 때 부처님의 불성 자비광명 아님이 없다고 확실히 믿고 관조하며 하는 염불은 실상(實想)염불입니다. 칭명염불부터 단계적으로 해야 하지만 궁극에 가서는 실상염불을 해야 해탈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 자비광명이 온 법계에 가득 차 있다는 것은 불교상식 수준에서도 알 수 있는 말이지만 이것을 믿고 관조해야 한다는 뜻은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려워 ‘실상염불’에 대해 좀 더 물었다.

“작은 방에 촛불이 하나 켜져 있다고 할 때 촛불을 한 번도 안 켜 본 사람과 켜 본 사람이 그려내는 이미지는 확연히 다릅니다. 촛불 한 번 안 켜 본 사람은 단지 불이 있으니 방안에 빛이 가득 차 환할 것이라 생각하고 믿겠지만, 촛불을 켜 본 사람은 방안에 빛이 있다 해도 조도가 낮을 것임을 알기에 약간 밝은 정도의 방을 떠올릴 것입니다. 두 사람에게 그림을 그려보라 하면 확연히 다른 그림이 나오겠지요. 부처님 자비광명이 법계에 가득 차 있다고 알고 있는 것과 그것을 믿고 관조하는 것은 분명 다른 차원의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무아’를 통해 ‘중도’를 관통하듯 실상염불 또한 이를 관조할 수 있는 열쇠가 하나 있어야 할 것이다.

“실상염불을 통찰함에 있어서는 제법공(諸法空)의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제법이 공이라 하는 것은 모두가 부처란 말입니다.”

다소 엉뚱해 보일 수 있는 대목이다. 법계에 자비광명이 가득하다는 것과, 모든 법이 공하다는 것과, 모두가 부처라는 세 가지 뜻이 어떻게 하나로 계합될 수 있는가?

“허공이라 하면 그냥 빈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은 없으나 무량공덕이 가득 차 있는 허공입니다. 작은 터럭 가운데도 한없는 부처님 세계가 원만히 갖춰져 있다 했습니다(一毛空中 無量佛刹 曠然安立). 제법공의 지혜로 부처님을 생각하고 우주법계와 나를 들여다 보면 순수한 생명자리라 할 수 있는 순진무구한 불성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나와 부처, 법계는 한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염불의 진면목이 담겨 있다. 용수의 말을 잠깐 들어보자.
“색신에 집착하지 않고 법신에도 집착하지 않아 능히 일체법을 알아서 영원히 고요함을 허공과 같이 해야 한다. 이 보살은 힘을 얻어 색신불이나 법신불에도 탐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공법을 믿고 바라기 때문에 모든 법이 허공과 같은 줄 알기 때문이다. 허공이라고 하는 것은 장애가 없기 때문이다.”

칭명-관상 뛰어넘어
실상염불 해야 해탈
무아 통한 ‘空’ 알아야
염불선 체득할 수 있어

용수 언중에는 분명 색신과 법신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관을 바탕으로 반야공(般若空)을 설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다시 말하면 실상염불이란 공을 깨달아가는 수행 방편 중 하나라는 것이다. 주경 스님 역시 염불을 통한 반야공을 말하고 있다. 화두선이 역대 조사를 떠올리며 그들이 남긴 언구에 마음을 집중시켜 삼매를 얻어 깨달음을 얻는 것이라 한다면, 염불은 조사 대신 부처님을 떠올리고, 부처님이 설한 말씀의 실상에 따라 삼매를 얻어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일상에서 ‘나무아미타불’을 하루 100번, 1000번 하거나 10만, 20만독 원력을 세우는 경우가 많다. 자신을 추스르려 보려는 당찬 마음가짐의 하나라 하겠지만 그 숫자가 중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저는 지극정성으로 염불하면 1초가 극락이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10만, 20만 원력도 대단한 겁니다. 하지만 염불은 얼마나 많이 하느냐 보다 일심불란으로 얼마나 정성을 들이며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염불이 부처님 명호를 부르며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는 삼매를 얻고 무념에 들어 본래면목을 깨닫는 수행법인 만큼 한 번을 염하더라도 어떤 마음으로 하고 있는가가 관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한 번 용수의 말을 빌려보자.
“정심(正心)으로 모든 부처님을 억념(億念)하되 한가롭고 조용한 곳에 있으면서 탐심, 수면, 의심을 제거하고 일심으로 염해 장애가 생기지 않도록 하며 삼매를 잃지 않아야 한다.”

용수가 말한 정심은 주경 스님이 말하는 ‘갈앙심’과 다르지 않다.
“철오 선사도 한 생각 끼어들거나 끊어짐 없이 생각생각 계속 이어지면 점차 한 마음 흐트러지지 않는 일심불란의 경지에 들어 청정한 업이 원만히 이뤄진다고 했습니다. 간절한 마음, 농부가 메마른 땅을 보며 하늘을 우러러 비를 기다리는 마음, 그 일념으로 하면 분명 염불삼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한 생각 염불하는 가운데 온갖 더러운 오염을 일제히 정화시켜 본디 텅 빈 성품을 원만히 드러내면, 신령스런 바탕자리에 딱 들어맞아 부처님 바다에 뛰어들 수 있습니다.”

주경 스님은 이어서 “무엇이 부처인지 알고 있느냐?”며 “불자는 자비로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생이라는 씨앗을 자비스러운 물로 키워서 그 열매가 맺은 것이 부처라는 지론을 펴는 스님은 “중생이 없는데서 부처가 날 수 없고, 또 자비스러움이 없는 데서 부처가 이뤄질 수 없다”고 했다.

“우리의 본 마음은 아미타불입니다. 단지 업으로 인해 지금의 육신으로 형성돼 있을 뿐입니다. 계곡물은 추위를 만나면 얼음으로 변하지만 여름을 만나면 다시 물로 바뀝니다. 물의 본질을 변함이 없습니다. 탐심과 치심으로 마음이 좀 혼탁했다 해서 본래 갖고 있던 불성이 변한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아미타불은 내 몸에서 나투는 것이지 다른 곳에서 나투는 게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집착하고, 화내는 마음 때문에 내가 갖고 있는 아미타불이 안 보일 뿐입니다. 내 마음이 아미타불이고, 내 속에 있는 아미타불을 염하는 이상 염불은 타력신앙이 아닌 자력신앙입니다.”

『열반경』에도 ‘정성과 공경을 다하면 그 경계가 묘하고 묘하다. 간절한 마음에서 나는 빛, 그 빛을 아미타불이라 한다(竭誠盡敬 妙妙妙, 懇心放光 是彌陀).’적시돼 있다.

그러나 주경 스님은 내가 아미타불이라 해서 다시 ‘나’에 집착하는 과오는 절대 범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염불을 할 때는 무엇인가 구하려는 마음도 내려놓으라고 한다. 구한다는 것은 내 주위에 ‘나’라는 울타리를 쳐놓은 것과 같기 때문에 나만은 잘 되어야 한다는 사념에 사로잡히기 쉽다는 것이다. 그 ‘나’ 마저도 허물어 ‘무아’와 ‘중도’, ‘법공’의 도리를 하나씩 체득해 갈 때 진정한 염불선은 완성되어 갈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주경 스님은 “부처님께서 분명 ‘가히 백천 겁을 지날지라도 지은 바 업은 없어지지 않나니, 인과 연이 서로 만나게 되면 그 과보를 면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고 재차 강조했다. 그리고 『선경어』나오는 구절을 일러주며 선이든, 화두든, 간경이든 일심으로 하라고 당부했다.

“도라는 것은 잠시도 떨어질 수 없다. 떨어질 수 있다면 도가 아니다. 진정한 납자라면 마치 눈썹이나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이 절해야 하는데 어느 겨를에 딴 생각을 내겠는가!”

사실, 염불수행을 하는 스님에게 묻고 싶은 것이 하나 있었다.
“정토삼부경에 나오는 극락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법거량 차원의 물음이 아니라 극락 지옥의 실상과 실체, 실재를 속 시원히 알고 싶었다. 하지만 묻지 않았다. 부처님 자비광명이 우주 법계에 두루하다는 것을 관조하지도 않은 채 이런 의문만을 떠올리는 것은 묘목도 심지 않고 열매만 탐하는 우치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채한기 상임 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주경 스님은

태안사 조실이었던 청화 스님을 은사로 득도, 30여년간 수행정진 해 온 주경 스님은 강릉 포교당 성원사에 재가불자를 위한 시민 선방과 불교교양대학을 개설 운영중이다. 인도와 중국, 라오스, 태국 등에서 사미를 선발해 한국불교의 수행법과 문화를 지도해 국제포교사로 양성하고 있다. 현재 강릉 성원사 회주이며 갈앙선원 선원장, 청화사상연구회 회장, 무주불교문화재단 이사장, 법무부 교화위원 등을 역임하고 있다. 2008년 3월 서울 대치동에 ‘정중선원’을 개설해 불자들에게 염불선을 지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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