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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강에서 달을 보다]자비선원장 원허 지운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통찰 지극할 때 화두 들어야 ‘한소식’도 빠르다

 
지운 스님의 요사채 다락방 서고에는 1만 여 권의 책으로 가득하다. 강백의 지난 여정이 오롯하게 느껴진다.

‘송광-동화사 강백 근 20년
‘지관’ 조예 깊은 선지식
‘명철한 강의 -수행점검 철저
‘성주 자비선사로 대중 운집

원허 지운(圓虛 智雲) 스님은 송광사와 동화사에서 근 17년여 동안 강주를 지내며 불교교학 발전에 일익을 담당해 온 선지식이다.
경북 성주에 자리하고 있는 자비선사로 향하는 길에 옛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지운 스님의 강론집 『뿌리없는 나무에 핀 꽃』(도서출판 법공양)은 ‘2002 한일 월드컵’으로 전 세계가 술렁일 때 세상에 선을 보였다. 지금도 근기가 약하지만 그 책을 접했을 때는 더했기에 제1장 ‘깨달음의 교리적 이해’ 부분을 펼친 순간 바로 덮는 우를 범했었다. 다만 ‘부처님 근본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제3장에 포함된 ‘다선일미(茶禪一味)에 대한 이야기’ 한 편은 인내심(?)을 요하지 않는 글이기에 차분히 읽어 본 기억이 또렷했다.

차를 마시는 형식에 매이지 않으면서도 그 자체를 수행으로 연결하는 방법론을 제시한 내용이었다. 글 말미에 쓴 단문과 시 한편이 지금도 좋다. ‘차 한 잔에 서로가 하나 되어 모임을 이루는 것은 상즉상입(相卽相入) 진리의 모습이며, 진흙에서 연꽃을 피우는 수행’이라 한 스님은 ‘빈 마음 차(空心茶)’ 시 한수를 지었다. 3연으로 된 시 마지막 부분이다.

다각(茶角)이 정성스럽게 차를 우려내어
손님에게 차공양 올리니
온갖 상념 비우는 소리 들리고
공양받는 손님도 빈 마음 되지요.

찾아뵙기 전 그 강론집을 다시 보고 싶었지만 찾을 수 없어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오늘 묻고 싶은 것은 바로 지운 스님이 시어로 선택한 ‘빈 마음’이다. 공(空)과 심(心). 그 둘의 상관관계를 안다면 분명 경전과 어록 공부는 물론 나아가 수행에도 좋은 나침반이 될 것이다. 마침, 스님은 2005년 ‘자비수관’을 체계화 한 『깨달음으로 가는 길』(도서출판 법공양)에 이어 최근 『해심밀경』(연꽃호수)을 번역해 내놓았다. 두 저서 속에는 지관(止觀)에 대한 지운 스님의 심오한 통찰이 배어있다. 대·소승법에 조예가 깊은 지운 스님이 전하는 마음과 공에 대한 법설은 어떤 맛일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지운 스님은 보이차 한 잔을 건네며 내 궁금증에 대해 이 한마디를 던졌다.

“마음의 특성은 대상을 아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연기가 마음이고 무상이 마음이니 공도 마음입니다.”
오늘도 헤쳐 가야 할 길이 캄캄하다.
“우리는 지나간 과거와 오지 않은 미래에 집착합니다. 수타니타파에서는 ‘과거에 있었던 것(번뇌)을 지워 버려라’ 하지만 슬픈 기억이 일어나면 기쁘다가도 슬퍼하는 게 사람입니다. 또한 ‘미래에는 그대에게 아무것도 없게 하라’ 하지만 궁극에는 내 자신이 어떻게 될까 하는 두려움(죽음) 때문에 신을 찾고 불변의 그 무엇을 찾으려만 합니다. 이 순간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그 마음이 미혹이고 그 미혹한 마음은 팔만사천의 번뇌를 일으킵니다.”

현재, 이 순간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아니 현재 스쳐 지나가는 이 마음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이 세계는 마음이 만들어 낸 세계입니다. 환영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놓고 실체, 그것도 변하지 않는 실체라 합니다. 여기서 집착이 나옵니다. 이 실상을 보고자 해야 부처님이 말씀하신 무상(無常)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운 스님은 무상을 찻잔을 들어 설명했다. 지금 들고 있는 찻잔도 이 순간 변하고 있는데 어느 순간, 어디를 보고 찻잔이라 하겠느냐는 것이다.

“무상의 뜻은 불자라면 다 알지만 어떻게 알고 있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무상을 어떻게 체득했느냐는 더 중요한 것이지요. 모든 게 변하니 나 또한 변할 것이고 결국 죽는다. 허망하다. 이렇게 끝나면 단견에 그치고 마는 겁니다. 무상(無常)을 통해 무상(無相)을 보아야 합니다.”
그 두 무상을 통찰할 수 있는 키워드는 분명 연기일 것이다.

“연기도 그냥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하고 끝내면 더 이상의 진척이 없습니다. 나와 찻잔, 나와 너, 나와 삼라만상을 시작으로 온 우주법계가 다 연기인 줄 알아야 합니다. 쉽게 말하면 연기는 소통입니다.”
연기는 소통이라! 일단 나와 지운 스님이 만나 이렇게 ‘무상’을 말하고 듣는 이 소통도 서로 주고받음이 있으니 연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저 우주와는 어떻게 소통한단 말인가!
“흔히 무생물과는 소통하지 않는다 하는데 그 또한 착각입니다. 극미 입자도 관찰자에 의해 반응한다 하지 않습니까? 반응한다면 그것도 소통입니다. 입자가 반응하는데 우주 삼라만상이 서로 반응하며 소통하는 것은 당연한 얘기입니다. 이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드라망 그 자체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무상과 연기를 알아가기 위한 최상의 방편은 무엇일까? 스님은 의식이 지혜로 발현할 수 있도록 수행 단계를 정확하게 밟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 첫 번째로 계율을 꼽았다. 8식 중 아뢰야식을 제외한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의식, 말나식(자아의식)은 밖의 경계와 육체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능가경에 이르기를 경계의 바람이 불면 7가지 의식(전식·轉識)이 인식기관(諸根)과 털구멍을 통해 파도같이 일어난다 했습니다. 이 말은 7가지 의식은 육체에 의지해 인식한다는 말입니다. 계율로 이들 의식을 제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스님은 8식 중에서 특히 의식에 초점을 맞췄다.

“불성이란 진여의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그런데 ‘불성이 있다’는 말에는 부처의 성품, 즉 깨달을 수 있는 잠재 성향이 들어 있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보리심은 8식 가운데 의식에서 나옵니다. 아뢰야식과 말나식은 보리심을 일으킬 수 있는 힘이 없고, 감각은 힘이 있으나 너무 자주 변해 지속성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의식을 깨워야 합니다. 그게 수행의 첫 단계입니다.”

스님은 마음이 오염되는 첫 출발은 법계가 하나인 줄 모르는 무명 때문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마음의 인식내용은 인식 주관과 인식대상 관계에서 일어나는데, 이들이 본래 한마음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주객관의 분별만을 인식내용으로 하는 무명이 진여에 영향을 주어 오염시켜 진여를 망각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한마음(一心)은 주객으로 나누어지고 만다.

‘보리심 일으키는 힘은 ‘의식’
‘알아차림’으로 찰나 관해야
‘無常으로 無相 체득 하면
‘연기-중도-공도 心일 뿐

“수행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어리석음을 다스려 욕심과 성냄으로 흐르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수행 이전의 앎과 수행 이후의 앎은 다릅니다. 흔히 말하는 인식, 앎이란 주관과 객관이 상대해 일어나는 것이지만 의식의 앎은 분별하고 추리해 아는 것이 주된 특성이면서 직관으로도 작용합니다. 다시 말하면 일상의 앎은 주로 추리분별이지만 수행이 깊어지면 직관인 무분별의 앎이 되는 겁니다.”

추리와 직관, 분별의 앎과 무분별의 앎. 곱씹어 볼 대목이다. 그러나 스님은 어떤 수행이든 무엇보다 ‘정념(正念)’이 중요하다 했다. 쉽게 말한다면 위빠사나에서 말하는 ‘알아차림’이다. 생각은 형상을 인식한다. 그러나 그 형상 자체는 매 찰나 변하는데 생각 자체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따라서 악업의 종자가 발생해도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방치하면 그대로 아뢰야식에 저장된다. 놀랍게도 대상에 반응해 인식이 순간적으로 일어나고 대상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대상의 이미지가 아뢰야식에 저장되는 시간은 17찰나라 한다.

“쉽게 말하면 감각정보의 최소물질 단위가 1찰나에 생성, 지속, 소멸할 때 마음의 생, 주, 멸은 17찰나 동안 반복한다는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갑자기 나타나는 사물에 대해 인식하는 시간이 0.2초라 하는데 그 대상이 한 번 바뀔 때 그 대상을 인식하는 마음 대상의 이미지를 아뢰야식에 저장하는 인식하는 과정이 17번 바뀐다는 계산입니다. 이렇게 종자가 빠르게 현행하는 그 찰나의 순간을 알지 못하면 몸과, 입, 뜻의 삼업도 알지 못하게 됩니다. 파멸의 길을 걸어도 알지 못한 채 그대로 곤두박질치는 겁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 찰나에 자아와 실체가 없음을 안다면 자기 파멸의 종자가 아뢰야식에 저장되지 않으므로 파멸의 길을 멈출 수 있다는 얘기다.

“빠르게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알아차린다면 변하는 대상(생각)에 대해 자기 생각을 개입시키지 않게 되며, 대상을 의도적으로 만들지도 않으니 업을 짓지도, 습을 만들지도 않습니다. 대상의 변화를 보고 알아차리는 념, 그것이 바로 정념입니다.”
지운 스님은 지관 수행을 하는데 있어서 꼭 알아야 할 것이 있다고 강조했다. 사유와 통찰이다. 물론 사유와 통찰 이전에 교리(교학)를 어느 정도 알아야 함은 물론이다. 교리를 이해하는데 그치지 말고 그 뜻을 나름대로 사유하고 나아가 통찰해 보라는 것이다. 간화선 수행을 하는데 있어서도 이는 그대로 적용된다고 한다.

“간화선은 천재적인 발상의 수행법입니다. 그러나 간화선은 사유와 통찰이 지극히 이루어 졌을 때 들어야 소식이 빠릅니다. 그렇다고 화두를 사유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무상, 무아, 연기, 중도 등의 법을 심도 있게 알고 사유 통찰해 보라는 겁니다.”
고구정녕 한 일언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그 동안 무상을 얼마나 사유해 보았나! 나 자신에 대한 무상과 무아는 고사하고 사계절이 매년 찾아옴에도 그 속에 담긴 무상 한 자락을 스쳐보기라도 했는가!

지운 스님이 ‘연기도 마음이요, 공도 마음’이라는 말이 새롭게 들린다. 정념을 세워 무상을 사유하고 연기와 무아임을 알아간다면 분명 훗날 화두도 잘 들릴 것이다. 자비선사에서 지운 스님이 근 20년의 노하우를 응축한 강의와 함께 자비수관과 자비다선을 하는 연유를 이제야 알았다. 방편이다. 강의를 통해 불자들로 하여금 사유케 하고, 정념을 통한 자비수관을 통해 어느 정도 위치까지 올린 후 사마타 위빠사나로 안내하려는 것이다. 물론 그 정점에는 ‘간화선’이 자리하고 있다.

지운 스님의 시 한 수가 좋다.
빈 마음으로 무상을 다시 보라.
어느 곳에도 머물 수 없나니
무주(無住)에 머물면
오직 마음뿐임을 알게 되리라.

수행에 입문하고자 하는 불자는 물론이고 간화선과 위빠사나를 하고 있지만 별다른 증득이 없는 도반도 지운 스님을 찾아보라. 그 동안 접하지 못했던 새로운 숲길을 열어 보일 것이다.
찾을 길 없던『뿌리없는 나무에 핀 꽃』은 스님이 1시간 강의를 위해 잠시 자리를 뜬 사이 1만여 권의 서가에서 어렵게 찾았다. 근기가 약해도 이젠 펼쳐 보아야겠다. 일단 지운 스님의 사유라도 엿보고 싶기 때문이다.

채한기 상임 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지운 스님은

1991년 운성 강백으로부터 전강 받았다. 송광사, 동화사 강주와 조계종 행자교육원, 조계종 교재편찬위원을 역임했다. 현재 경북 성주 자비선원장, 조계종 단일계단 교수사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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